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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부평(富平)다운 부평'으로 첫 발을 디딘 것이 언제인가!  많은 인천인(仁川人)은 '부평풍물대축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1997년 10월 1일, 바로 그 날이었다. '부평구민의 날'이다. 부평이 '새롭게 부평(富平)이 된 최초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풍물(농악) 중심 축제'가 시작된 날이다. 이것이 부평풍물대축제의 시작이었다. 사진은 부평풍물축제 모습.
 "부평(富平)다운 부평"으로 첫 발을 디딘 것이 언제인가! 많은 인천인(仁川人)은 "부평풍물대축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1997년 10월 1일, 바로 그 날이었다. "부평구민의 날"이다. 부평이 "새롭게 부평(富平)이 된 최초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풍물(농악) 중심 축제"가 시작된 날이다. 이것이 부평풍물대축제의 시작이었다. 사진은 부평풍물축제 모습.
ⓒ 부평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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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인천(港都仁川)' '주안염전(朱安鹽田)' '부평평야(富平平野)'

일제 강점기의 인천지역은 주로 이렇게 불렸다. 1940년 이전까지의 인천지역은 확실히 이랬다. 1930년대부터 조금씩 변화된다.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던 시절, 인천에선 비슷한 듯 다른 또 다른 말이 등장한다. 경인일여(京仁一如)란 말이다.

서울과 인천이 다르지 않고 하나란 뜻은, 극단적으로 이중적이다. 인천도 서울만큼이나 경제적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사용하면서 인천만의 고유한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1937년부터 '경인일여' 관련 사업은 시작되고, 1938년에 부평번영회(富平繁榮會)가 결성된다. 1938년 7월 11일, 인천각(仁川閣)에서 정기총회를 한 이후, 여러 사업이 구체화됐다.

부평평야(富平平野)는 특별히 부평광야(富平廣野)라고 불렀다. 인천지역에서 이렇게 넓은 들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경인일여'를 표방할 때부터, 부평평야 앞에는 공장, 건설, 공장지대란 말이 붙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서 부평평야의 육천에 이르는 소작 농가는 졸지에 경작할 땅을 잃게 됐다.

당시 인천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땅 투기 걱정을 했고, 소작농에 대한 보호책이 시급함을 역설했다. 물론 부평의 농지를 잃은 아픔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 피해는 오히려 지금의 대한민국부터는 덜한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평야가 있는 곳에 농악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백 년 전, 1920년대의 부평과 김포는 서로 친했다. 부평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0리(12km)의 거리에 있는 김포공립보통학교에 원적(소풍)을 갔다. 서로 정구시합도 하고, 함께 농악(풍물)을 치면서 하나가 됐다. 1930년대 말, 부평번영회에선 부금철도(富金鐵道)를 계획했다. 부평과 김포를 연결하는 철도로, 두 지역을 보다 가깝게 하고자 했던 의미도 있다.

해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김포평야(金浦平野)와 김포쌀을 잘 안다. 그러나 부평평야와 부평쌀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다. 김포(金浦)가 그 이름처럼 물이 드나들던 포구라면, 부평(富平)은 매우 비옥한 평야를 뜻한다. 여기서 해마다 쌀농사를 짓고, 보리농사를 지었다. 그 시절 부평농부(富平農夫)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름진 보리의 너울거리는 모양을 보고, 이제는 살았다고 어깨에 바람이 나는 농부들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다." (1938일 5월 7일 <조선일보>)
     
'어깨에 바람이 난다'는 표현이 생소하지만, 그 의미는 전해진다. 요즘 쓰는 말로는 '신명 난다'와 통한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던 부평농부에겐 농악(農樂)은 당연히 필수였을 것이다. 특히 여기는 부평광야(富平廣野)였으니, 꽹과리 소리는 더욱 우렁찼고, 태평소 소리는 더욱 건들거렸을 것 같다. 그 소리는 당연 부평 계양산까지 울려퍼졌을 것이다.

벽초 홍명희 (洪命憙, 1888~1968)의 <임꺽정(林巨正)>에 부평 계양산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도적의 소굴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도적이 되려 했을까? 버거운 삶을 살면서, 난세(亂世)를 등지고 계양산으로 이주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평평야(富平平野)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어깨에 바람이 나는 농부'였을지 모른다. 농토를 잃어버린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됐을 거다.

항도인천엔 응봉산, 주안염전엔 수봉산, 부평평야엔 계양산이 있다. 이 곳은 사람들 마음의 고향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인근 지역 사람들은 여기에 모였다. 일제가 미신(迷信)으로 몰아세워도, 조선사람들은 특별한 날이면 여기에 모여서 산신제(山神祭)를 올렸고, 거기엔 풍물이 함께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면 인천의 일본 관리도 여기에 동참을 했다.
 
부평평야. 삼산동은 논이 대부분인 부평평야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진은 삼산동이 개발돼 이전 모습으로 이 논위로 아파트와 문화시설들이 들어섰다.??
 부평평야. 삼산동은 논이 대부분인 부평평야의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진은 삼산동이 개발돼 이전 모습으로 이 논위로 아파트와 문화시설들이 들어섰다.??
ⓒ 부평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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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平野)가 있는 곳에 농악(農樂)이 있다. 부평광야(富平廣野)에는 농악이 더욱 번성했을 것 같다. 그러나, 나 또한 오래전엔 부평이 평야인지, 여기에 농악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1975년 3월부터 1976년 3월까지, 부평고등학교 1학년인 나는 날마다 동인천에서 부평을 오갔다. 그러나 교모에 부착된 '부평'(富平)의 의미를 알려 하지 않았다. 예전 부평고등학교가 있던 자리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부평평야는 사라진 지 오래됐고, 일제에 의해서 미군에 의해서 달라진 부평의 모습에만 익숙해졌던 것이다. 버스를 타면 당시 버스 안내양은 늘 '삼능 내리실 분 나오세요'라고 말했다. 여기에 무슨 세 개의 능(陵)이 있나? 그리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게 삼능(三菱)은 미쯔비시라는 일본회사상표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부평(富平)다운 부평'으로 첫 발을 디딘 것이 언제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인천인(仁川人)은 '부평풍물대축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1997년 10월 1일, 바로 그 날이었다. '부평구민의 날'이다. 부평이 '새롭게 부평(富平)이 된 최초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초 '풍물(농악) 중심 축제'가 시작된 날이다. 이것이 '부평풍물대축제'의 시작이었다.

'나래비 축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축제

1995년은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원년이다. 대한민국은 이때부터 '축제공화국'이 되어 버렸다. 지역민심을 얻기 위한 지역 단체장들은 축제를 마구 만들어냈다.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같았다. 지역마다 유명가수를 섭외하는 것에만 혈안이 됐고, '열린음악회' 짝퉁의 축제가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갈 때였다.

이런 형태의 축제를 방송가 은어로 "나래비 쇼"라고 한다. 이 또한 일본어의 잔재인데, 일본어 나라비 (並び, ならび)에서 나왔다. 주르륵 늘어놓았다는 뜻인데, 이런 쇼의 마지막은 모든 출연자가 나와서 쭉 늘어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게 보통이다. 형태는 늘 똑같고, 출연자만 좀 달라질 뿐이다.

당시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어떤 의지에서였을까?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시도 아닌, 구에서 '다른 축제'를 만드는 초석을 만들었다. '부평풍물대축제'는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나래비 축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축제다.

'부평구민의 날 풍물축제로'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중가요 초청 벗어나' '전통 민속대회로'가 신문의 타이틀이 흥미롭다. (1997. 9. 20. <한겨레>)
 
2009 부평풍물대축제 장면
 2009 부평풍물대축제 장면
ⓒ 부평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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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전야제에는 사물(농악)과 관악합주로 시작했다(1997년 9월 30일). 축제의 본공연에는 이광수&민족음악원, 서울예술단, 국립국악원, 가수 장사익·강산에가 함께했다. '악과 민족에 기반을 둔 공연콘텐츠가 소개됐다(10월 3일). 다음날 공연은 더욱 흥미로운데, 농악에 기반을 둔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리는 프로그램이었다.

김덕수가 이끄는 한울림예술단과 락밴드 '시나위', 남정호현대무용단이 출연했다(10월 4일). '풍물명인전'에선 남원농악의 유명철 명인을 초대를 했고, 인간문화재 박동진(판소리), 이은관(배뱅이굿)가 축제의 품격과 재미를 더해주었다.(10월 5일).

지방자치 시대가 시작된 이후, 대한민국에 이런 축제는 없었다. '부평풍물대축제'는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부평에 기반을 둔 기업체 풍물패와 대학생 풍물패의 동호인들이 출연해서 주민참여의 의미를 높였다.

'전국 최초 농경문화의 상징인 풍물을 이용한 주민축제'로 부평구 관내 21개동에 풍물단이 조직되는 등 민간 위주의 축제에 새로운 장을 연 부평풍물대축제. 이 축제는 그간 어떤 변화 발전했으며, 또한 축제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됐을까? 축제를 성공적으로 만든 주역은 누구였으며, 또한 이 축제와 연관해서 '부평두레농악'은 어떻게 복원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다음 호에 계속)

글 윤중강 국악평론가, 문화재위원 / 사진 부평구청 제공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태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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