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대전충청

포토뉴스

백화산 호국의길 가족과 함께 걷기 좋은 길이다. 가을에 걸으면 즐거움이 갑절이 된다. ⓒ 정명조

경북 상주에 걷는 길 브랜드 MRF가 있다. 산길(Mountain Road)과 강길(River Road)과 들길(Field Road)을 걷는 코스다. 반드시 세 길이 함께 들어 있고, 원점 회귀할 수 있어야 한다. 산길은 해발 200~300m의 낮은 곳에 만들어져야 한다.
 
어느덧 시월이다. 파란 하늘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계절이다. MRF 명품길 '백화산 호국의길'을 걸었다. 옥동서원에서 반야사 옛터까지 이어지는 5.1km 길이다. 구수천을 따라 만들어졌다. '백화산 둘레길' 또는 '구수천 팔탄 천년옛길'로도 알려져 있다.
 
백화산 호국의길의 시작, 옥동서원

직제학 홍여강이 명나라 사신으로 정해졌다. 그는 외동딸을 이모부 김자구의 집에 맡겨 돌보고 있었다. 방촌 황희 정승을 찾아가 시집 안 간 딸 때문에 명나라에 가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방촌은 나랏일이 중요하니 일단 떠나라고 하고, 홍여강의 딸을 그의 둘째 아들 보신과 혼인시켰다. 황보신은 부인이 이모부의 재산을 물려받자 이를 관리하며 중모에서 살았다. 방촌은 그의 아들 보신이 중모에 살 때 다녀갔다. 중모는 옥동서원이 있는 상주시 모동면이다.
 
옥동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았다. 황희 정승을 모신다. 백화산 호국의길이 시작하는 곳이다. ⓒ 정명조

1518년 황희의 현손인 황맹헌과 황효헌 형제가 독서당을 세우고 방촌의 영정을 모셨다. 1714년 백옥동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1789년 정조가 옥동(玉洞)이라는 친필 현판을 내렸다. 조선 끝 무렵,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백화산 호국의길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옥동서원에 큰 건물이 세 개 있다. 앞쪽에 있는 문루는 청월루(淸越樓)다. 2층이다. 아래층에 세 칸의 출입문과 양옆에 아궁이가 있고, 위층에 온돌방 두 개와 마루가 있다. 마루에 올라서면 마당과 강당이 마주한다.

가운데에 있는 강당은 온휘당(蘊輝堂)이다. 대청마루와 양쪽 방에서 여러 행사를 치르고 모임을 할 수 있다. 가장 뒤쪽 사당은 경덕사(景德祠)다. 방촌 황희, 사서 전식, 축옹 황효헌, 반간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백옥정 옥동서원에 딸린 팔각정이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올라와서 머리를 식히고 시를 읊었다. ⓒ 정명조
 
모동 벌판 백옥정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시원스럽다. 모동 벌판에는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 정명조

옥동서원 왼쪽에 있는 집 마당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혼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지루하다는 느낌이 살짝 들 때쯤 산등성이에 다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헌수봉 산줄기가 오르고 내리기를 몇 번 되풀이하며 구수천을 향해 달리다 옥봉에서 갑자기 멈춘다.

이곳에 백옥정이 있다. 서원에 딸린 팔각정이다.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올라와서 머리를 식히고 시를 읊었다. 정자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시원스럽다. 밑으로 구수천이 흐르고, 모동 벌판에는 비닐하우스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걸음마다 펼쳐지는 이야기
 
백옥정에서 내려오면 짧은 들길이 이어진다. 과수원 옆길이다. 안쪽에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있고, 바깥쪽에 호두나무가 있다. 나무와 쇠줄 울타리가 두 겹으로 빙 둘러쳐졌다. 전기가 흐르니 조심하라는 푯말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땅 주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큰 바위 하나가 넓은 터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세심석(洗心石)이다. 속세의 마음을 깨끗이 씻고 학문을 닦을 만한 자리라고 하여 밀암 이재 선생이 붙인 이름이다. 앞쪽은 담쟁이덩굴이 에워싸고 있다. 뒤쪽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올라가 보니, 위가 판판해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옆에 세워진 우평 황인로의 시비에는 스무 사람이 앉을 수 있다고 새겨져 있다.
 
구수천 상주를 지나 백화산을 끼고 흘러 초강천과 만난다. 영동에서는 석천이라고 한다. 반야사까지 여덟 번 굽이돌아 흐른다. 여덟 개의 여울을 일컫는 팔탄(八灘)으로 나누어져 있다. ⓒ 정명조

구수천 강길에 들어섰다. 반야사까지 여덟 번 굽이돈다. 여덟 개의 여울을 일컫는 팔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늘진 길이다. 바닥에는 길쭉하게 생긴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묵을 만들면 가장 맛있다고 하는 졸참나무 열매다. 도토리를 주워 끝을 보니 싹이 나고 있었다. 이것이 땅에 묻히면 나무가 될 텐데 사람들의 신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밤나무골에 독재골산장이 있다. 밤·약초 영농 단지다. 가로질러 지나갔다. 밤송이가 땅에 수북이 쌓여 있고, 미처 줍지 못한 알밤이 뒹굴고 있었다. 수확기에는 돌아가라고 하나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길은 없다. 앞만 보고 걸었다. 개인땅을 지나가는 것이 민망스러웠다.
 
구수천 출렁다리 밤나무골이 끝나는 곳에 출렁다리가 있다. 강을 따라 갈대가 무리 지어 있다. ⓒ 정명조
 
임천석대 고려 궁중 음악가 임천석이 나라가 망하자 이곳으로 내려와 흙집을 짓고 살았다. 이성계가 불렀으나 가지 않고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 정명조

출렁다리를 건넜다. 여기부터는 길이 제법 넓다. 호젓한 길을 걸어 저승골 삼거리에 다다랐다. 바위에 빨간색으로 저승골이라고 새겨져 있다. 섬뜩하다. 고려 시대 몽골 6차 침입 때 승병들이 몽골군을 유인하여 죽인 곳이다. 살아남은 몽골군은 물러가면서 앙갚음하듯 마을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뒤에는 이곳이 반역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호국의 길이 되어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휴대 전화도 터지지 않는다. 두메산골 느낌이 난다. 전쟁이 나도 모르고 지나갈 성싶지만, 바깥세상이 그리 멀지 않다. 걸어서 한 시간이면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나갈 수 있다. 구수천을 따라 병풍을 두른 듯 서 있는 낭떠러지 때문일 것도 같다.
 
구수천에는 낭떠러지가 많다. 그래서 물소리가 요란하다. 4탄에 있는 난가벽(欄柯壁)의 물소리가 가장 세다. 이곳은 5탄에 있는 임천석대(林千石臺)와 함께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임천석은 고려의 궁정 음악가다. 나라가 망하자 이곳으로 내려와 흙집을 짓고 살았다. 이성계가 그의 거문고 솜씨를 인정해 궁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가을에 걸으면 더 좋은 곳
 
농다리 두 개를 지났다. 굽이굽이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마저 쉬어간다. 물은 흐르지만, 호수같이 잔잔하다. 마침내 반야사 옛터에 다다랐다. 절터는 간데없고, 넓은 평상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쉬어갈 만하나, 마른 나뭇잎만 평상 위에 쌓여 있었다.

경상북도 경계석이 있다.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이 만나는 곳이다. 백화산 호국의길은 여기서 끝난다. MRF 명품길이 틀림없었다. 다시 오고 싶은 길이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걷기 좋다. 가을에 걸으면 즐거움이 갑절이 된다.
 
석천과 반야사 편백숲 전망대에서 바라본 석천과 반야사다. 너덜겅이 왼쪽에 보인다. ⓒ 정명조

계속 걸었다. 월류봉 둘레길 풍경소리길이 이어진다. 왼쪽으로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 문수전이 있다. 백화산 호랑이 너덜겅과 반야사 관음상을 지나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 팻말을 따라갔다. 편백숲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석천이 반야사를 휘감고 흐르는 모습이 뚜렷하다. 이 물줄기가 월류봉에서 초강천을 만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MRF 명품길 구수천 제2농다리 세월교 주변 모습이다. 물은 흐르지만, 호수같이 잔잔하다. ⓒ 정명조

경북 상주에 가면 19개의 아름다운 MRF 길이 있다. 15개의 이야기길과 4개의 명품길이다. 재미있는 전설과 역사 이야기가 함께한다. 가족과 같이 걷기 좋은 길이다. 산길과 들길과 강길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
태그:#백화산, #호국의 길, #MRF 명품길, #구수천, #임천석대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