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8 07:06최종 업데이트 21.11.0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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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두 번째 사연은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삼택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형사사건 기록은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사기록은 수사기관이 사건을 조사하며 확인한 증거들을 편철하므로 이 기록이 수사기관이 주장하는 유죄의 증거이다. 검사가 이 수사기록을 근거로 재판을 열어달라고 '기소'를 하면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증거의 조사, 관련 증인들의 신문내용, 재판진행 내용은 '공판기록'으로 편철된다. 따라서 공판기록을 따라가면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수사는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재판은 공개로 진행된다. 또한 재판에서는 변호인이 있으므로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다. 수사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자백이 이루어졌더라도 재판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한삼택씨의 공판기록을 통해 피고인들의 억울함이 잘 드러났는지 확인해 보았다.


첫 번째 공판은 1970년 11월 25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제102호 법정에서 열렸다. 한삼택씨는 1970년 9월 말 경에 연행되었으므로 연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날 재판은 검사의 연기신청으로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이 모두 참석했는데도 실제 진행되지 않은 채 '기일연기'라는 결정만 이루어졌다. 두 번째 재판인 1970년 12월 7일의 재판도 검사 연기 신청이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이 모두 출석했지만 공판은 진행되지 않았고 '기일연기' 결정만 내려졌다.

1970년 12월 14일 오전 10시 제3회 공판기일에 드디어 검사가 출석해 재판이 실제로 진행되었다. 판사는 피고인들의 인적사항을 물었고, 검사와 변호인은 공소사실에 대해 피고인들에게 질문했다. 피고인들이 직접 재판정에 출석했으므로 판사는 피고인들을 직접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피고인들의 건강상태, 상처 등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법정 ⓒ 자료사진

 
그러나 공판은 형식적인 절차대로 진행되었을 뿐 누구도 피고인들에게 '얼굴이 왜 그런가, 손은 왜 다쳤는가' 등을 묻지 않았고, 공판조서에 그런 내용도 기재되지 않았다. 반면 딸 한혜정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 한삼택씨는 고문으로 인하여 손·발톱이 모두 까매졌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잡혀가신 가을이 지나고 이듬해 봄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초췌하고 얼굴에 핏기가 없이 말라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겨울만 되면 아버지께 매일 따뜻한 물을 떠다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양말을 벗고 대야에 발을 담그시는데 발을 보면 발가락이 다 새까맣게 된 거예요. '왜 이러냐'고 여쭤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시고 나서 아버지의 머리가 새하얗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염색을 해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아버지 나이가 당시에 40세 정도였습니다. 겨울만 되면 아버지의 손·발톱이 새카맣게 변하고 발등 아래가 까맣게 되었어요. 그리고 연행되기 전에는 그러지 않으셨는데 돌아오신 후에는 코가 항상 막혀서 괴로워하셨어요. 아버지는 결국 젊은 나이에 부비동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혜정씨 외에 한삼택씨의 조카인 강동우씨도 연행 후 한삼택씨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모진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돌아온 후부터 날씨가 추우면 몸 여기저기가 아파 술을 많이 드시고, 겨우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지니 경제적으로 많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함께 기소된 공동피고인 교장 이**도 자신의 항소이유서 및 상고이유서에서 전기고문 등을 수일동안 당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기재했다.

변호인도 침묵

재판과정에서 위법한 구금이나 수사관들의 가혹행위에 대한 진술이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항소심 기록 중 피고인신문과정에서 구체적인 불법구금에 대한 진술이 나왔다.
 
변호인 하경철은 피고인(교장선생님)에게

문 - 진술한 재일본 조선은행 대판신용조합의 이사인 김**과 재일본 조선인 대판상 공회 부사장인 한** 등이 조총련계통 사람들이라는 것을 언제 알았나요?
답 - 1970.9.27. 아스트리아 호텔에서 알았습니다.

문 - 어떻게 하여 동인 등이 조총련계통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나요?
답 - 수사관에 의하여 아스트라호텔에 끌려가서 고**과 수사관들이 말을 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문 - 그 이전에는 몰랐나요?
답 - 몰랐습니다.

문 - 1970.9.27. 아스트리아호텔에는 어떻게 하여 갔나요?
답 - 경찰관이 연행하여 갔습니다

문 - 일명 고박사(전에 가짜 박사 소동의 주동인물)인 고**이 그 당시 수사기관이 아니면서도 그 호텔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항소심 1차 공판조서(1971. 6. 3)

한삼택씨와 공범의 혐의로 함께 기소된 교장 이**은 공판정에서 '아스트리아 호텔에 수사관들에 의해 끌려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재일동포들이) 조총련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변호인은 그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고인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곳에 왜 끌려갔는지, 혹시 진술에 강압이 있었거나 고문이 있었는지, 왜 호텔에 피의자를 영장도 없이 연행해 갔는지 묻지 않았다. 판사도 검사도 묻지 않았다. 피고인 한삼택씨와 이**씨의 변호인들이 제출한 의견서에도 불법구금과 가혹행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교장 이**의 공판정에서의 증언 그리고 본인이 작성한 항소 및 상고이유서 외에 이 사건의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에서 피고인들의 구금과정과 고문에 대한 내용은 없다. 법률전문가인 수사관, 검사, 변호인, 재판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는 이야기는 당사자의 진술서 그리고 가족들의 기억 속에만 있다.

증거도 없는데 '범죄사실 인정하기에 넉넉하다'

수사기록상 재일동포들이 반국가단체 소속인지 이들이 간부인지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검사는 재판과정에서 김녕 출신 주민을 증인으로 신청해 김녕중학교 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이 조총련계라는 진술을 받고자 하였다. 증인은 김녕중학교 기성회 소속이라는 점 외에 특별히 교장 관사 신축자금 기부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1971년 7월 3일 열린 제3회 항소심 증인신문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문 - 김**과 한**이 조총련계 사람이라는 것을 증인이 언제부터 알았나요?
답 - 위 양인이 조총련계라는 풍문이었던 연월일은 확실하지 아니하나, 4, 5년 전에 들었고 (중략)

문 - 1964. 동경에서 개최하는 올림픽 때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위 양인이 조총련계 사람들이라는 말이 있었나요?
답 - 그런 풍문이 있었습니다.

1971. 7. 3. 항소심 제3회 공판기일 증인신문 중

검사는 증인에게 반복하여 '교장 관사 신축자금 기부자들은 조총련계 사람인가?' 질문하였고 증인은 '그런 풍문이 있었다'고 답변했다. 법정에서의 진술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일 때 증거능력이 있고, 만약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진술한다면 보통 '누가 언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지'를 한 번 더 질문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풍문에 대하여 더 이상 묻지 않고 신문을 마무리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들은 교장 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의 소속을 확인하려고 외무부와 주일대사관에 사실조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해당 사실조회에 대한 첫 번째 회신은 외무부나 주일대사관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

1971년 1월 21일 자로 작성된 중앙정보부의 회신문서에 따르면 김**의 국적은 조선(해방 전 조선적), 중화요리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조총련계인 조선인 상공회 대판(오사카)부 본부 부회장, 조총련계인 조은대판 신용조합 이사'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상공회가 왜 조총련계로 분류되는지, 조은대판 신용조합이 왜 조총련계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중앙정보부원이 작성하였다는 해당 문서는 누가 작성하였는지 작성자의 성명이 없다.

또 다른 재일동포 기부자 한**은 인쇄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조총련계인 조선인 상공회 대판(오사카)본부 부회장을 역임'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동시에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의 단원으로 국민등록을 필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민단이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줄임말로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던 단체이다. 민단은 1970년 당시를 기준으로 수사기관이나 재판부가 소위 '반국가단체'로 보지 않던 단체이다.

1971년 2월 3일 외무부는 법원의 사실조회에 대한 회신문서를 제출하였는데 중앙정보부의 기재내용과 달리 재일동포 기부자들 모두 민단 단원이라고 회신하였다. 위 두 가지 사실조회의 회신 문서에 따르더라도 교장관사 신축 자금 기부자들이 조총련 소속의 간부라는 점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도쿄에 있는 조총련 중앙본부 ⓒ 연합뉴스

 
증거가 없다면 피고인들을 유죄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상식을 뒤엎고 이상한 판결문이 나왔다.
 
1심 서울형사지방법원 70고41540

피고인등은, 재일조총련은 북괴의 지령 하에 불법 구성된 반국가 단체로서 조총련계와 접선, 금품을 수수하거나 회합, 통신 및 찬양, 고무 등의 행위는 동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교장) 피고인 이**, 동 한삼택은
재일본 조선은행 대판신용조합 이사 김** 및 재일본 조선인 대판상공회 부여사장 한**등이 조총련계 간부직에서 활동 중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공모하여


2심 서울형사지방법원 71노1530

위 사람들이 조총련계 인물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되고 위에 본 사실 등에 의하면 피고인은 그것이 남북이 양단되어 북괴의 불법한 위협 아래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실정으로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적법히 조사한 여러 증거들은 기록에 의하여 살피니 원심이 판시한 피고인에 대한 범죄 사실은 이를 인정하기에 넉넉하고 달리 원심이 소론과 같이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다고 볼만한 자료가 있음을 찾아볼 수 없으니 논지는 이유 없어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다.

증거 어디에도, 재판 과정 어디에서도 재일동포 기부자들이 조총련계 간부직에서 활동한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모든 허위자백과 고문, 불법구금을 들어 '적법하게 조사한 여러 증거'라 언급하며 범죄사실을 인정하기에 넉넉하다고 기재했다.

1971년 2월 25일 1심 재판부는 한삼택씨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한삼택씨는 1심 선고 후 5개월여의 구금에서 풀려나 제주로 돌아왔다). 1971년 7월 29일 2심이 항소를 기각했고, 1971년 11월 30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함께 재판을 받은 교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자격정지 3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이 선고되었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판결문에는 최근처럼 양형에 유리한 사유들을 적어주지 않아 한삼택씨가 집행유예를 받은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기부금 수령은 교장 이**이 주도하고 한삼택씨는 실무자로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실형까지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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