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1 17:52최종 업데이트 21.10.0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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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매력적인 건 7할이 바람 때문이다.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바람이 불었다. ⓒ 김병기

 
자전거가 매력적인 건 7할이 바람 때문이다.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바람이 불었다. 허벅지 근육으로 대기를 가르면서 생기는 공기 마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기압 차이가 아니라 육체노동의 대가였다. 뺨에, 온몸으로 침투한 바람은 입안에 날치 알 터지듯 세포를 하나씩 일깨웠다. 손바닥만 한 안장 위에서 나는 바람을 탔다. 

웅~~


두 바퀴로 질주할 때 귓바퀴를 돌아 고막을 울리는 건 소음이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기자질을 하면서 세상의 정보와 분별로 채웠던 머릿속을 비워보라는 유혹이었다. 그 자리를 오롯이 다른 것으로 채우거나 허공인 채로 놔두라는 충동질이었다. 그것도 소음으로 느껴지면 목을 90도 각도로 틀어 옆을 봤다. 귓바퀴를 거치지 않는 바람은 소리가 없었다.  
  
15년간 이어진 나의 자출(자전거 출퇴근)은 '두 바퀴 산책'이었다. 

[떠나자] 직선과 곡선 사이, 풍경처럼 콕 박히고 싶다
 

강원도 고성에서 해운대까지 달려보자 ⓒ 김병기

 
동해안 자전거 여행을 계획한 건 기대 때문이다. 쪽빛 바다와 수평선, 다른 한쪽에선 백두대간 준령들이 말달릴 것이다. 그 파란색 직선과 녹색 곡선 사이로 풍경처럼 박히고 싶었다. 늙은 어부의 주름진 손과 능숙한 손놀림, 비릿한 항구의 동트는 새벽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었다. 동해안 첫 출정일을 7월 25일로 정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자."

대부분의 라이더(Rider)는 부산에서 고성 노선을 택한다. 한 차선, 한 뼘이라도 해안에 붙어서 달리고 싶어서이다. 나는 반대였다. 고성에서 군 복무를 했다. 35년전, M16 소총과 수류탄 2발, 크레모아(Claymore) 지뢰, 야간투시경 같은 살상 무기를 온 몸에 장착한 채 M60 기관총까지 메고 기진맥진한 람보처럼 해안초소 사이를 걸었다.

밤 근무를 마친 어느 날, 군복을 입고 군화도 신은 채 취침등만 켜진 내무반 마루 바닥에 엎드려 끄적였던 나의 첫 습작시 '초병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늘상 바람이 불었다/두둑두둑/약질 내 체구 앞에서/비명을 지르며 모래알 떨어져 내리고/미친바람에 실려/멀리 아메리카 대륙에서 날아온 갯비린내/나의 총구는 늘상/소금기에 절어/하얗게 울고 있다 (이하 생략)   

소금기가 엉겨 붙어 하얗게 변색된 총구를 기름 헝겊으로 닦으며 한 청춘의 실존을 짧은 글로 기록했던 그 곳. 화진포 앞바다의 넙적 바위 위에 앉아 시멘트 한 줌 바르고 그 위에 '괴뢰 침투 방지용' 깨진 유리조각을 붙이던 기억도 이젠 추억거리이다. 내가 직접 쳤던 3중 철조망 안에서 열병을 앓듯 지나간 시간을 무심히 바라볼 여유도 생겼다. 

세월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악몽조차 동경으로 소환했다. 

[노선] 7번 국도의 노래... 바람 타고 싶다
 

울산 간절곶 ⓒ 김병기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해안 초소 바로 뒤편 해송밭 너머 7번 국도는 탈영지였다. 초병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다. 강원도 양양의 한 소초에 있을 때였다.
 
나 하나의 모습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본다/설익은 햇살에 젖은 파도는/눈물인 듯 찢기워 간다/(중략)/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물살의 깊은 속을 항구는 알까/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딥띠리 딥띱 띠비디비딥

1985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이다. 그 때 들었던 '높은 음자리'의 노래 <바다에 누워>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7번 국도에서 20대 초반 쯤 돼 보이는 여자의 노랫소리였다. 경쾌한 가락과는 달리 터질듯한 고음이 절규처럼 느껴졌던 건 가사 때문이었다.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애와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끈적하게 뒤섞인 내 마음 같았다.  

정체 모를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내 등을 훑고 지나가곤 했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폭포 밑이 아니라 7번 국도에서 '득음'이라도 하려는가?'

한번 따져 묻고 싶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도 그처럼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7번 국도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싶었다. 한 평 남짓한 초소를 박차고 나가 바람을 타고 싶었다.

[무게] 1.5kg의 욕망을 덜다 
 

카메라와 여벌 옷, 일부 공구 등 1.5kg의 욕망을 덜어냈다. ⓒ 김병기

 
아내와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물품부터 구입했다. 팔토시와 발토시 2장, 목플러와 면마스크, 장갑, 긴급 수리할 공구세트와 자전거에 부착할 작은 가방과 우비. 휴대용 펌프와 펑크 난 바퀴를 수리할 패치 세트는 미리 사 놓았던 것을 쓰면 됐다. 그걸 꺼내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방 구석에 밀어 넣었다. 

휴대폰에 부착할 카메라 렌즈 세트와 동영상 파일을 옮길 수 있는 4테라짜리 외장 하드도 큰 맘 먹고 샀다. 안장통을 덜어줄 기능성 팬티 2장도 구입했다. 쫄바지 한 장을 매일 빨아 입어도 되겠지만, 평소에도 비호감이었다. 볼품없는 신체 윤곽이 드러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대신 반바지와 땀을 잘 흡수하는 윗도리 2벌도 샀다.   

여기에 여벌옷과 세면도구, 카메라, 휴대용 동영상 촬영기기, 노트북과 셀카봉, 핸드폰 거치대 등을 가방에 넣어서 무게를 재니 8kg이 넘었다. 이걸 등에 지고, 또는 가뜩이나 무거운 MTB 자전거 뒷자리에 매달고 700~800km를 달릴 수 있을까? 문득,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수없이 산에 올랐던 박그림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등산은 무게와의 싸움이지."

욕망을 내려놓아야 즐길 수 있고,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자전거 여행도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카메라와 여벌 옷, 일부 공구 등 1.5kg의 욕망을 덜어냈다. 여행지에서 필요할지도 모를 빈 공간을 확보했다.  

[날씨] 최악 폭염 특보, 열사병 사망자 00명...

그러자 또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열대야 지속될 듯' '폭염특보... 열사병 사망자 00명' '강릉,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격상'

심상치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약간이라도 과로하거나 과음하면 탈이 났다. 노화의 신호였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나의 일탈을 응원해오던 두 딸과 아내의 걱정도 늘었다. 

"아빠, 땀을 많이 흘릴 테니 커피와 이온 음료를 계속 마셔야 해요. 혹시 모르니 강심제 처방을 받아서 약을 타가면 좋은데."
"당신도 늙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천천히, 절대 무리하지 말고요."

여행을 앞두고 노선도 파악하고 영상을 만들 요량으로 유튜브를 봤더니 라이더들은 속도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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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전쟁을 치르듯 자전거를 탔다. 이들의 내비게이션에는 '숨'과 '쉼'이 없었다.

[속도] '숨'과 '쉼', 해안선 1만리 두 바퀴 산책 
 

부산 감천감성마을 입구 ⓒ 김병기

 
카카오맵으로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부산 을숙도까지 자전거 거리를 찍었다. 516km였다. 7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포항을 지나면서부터 28번, 35번 등 내륙의 국도로 갈아타는 노선이다. 주행시간은 33시간 42분, 평균 속도는 15km정도였다. 매일 8시간 120km를 달린다면 4일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몰고 지옥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나마 일상의 과속 궤도에서 탈선해서 산책을 하고 싶었다. 사실 50대 중후반의 체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이기도 했다. 나는 '숨표'와 '쉼표'를 넣어 거리를 다시 쟀다. 

안장에서 내려 매일 1~3곳의 역사문화 공간, 나보다 먼저 그곳을 다녀간 이들의 시공간에 잠시 멈출 것이다. 새벽 항구에서 어부의 삶을 엿보는 시간도 일정에 넣었다. 사진과 영상도 찍어야 했다. 가급적 동해안에 바짝 붙어서, 네비게이션이 지시하지 않는 길에도 두 바퀴를 찍으며 빈둥빈둥 해찰할 여유를 갖고 싶었다.  

포항에서 내륙 국도로 새지 않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더니 실제 주행거리는 726.1km였다. 길에서 헤매는 거리를 합치면 거의 800km는 될 것 같았다. 10일 동안 자전거를 탄다면 매일 80km를 달려야 한다. 10구간으로 나눠 여행 일정을 다시 짰다. 주행 거리는 늘었지만, 속도는 늦췄다. 

[거리] 매일 80km 10구간... 동해의 바람을 가른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 대진 고속버스 티켓을 끊었다. ⓒ 김병기

 
1구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낙산사까지, 2구간 강릉 허균허난설헌기념관, 3구간 맹방 해수욕장, 4구간 망양정 해수욕장, 5구간 영덕 해맞이공원, 6구간 일월사당, 7구간 문무대왕 수중릉, 8구간 울산 병영성, 9구간 해운대 달맞이공원, 10구간 을숙도 생태공원까지이다.

하지만 이에 얽매이지 않고 놀면서 쉬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해송 숲 어디선가, 어느 바위 그늘 아래에서 졸기도 할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길을 내왔던 역사 속 군상과도 마주하면서 두 바퀴로 동해의 바람을 가르고 싶다.

2021년 7월 25일 오후 1시35분, 나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싣고 강원도 고성군 대진시외버스터미널로 떠났다. 올해 동해안에서 시작해서 내년에는 남해안과 서해안까지, 우리나라 해안선 1만리 여행의 첫 발을 뗐다. 두 바퀴로 달리는 나의 새길 앞에 무엇이 돌출할지, 두렵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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