21.10.02 11:39최종 업데이트 21.10.0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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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장벽 주변에 밀집해 있는 동독주민들 ⓒ 화면캡처

 
분단 독일과 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 11월 9일. 대부분의 혁명적 사건이 그렇듯 긴 배경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단초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오랜 시간 쌓인 배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가장 약한 간극이 순간적으로 터지면서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꾼다.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해왔다.

패전이 갈라놓은 땅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중간 지대 없이 도심 한복판을 뚝 자른 철책너머로 보이는 두 삶의 차이는 너무나 적나라했다. 동독의 젊은이들은 불과 몇 미터 앞 철책 너머에 펼쳐진 자유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동독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 월경(越境)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공권력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급기야 1961년 동독 정부는 서쪽이 보이지 않도록 모든 철책을 콘크리트로 교체하기에 이르렀지만 국민들의 이성의 눈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한 동독인들의 탈출이 이어졌고 민주화 시위도 점점 거세졌다.

때마침 1985년 이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변화를 추구하던 소련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에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었다. 동독 정부는 자유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1989년 11월 9일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지금 바로"... 역사를 바꾼 그날

동독에 생중계되는 회견 자리에서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베를린 장벽 지역을 포함 모든 국경 통과지점에서 국민들의 출국을 허용한다는 정부의 방침을 밝혔다. 이때 한 외신 기자가 묻는다. "법령이 언제부터 발효됩니까?(Wann tritt das in Kraft?)" 20세기 100년의 몇 손가락에 꼽힐 순간이었지만 질문 내용은 통상적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독 정부 내 소통은 원활하지 않았고 대변인조차 정확한 사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기자의 질문에 큰 의미 없이 자료를 뒤적이던 샤보프스키 대변인이 내뱉은 말은 "제가 아는 한 이 법령은 즉시 발효됩니다(Das tritt nach meiner Kenntnis ist das sofort)".

그 순간만큼은 대변인도, 현장의 기자들도, 그 누구도 이 말이 앞으로 초래할 결과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심지어 대변인은 건조한 톤으로 한 마디 더 보탠다. "지금 바로(unverzüglich)". 표정도 무미건조했다. 아마도 대변인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기자들은 발언 내용을 전 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즉시'라는 부사로 하고 싶은 말이 '머지않은 시간 후'였을 수 있지만, 뒤따라온 '지금 바로'의 무게는 달랐다. 이 말을 들은 동독 시민들은 숨도 쉬지 않고 베를린 장벽으로 향했고, 감격에 겨워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통일을 향한 봇물은 그렇게 터졌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못 되는 준비 기간 후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단 하나의 헌법만을 가지게 됐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오늘, 통일 후 출생한 독일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한다. 분단의 원인이었던 전쟁을 겪은 독일인은 10% 남짓, 그리고 전쟁을 모른 채 분단의 비극을 살았던 60%가 현재 독일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통일 독일이 삶에 미친 영향을 직접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일본과 반대로... 아데나워부터 슈뢰더까지
 

독일 역대 총리들. 윗줄 왼쪽부터 초대 아데나워, 2대 에르하르트, 3대 키징거, 4대 브란트. 아랫줄 왼쪽부터 5대 헬무트 슈미트, 6대 헬무트 콜, 7대 슈뢰더, 8대 현 메르켈 총리. ⓒ .

 
아데나워 총리 세대로 불리는 전후 1세대는 전쟁 잿더미에서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사명과 함께 전범 국가라는 오명을 씻어내야 했다. 흔히 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면서 전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독일과 일본의 전후 행보가 비교된다. 독일이 일본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재건을 위해 그들이 서야 할 국제적 위치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아데나워 총리는 지속적 평화란 국제적 연대에서 오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 했고, 그 구상은 히틀러의 집권을 보면서 더 확고해졌다. 총통이 되자마자 1차 대전 패배 설욕을 다짐하던 히틀러와 달리 2차 대전 패전 후 첫 총리 아데나워는 제일 먼저 이웃 유럽 국가들과의 연대에 전력을 다 했다.

집권 14년 가운데 초기 6년 동안 유럽평의회(1951년), 유럽연합 전신 유럽석탄철강공동체(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1955년)에 차례로 가입했다. 1963년에는 역사 속 앙숙이던 프랑스와 영구평화조약(엘리제 조약)을 맺었다. 당시 아데나워 총리의 나이는 87세. 프랑스와 영구적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드골 대통령과 15번을 만나고 40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침략국이자 패전국 독일이 다시 유럽의 중심,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영구적 평화(ewigen Frieden)에 대한 집요한 신념, 자신들의 '세계 내 존재(In der Welt Sein)'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칸트(I. Kant)의 나라, 하이데거(M. Heidegger)의 나라 독일은 그렇게 전쟁을 딛고 영구적 평화를 위한 국제 연대에 힘썼으며 전후 반세기만에 독일을 평화의 나라로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후 70년이 넘도록 주변국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과 대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자면 일본은 전후 70년이 넘게 주변국들을 공동존재(Mitsein)로 인정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대상화(對象化)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분법적 사고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일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유럽 안에 있어야 하며 유럽도 독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정파를 초월해 독일 정치의 뿌리로 이어졌다. 보수 정당 기민련(CDU)의 오랜 집권 후 1969년 진보 정당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가 총리에 취임한 후에도 독일의 친 유럽 기조는 이어졌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나치 희생자 위령탑에 무릎 꿇은 브란트 총리의 모습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이후에도 독일의 모든 총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나치 만행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이에 대해 독일 국민은 '도대체 언제까지 용서를 빌어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인류의 비극을 자신들의 역사에서 영원히 지우지 않기 위한 다짐인지 모른다.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지난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게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었다. ⓒ 다큐 영상 캡처

 
전후 2세대로 불리는 헬무트 콜의 시대는 그런 배경 속에서 통일을 이룰 수 있었고 프랑스와의 깊은 연대 속에서 독일을 유럽통합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했다. 콜 총리는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재무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서 마르크 환율을 1:1로 관철시켰다. 당시에는 이 정책이 서독의 기업들에 손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았지만 통일과 화합을 위한 비용으로 간주했다.

콜 총리 체제의 독일은 심지어 통일과 유럽 화합을 위해 폴란드와 영토 분쟁 소지가 있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마저 권리 포기를 선언했다. 그의 유럽 동반자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다. 아데나워에게 드골이 있었다면 콜에게는 미테랑이 있었다. 그렇게 과거의 앙숙 독일과 프랑스는 깊은 신뢰 속에서 새로운 유럽을 만들어갔다.

20세기 최장 집권 총리 헬무트 콜이 물러나고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집권기를 시작했지만 친 유럽 대외정책과 통합을 향한 장기 비전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독일이 지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0년 넘게 이어지는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은 경제 대국 독일의 지반을 서서히 침식하고 있었다.

서구 선진국들의 저성장 시대가 독일의 통일 시기와 겹치면서 모든 걸 통일 탓으로 돌리는 경향도 없지 않았지만 어떻든 조치는 필요한 상황. 2002년 2기 임기를 시작한 슈뢰더 총리는 근본적 개혁을 위한 정치권 대타협을 시도했다. 이른바 '하르츠 법안'이라 불리는 노동시장정책 개혁 법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기본 목표로 하는 개혁은 전통적 진보세력의 이탈을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당장 눈에 띄는 성과도 적어 중도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전통적 진보세력의 이탈이 슈뢰더 총리에게는 뼈아픈 결과였고 그렇게 그는 총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다.

'무티 메르켈'이 보여준 것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9월 10일(현지시간) 베를린 북부에 있는 고향 템플린의 육아센터 건설 현장을 방문해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 연합뉴스

 
2005년 슈뢰더 총리와 연정협상 줄다리기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메르켈 신임 총리는 어떤 의미에서 슈뢰더 총리와 거울 뒤 모습처럼 정반대의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파 기민련(CDU) 출신으로 총리에 오른 메르켈이지만 전통 우파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슈뢰더 총리는 이른바 '제3의 길'을 내세우며 영국의 블레어 총리, 프랑스의 조스팽 총리와 함께 서유럽의 중도 좌파 트로이카를 이뤘다. 새로운 길을 걸었던 그는 중도의 확장성을 다소 얻었지만 왼쪽의 충실한 좌파 유권자를 더 잃는 결과를 얻었다. 이에 반해 메르켈 총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메르켈 총리의 최대 치적으로 중도정치를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만큼 일부 오른쪽 지지자들의 이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콜 총리에 이어 20세기 들어 두 번째로 긴 임기를 이어가는 메르켈 총리의 장수 비결은 현재의 독일 정치 지형에서 그가 오른쪽과 왼쪽 지지자들에 대한 가감 셈법을 노련하게 구사한 데 있다(만약 현재 연정 구성이 12월까지 장기화되면 콜 총리의 최장수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그의 임기 동안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이 극우 정당을 만들었고 이들의 포퓰리즘 정책들은 특히 구동독 주민들의 불만을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메르켈 총리를 향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이처럼 극우 세력이 확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다수의 독일 국민은 극단세력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택한 메르켈 총리를 지지하고 있다.

난민정책이 대표적이다. 2015년 시리아 사태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에 대해 메르켈 총리는 두 팔 벌려 맞았다. 가짜뉴스와 극우세력의 집요한 공격으로 한때 지지율이 주춤했지만 메르켈은 성과로 맞섰다. 난민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던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의 실업률은 세계 최저수준인 3%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치안이 불안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2020년 독일의 '세계행복보고서' 순위는 G7 국가 가운데 제일 높다.

그의 중도 정치는 환경정책에서도 빛을 발했다. 야당시절 재생 에너지에 반대하던 메르켈은 총리가 된 후 오히려 탈 원전을 부르짖고 있다. 얼핏 생각할 수 있는 정치인의 변신과는 반대 방향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그의 생각을 바꾸는데 일조했다. 이제는 핵을 없애고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미래로 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의 집권 기간 진보 정당이 설 땅이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주요 진보 아젠다를 선점 또는 흡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녹색당도 기꺼이 그의 연정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사민당마저 품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처럼 극단을 배제한 모든 합리적 정책을 수용할 줄 아는 그에게 독일 국민들은 '무티 메르켈'(Mutti Merkel 메르켈 엄마)이라는 애칭을 선물했다.
 

독일 총선을 하루 앞둔 9월 25일(현지시간) 앙겔라 메르켈(왼쪽) 총리가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오른쪽)의 지역구 아헨에서 지원 유세를 벌이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 총선을 끝으로 16년간의 집권을 마치고 정계를 은퇴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

 
분명 메르켈은 현실 정치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나 윤리적 선명성으로 보나 그의 선택은 성공했고 독일은 그의 집권기간 동안 '유럽의 환자' 오명을 벗고 또 다른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이다. 슈뢰더 총리 당시 이뤄놓은 개혁이 메르켈 집권 중에 빛을 본 측면도 있다. 어떻든 열매를 놓치지 않는 것도 정치인의 능력이다.

메르켈 총리는 스스로 물러나는 첫 번째 총리의 기록도 보유하게 됐다. 현재 연정 협상이 진행 중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신승한 야당 사민당(SPD)이 약간 유리한 입장이다. 75%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가지고 퇴임하는데 정권을 내준다는 것이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독일 정치 환경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독일 국민이 그의 16년 집권 기간 동안 지지했던 것은 우익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선시키는 진영 논리의 결과도 아니었다. 극단을 배제한 합리적 타협의 정치, 진보 아젠다까지 포용하는 융합의 정치, 그것이 독일 국민들이 열광한 메르켈 정치였다. 그러한 융합의 정치는 전후 70년, 평화와 화합을 향한 일관된 길을 걸어준 독일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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