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5 18:50최종 업데이트 21.10.25 18:50
  • 본문듣기
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두 번째 사연은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삼택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2021년 1월 11일 한 남자가 박카스 한 상자를 들고 흥신소 사무실을 찾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한경훈이라고 밝힌 그는 아버지 고 한삼택씨의 형사사건 기록을 정리한 파일을 내놓으며 50년도 더 전인 1970년 9월에 일어난 일에 관해 우리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세화중고등학교 서무주임으로 근무하셨습니다. 1970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아버지를 데려갔어요."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사람들은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들이었다. 이들에게 서울로 끌려간 한삼택씨는 고문을 받은 끝에 조총련 간부들과 내통했다고 자백했고,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편의제공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씨가 전에 근무했던 제주 김녕중학교에서 김녕 출신 재일동포들이 보낸 기부금을 처리했는데, 경찰은 재일동포들이 조총련계 간부들이었다며 그가 조총련계와 내통했다고 했다.
 

서울 중부경찰서 ⓒ 위키백과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구금에서 풀려난 한삼택씨는 퇴직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었다. 그때부터 그의 가족은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자녀들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컸다.

어려운 환경 속에 자랐지만 한경훈씨를 비롯한 육남매는 아버지가 무죄라고 굳게 믿었다. 남매들은 성인이 된 후 여러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 사건 재심이 가능한지 상담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 남매들이 이제 60대가 다 되어 갑니다. 우리 생에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마음을 항상 품고 살다가 재작년 경 친척의 도움을 받아 제주교육감님께 아버지 사건에 관해 면담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주교육청에서 당시 교육청에 출입하는 기자 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수상한 흥신소를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한경훈씨와 형사기록을 함께 검토한 수상한 흥신소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갔다. 한삼택씨가 연행되던 날의 일을 한경훈씨는 어려서 잘 모른다고 했다. 대신 그때 중학생이던 누나 한혜정씨가 아버지가 끌려가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수상한 흥신소는 제주에 사는 누나 한혜정씨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

한삼택씨가 잡혀가기 전날까지 그의 가족은 평범했다. 교육공무원이던 한삼택(당시 38세)씨는 아내와 육남매를 둔 가장으로 세화중학교에서 근무했다. 당시 세화중학교에 다니던 한혜정씨는 1학년으로 14살, 세화국민학교(현 세화초등학교)를 다니던 한경훈씨는 3학년으로 10살이었다.

그때가 세화국민학교 가을운동회 전이라 한경훈씨는 운동회 생각에 들떠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한혜정씨도 동생의 운동회를 생각하며 신이 나 있을 때였다. 1970년 9월 26일 서무과 급사 선생이 수업을 하고 있던 한혜정씨의 교실 앞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는 잠시 담임과 대화를 했고 담임은 굳은 얼굴로 한혜정씨를 불렀다.

"어서 서무과에 계신 아버지께 가 봐라."

한혜정씨는 '아버지께 심부름 할 일이 있는가' 하고 생각하며 서무과로 갔다. 그때 멀리 복도에서 아버지 한삼택씨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천천히 신었던 실내화를 벗고 구두로 갈아 신고 계셨고 학교 현관 밖에는 낯선 검은색 지프차가 있었다. 아버지께 손님이 오신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 낯선 사람들의 굳은 표정과 검은색 지프차를 보자 한혜정씨는 불안했다. 혜정씨는 아버지께 다급히 달려갔고 아버지는 차에 타기 직전 혜정씨에게 '엄마에게 빨리 이야기해라'는 말을 반복해서 남겼다.

한혜정씨는 무엇을 어머니께 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무과 직원에게 '아버지가 어디로 가시는지, 누구와 만나는 것인지'를 물어봤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한혜정씨는 그길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아버지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제주공항 ⓒ JH Keem

 
한혜정씨의 어머니는 그 길로 세화중고등학교로 달려가 학교 직원들에게 남편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도 '형사들이 왔었다'는 것 외에는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막내를 등에 업고 제주의 모든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공항 104호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곳에서 서울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형제자매들만 남게 된 집

그날 이후 아버지는 이듬해 봄까지 집에 단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울 경찰서에 구금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러 육지로 자주 올라갔고 집을 오래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얼마 전까지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자던 집에 아이들만 남게 되었다. 한삼택씨가 잡혀간 후에 열린 세화국민학교 운동회를 한혜정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어 제가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 운동회를 했습니다. 1970년 가을 운동회니까 9월 추석 전후였을 거예요. 우리끼리 도시락을 먹고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아버지가 계셨다면 운동회 때 같이 사진을 찍었을 텐데 저희끼리 찍었습니다."
 

가을운동회 ⓒ 한혜정

 
추운 겨울을 형제자매들끼리 보내고 이듬해 봄 1심 재판이 끝나고 나서야 아버지는 제주로 돌아오셨다.

한삼택씨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가족들은 아버지의 무죄를 확신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이었던 형제 자매들은 성인이 되고 난 뒤 아버지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와중에 아버지 사건의 구체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다음주 월요일(11월 1일) 다음 편이 계속됩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6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