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1 13:25최종 업데이트 21.11.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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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두 번째 사연은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삼택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제주 김녕중학교 ⓒ 김녕중학교

 
한경훈씨가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를 해 받은 아버지 사건의 형사사건 기록 자료를 보면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경찰이 한삼택씨를 잡아간 이유는 1967년 김녕마을 출신 재일동포들이 김녕중학교에 기부금을 보냈고 당시 김녕중학교 서무과에서 일하던 한삼택씨가 그 일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해 제주 김녕중학교에서는 관사 신축 논의가 있었다. 김녕 출신 재일동포들은 같은 재일동포인 김녕중학교 교장의 누이를 통해 기부 의사를 밝혔다.


당시 김녕중학교 교장과 서무주임 한삼택씨는 기부 의사를 밝힌 김녕 출신 재일동포들과 편지로 관사 신축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고, 기부금을 받아 김녕중학교 관사 신축에 사용했다. 김녕중학교는 건물을 신축한 후 선례에 따라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현관에 부착했고 기부자들에게 관사 낙성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발송했다. 한삼택씨가 한 일은 이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 일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경찰은 기부금을 준 재일동포가 조총련 간부이며 이들이 조총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과 연락하고, 금품을 받고, 편의를 제공하고, 찬양 고무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김녕중학교 교장과 한삼택씨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누가 봐도 '임의'라 볼 수 없는 정황

이 사건은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 모두 문제가 많다.

우선 수사 과정부터 살펴보면, 혐의를 인정할 수 있는 단서가 확인되고 이를 근거로 당사자를 조사하는 것이 수사의 순서라 할 수 있는데, 이 사건 기록은 피고인들이 모든 사실을 자백한 진술조서부터 시작된다.

수사기록상 한삼택씨와 관련된 최초의 자료는 1970년 10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작성된 조서다. 이 신문조서는 한삼택씨가 수사기관에서 받은 최초의 조서로 제1회 신문조서라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한삼택씨는 이 신문조서 작성 이전에는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없어야 한다.
 

1970. 10 6. 자 피고인 한삼택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 한삼택 사건자료

 
문: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인 김**, 한**을 한국에 들어와서 김녕중학교 신축교사 및 관사 준공식에 참석토록 한 행위가 위법인줄 몰랐나요?
답: 위법이 된다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분들이 참석 못하리라 생각하고 발송한 것으로서 죄송합니다.
- 1970. 10 6. 자 피고인 한삼택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이 조서에서 한삼택씨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서 갑자기 조사 말미에 증거자료를 임의제출(강박이나 강압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제출한다는 말)한다고 진술하고 증거를 제출했다. 수사관이 혐의에 대하여 질문하면 한삼택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료는 이것이올시다'라고 답변하면서 증거를 임의로 제출했다는 것이다.
 

1970. 10 6. 자 피고인 한삼택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 한삼택 사건자료

 
문: 교장이 조총련계 김** 및 동 한** 등과 왕래된 서신이 보관돼 있나요.
답: 네 본인이 김녕중학교에서 참고로 가져온 것인데 이것이올시다.
차시 피의자가 임의제시하는 이**이 김** 등에게 발송한 서신 원안 7통, 재일 김동인 등으로부터 이**이 수취한 서신 4통, 재일 김호군이 이**에게 보낸 서신 1통을 압수 증 제6호로 채택하다.
- 1970. 10 6. 자 피고인 한삼택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 중

제1회 피의자진술조서에서 한삼택씨가 '임의'로 제출했다고 기록된 증거들은 '김녕우체국과 북제주군 농협조합 김녕지소에서 확인한 예금거래증명원', 이 사건 1회 피의자신문조서일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3년도 전인 1967년에 작성하였던 서신 12통, 1년 전에 작성된 '재일교포 교육공로자 초청의뢰' 초청장, 3년 전인 1967년 11월 3일자로 작성된 '재일교포 희사진에 대한 감사장 수여' 문서, 김녕중학교 교장 관사의 전경과 현관 내부에 부착한 희사자 명패 촬영사진 2매이다.

처음 조사를 받는 한삼택씨가 이 증거를 제주에서 모두 준비해 서울로 올라가 서울중부경찰서에서 수사관에게 제출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한삼택씨의 혐의는 6개의 공소사실로 공소사실별로 자료도 다르며 발생일자도 다르다. 해당 사실관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 수일에 걸쳐 자료를 제주의 집에서 찾고 준비한 후 서울의 경찰서에 제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수사기록상 한삼택씨는 위 진술조서가 작성된 1970년 10월 6일 처음으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것이고 그 이전의 수사기록은 없다.

한삼택씨의 딸 한혜정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체포일은 1970년 9월 26일, 세화국민학교 가을운동회 전이다. 당시 친척이자 한혜정씨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향토사학자 김현수씨도 1970년 9월 한삼택씨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70년 9월에 혜정이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나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주신문에서 기사를 봤습니다."

한삼택씨의 조카인 강동우씨는 한삼택씨의 체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 9월 경 제가 학교를 다녀오니 집에 대문이 열려있고, 가구도 다 열려 있었습니다. 당시에 집에 홀로 계시던 할아버지 말로는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했다고 합니다. 한삼택 고모부가 연행되어 간 뒤 장인 집이니까 일본에 있는 동생이나 누이와 혹시라도 수상한 서신이 왔다 갔다 하지 않았나 하고 의심해 가택수색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한삼택씨의 가족과 친척, 지인들은 모두 한삼택씨의 연행시기를 10월이 아닌 9월로 진술하고 있다. 공동피고인이던 교장 이**씨의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에도 자신의 연행 날짜가 1970. 9. 25. 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함께 잡혀왔다는 한삼택씨도 같은 날 혹은 비슷한 시기에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삼택씨가 잡혀간 9월과 첫 번째 피의자진술조서가 작성된 10월 6일 사이 상당한 시간이 있었으나 이 기간에 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임의수사란 피의자나 참고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므로 조사를 받더라도 언제든 자유로이 휴식할 수 있고 원한다면 퇴거할 수 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한삼택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1979년 10월 9일에 집행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이루어진 조사는 강제수사가 아니라 임의수사이다. 임의수사라면 통상 수사기관은 출석조사 대상자에게 조사협조를 요청하고, 조사대상자는 수사기관 협의 하에 원하는 날짜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적법하게 수사가 이루어졌다면 1970년 9월 26일부터 10월 9일까지 한삼택씨가 제주로 돌아가지 못한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

 

구금 ⓒ pixabay

 

한삼택씨가 연행된 후 제1회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사이의 기간에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첫 피의자신문조서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관련 증거까지 제출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딸 한혜정씨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공항 104호실이라는 곳으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항 104호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한삼택씨가 연행 후 바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제주에 구금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구금 기간과 자백의 경위뿐만 아니다. 중요한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 증거도 없이 기소가 이루어졌다. 한삼택씨에게 공소사실의 죄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선 조총련이 왜 반국가단체인지가 입증되어야 하고, 김녕중학교 교장 관사 건축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이 조총련의 간부가 맞는지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소장은 특별한 증거 없이 '피고인 한삼택은 재일본 조선은행 대판신용조합 이사 김** 및 재일본 조선인 대판상공회 한** 등이 조총련계 간부직에서 활동 중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공모하여'라고 시작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자백조서와 한삼택씨가 제출한 증거를 근거로 수사기관은 한삼택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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