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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동수
 함동수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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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던 김수영 시인이 탄생한 지 올해로 100주년 되는 해이다.

평생을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신과 처절한 싸움으로 일관했던 거대한 시인 김수영. 시처럼 그의 행로는 곳곳이 처절한 질곡의 길이었다. 그의 인생과 시적 체험을 하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 두 번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우리사회가 혼란과 진동이 거세던 전환기의 사건들이었다.

그는 1949년 김현경 여사와 결혼하자마자 6.25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다가 길거리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이 되었다. 그 후 탈출해 서울로 돌아왔지만, 곧 경찰에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숱한 고생 끝에 석방되었다.

이때 그간의 여정을 시로 모두 고백했는데, 그 시가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病捕虜) 동지들에게'다. 이 한편엔 전쟁 속에 담겨있는 한 인간의 고통과 번민이 처절하게 담겨있다.

'북원(北院) 훈련소를 탈출해 순천(順川)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中西面) 내무성(內務省)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病捕虜)동지들에게2' 중에서

그는 수용소에 갇혀 지내면서 현실극복을 위해 스스로 생니를 하나하나 차례로 뽑으며 죽음의 시간을 견디어 나갔다.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그곳에서도 밤낮 전쟁이었고, 밖에 있는 피난민들도 김수영과 같이 하루살이로 위기를 넘기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또 한 번의 큰 사건은 바야흐로 4.19혁명에 대한 일이다. 아마 김수영 시의 기저를 이루는 바탕이 된 사건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제목을 '4.19 시'라고 쓸 정도였다. 4·19 이후 사회 현실과 암담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식을 보여주었던 김수영은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고 격렬하게 사회 개혁을 부르짖던 시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로 그의 저항의식을 보여주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중에서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88.7%라는 경이로운 득표율로 당선 되었다. 조직적인 부정선거의 증거가 득표율이었다. 이런 캄캄하고 막막한 미래에 대해 1960년 4.19 혁명은 시민의 힘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린 역사적인 시민혁명이었다. 김수영은 이후 시인의 양심과 시적 진실을 바탕에 두고 자유스런 감각에 따라 열광적인 시작(詩作)을 했다.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중에서

그의 시 <푸른 하늘을>의 일부 내용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혁명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대에 김수영은 자유와 혁명을 동의어로 본다. 그의 양심과 자유의 척도는 비록 발표는 사후에 했지만, 획기적인 발상인 그의 시 '김일성 만세'가 언론 자유의 척도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이 진정 자유를 갈구했던 시민혁명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하는 듯했으나, 끝내 그 가슴 벅찬 혁명도 자리 잡기도 전에 1년 만에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재가 되고 말았다. 두 번의 혁명과 쿠데타를 지나고 보니 자유를 찾는 혁명에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고독과 피내음이 함께 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김수영은 4.19 이후 시민혁명으로 무한한 자유를 만끽하며 시냇물 흐르듯 써대던 그의 필력이 금새 저물어 다시 지하로 들어가는 시간이 도래한다. 자유의지 시민에 의한 시민혁명 실패, 또 다시 암흑기였다.

올해로 탄생 100년이 되는 김수영의 시는 결국 체질적으로 병약하고 억압을 견디지 못하던 성격이 더해 6.25전쟁과 4.19혁명을 몸소 관통하면서, 그가 주장하던 온몸으로 죽음처럼 지나가는 시간의 악몽을 몸소 체험한 '온몸의 시학' 리얼리즘의 실체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의 보석같은 시와 산문은 한국문학사에 그 누구보다도 반짝이는 성과를 이룬 문학의 보물이다. 중국의 뤼쉰처럼 우리시대에 선각자로서 한발 앞서 우리의 미래를 이끌었던 문학가이며 사상가였던 김수영. 100년 전에 태어나 50년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던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수백편의 시와 훌륭한 산문으로 '자유는 혁명이다'라는 논제를 던졌다.

그는 이미 확고하게(그의 작품 등에서 밝힌 바와 같이) 언론의 자유와 사상적 자유, 그리고 항상 깨어서 사회를 변혁시킬 숙제를 시민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자유롭고 싶었으나 끝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 그리고 그 사람. 김수영 시인이 온몸을 다해 평생 부르짖던 갈망 자유여! "하늘과 땅 사이의 통일로 느끼면서 동시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온통 자유 독립 그것 뿐입디다. 4월의 재산은 이런 것이었소." 아직도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수영의 100년과 그의 문학을 생각해보는 팬데믹이 벌어진 신축년(辛丑年) 10월에 그를 위한 소박한 시낭송회라도 열어볼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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