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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중인 이학무씨 ⓒ 월간 옥이네
 
청성면 산계2리 화백 이학무씨가 그린 작품들 ⓒ 월간 옥이네
 
"자세히 보면 모든 색이 다 다르잖아. 물감 색이 몇 개 없으니까 잘 섞어서 써야지. 천천히 들여다보고 연한 것부터 칠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또 연필로 그리고 다시 칠하고... 반복해야지. 이상하든 뭘 하든 그저 내 맘에만 들면 돼. 왜 남을 신경 써. 내 멋대로 찍어가며 그리다 보면 결국 그림이 되는 걸. 그게 참 신기하지?"

충북 옥천군 청성면 산계2리 마을 화백, 89세 이학무씨가 말하는 그림 잘 그리는 비결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학무씨의 그림 비결은 어쩐지 그가 인생을 그려온 방법과 닮아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학무씨는 그림이 재밌나 보다.
 
나 이학무, 여든 살에 그림을 시작하다

이학무씨가 붓을 든 건 8년 전 일이다. 자식 둘, 손주 셋을 직접 길러낸 그는 10년 전 남편의 고향인 청성면 산계2리로 돌아온다. "고된 마음 확 풀어지는 수업"을 찾아 옥천군노인장애인복지관 청산분관(이하 청산복지관)과 인연을 맺은 지도 10년. 이제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청산복지관의 모범생이 됐다.

"처음에 복지관 와서 웃음치료반이 있냐고 물었지. 근데 그런 반은 없다고 그러데. 그럼 내 마음 확 풀어지는 수업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까 장구도 쳐보시고 요가도 해보라고 그러더라고. 그간 별별 수업을 다 들어본 거 같아. 예쁜글씨반, 민요반, 꽃꽂이반, 만들기반, 토탈공예반... 장구반은 대회까지 나갔다가 팔이 아파서 그만뒀어."

몸이 힘들어 곧잘 하던 장구도 요가도 그만두어야 할 즈음, 불현듯 그림을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담당 선생님께 찾아가 물으니 선생님은 수채화반 교실로 이학무씨의 손을 이끌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는데, 마음에서 문득 이런 용기가 나더라고.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겠는데? 그림이나 한번 실컷 그려보고 싶다'고."

무언가에 홀린 듯 바로 수채화반에 등록했다. 연필이며 지우개, 스케치북을 손에 받아드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신이 났다.

"나는 한번 시작하면 결석은 없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절에 우등상은 못 받아도 개근상은 반드시 받았거든. 그 성격 그대로야. 대통령 선거 날에도 혼자 나와서 선생님이랑 단둘이 그림을 그린 적도 있다니까."

그렇게 빼곡히 채워나간 스케치북은 어느새 스무 권이 훌쩍 넘었다. 그중 잘 그린 몇 장은 쭉 찢어 청산복지관에, 산계2리 마을회관에, 마을 의원에도 걸었다.

"내 그림 좋게 봐주니 고맙지. 어딜 가든 내가 그린 게 있으면 기분이 좋고 자랑스러워. 자식들도 선물 주고 집에도 몇 장 걸고. 그리는 것도 좋지만, 나눠주는 것도 최고 재미야."

2남 1녀의 '쫑말이'
 
청성면 산계2리 화백 이학무씨 ⓒ 월간 옥이네

이원면 지정리에서 2남 1녀 중 "쫑말이(막내)"로 태어난 이학무씨는 두 오라버니와 대가족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난다. 배우고 입히는 것에 야박하던 시절, 그는 당시 이원국민학교에 입학해 잠시나마 배움의 길을 걸었다.

"매일 10리 길을 걸어 걸어 학교에 갔지. 그땐 어떻게 그렇게 매일 다녔는지 몰라. 집을 나와 신작로엘 나오면 신이 나서 겅중겅중 뛰어댕겼던 기억이 나. 왜냐구? 그냥 학교에 가는 게 좋아서지."

비록 '국민학교' 6년뿐이지만, 값지고 감사한 때였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학교에 나가 글도 배우고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렸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림에는 특히나 소질이 없었다. 여든 무렵에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잘 그린 걸 골라서 학급 게시판에 붙여주잖아. 나는 한 번도 붙어본 적이 없었어. 내 실력이 꽝이구나 했지. 그림에 소질이라곤 없었던 거야."

끈기와 살아온 시간이 지금의 솜씨를 만든 비결이라고 말하는 이학무씨다.

"클 때 누린 복은 개복이라고들 하지? 나 클 때 집안 대가족이 한 집에서 살았는데 정말 한 식구처럼 가깝게 아끼고 위하며 지냈다우. 그중에서도 집안에서 쫑말이인 내가 제일 이쁨 받았지. 울 아빠도 쫑말이 나도 쫑말이, 쫑말이의 쫑말이라고 이쁨을 많이 받았어."
 
꽃다웠던 내가 그린 젊음이라는 그림

 
청성면 산계2리 화백 이학무씨의 작품 ⓒ 월간 옥이네
 
청성면 산계2리 화백 이학무씨의 작품 ⓒ 월간 옥이네
 
꽃다운 청춘 스물하나, 이학무씨는 큰오빠의 소개로 청성면이 고향인 배우자를 만나 혼인을 한다. 남편은 건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으로 청성초등학교에 부임해 교사 생활을 갓 시작한 청년이었다. 남편을 따라 몇 차례 이주하면서 이학무씨는 병아리와 돼지를 키웠다.

"심심풀이도 하고, 소일이라도 하려고 병아리 100마리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금방 300마리로 불었어. 사람들이 병아리를 사러 오면 다들 우리 집을 한 번씩 거쳐 갔어. 어떻게 하면 잘 키우는지 물어보려고. 근데 사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그냥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거지."

지금처럼 사료가 좋지도, 흔치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병아리가 지내는 방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하고, 연구도 해가며 병아리를 돌봤다. 그러다 더 큰 가축도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돼지 5마리를 추가로 분양했다. 부지런히 풀을 뜯어 갈고, 자르고, 다시 버무리고 먹이고... 쉽지 않았지만 점점 적응해나갔다.

"그러다가 남편이 군서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병아리랑 돼지를 데려가기는 힘들겠더라고. 한 번에 사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다 팔고 이사를 했는데, 거기서 1년도 못 되어서 이원으로 가라는 거여."

남편이 새로 부임한 이원초등학교가 도지사 연구학교로 선정되면서 학교 안에 돈사와 계사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이원초 교장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돈사와 계사 관리를 부탁했다.

"그렇게 1년도 안 되어서 다시 돼지랑 닭을 먹이게 됐어. 내가 어째 그럴 운명인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죽향초에서도 또 한 번. 부지런히 먹이고 기르고. 늙어서는 손자들도 다 길렀지. 젊어서는 마실 한번 나갈 시간도 없었다니까. 정말 부지런히 살았지."
 
학무야, 그동안 참 잘 살았다
 
그림 그리는 중인 이학무씨 ⓒ 월간 옥이네
 
복지관에 가기 위해 청산에 가는 날은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고춧가루를 빻아달라고 부탁을 받았걸랑. 복지관 오기 전에 이 앞 방앗간에 맡겨놨지. 그럼 집에 갈 때 또 가져다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우면서 사는 거지."

이학무씨의 별명은 '해결사'.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며, 서로 조금씩 도우며 사는 것이 이웃 간의 온정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방앗간에 고춧가루를 맡기고도 1등으로 교실에 들어선다. 사물함에서 스케치북과 팔레트, 필통을 자리에 꺼내두고, 물통에 물을 받는다. 다른 학생들이 오기 전에 그림을 그릴 준비를 마친다.

"하도 남의 일을 도와주니까 품팔아 먹고 사는 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니까(웃음). 근데 나는 돈 전혀 안 받아. 할 수 있는 한 얼굴 아는 이들끼리 서로 돕고 살자는 게 나의 신조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도 바쁜 일상은 계속된다. 고구마 농사를 짓는 이웃의 고구마 선별을 돕기도 하고, 김장을 앞둔 이웃에게 텃밭의 채소를 나눠주기도 한다.

이학무씨의 텃밭은 넓지 않지만 많은 것이 골고루 자란다. 대파, 쪽파, 무, 도라지, 시금치, 청양고추, 꽈리고추, 가지, 토마토, 배추, 부추, 호박, 오이, 상추... 텃밭의 귀퉁이에는 이학무씨가 아끼는 갖가지 꽃도 가을바람에 산들산들 어여쁜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손바닥만 한 텃밭'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이제 크게 속 썩을 일도 없으니, 걱정 없이 그냥 마당에 풀이나 뽑고 텃밭 가꾸고, 그림 그리며 서로 나누는 재미로 살아갈 테지. 그래도 꾸물럭거릴 힘이 있으니 다행이야."

평생을 배우는 재미로 세상을 살아왔다는 그는, 지금도 여력이 되는 한 새롭게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나이드는 게 무섭지 배우고 익히는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내년이면 구십이 되니까 올해까지만 배우고 말까 그런 생각도 조금 해. 그래도 내년에 뭘 하고 있을진 아직 모르는 거지?"

먹이고 기르며 또 가꾸고 나누며 평생을 바쁘게 살아왔다는 그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가장 즐겁다는 것을 안다. 이런 그가 자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학무야, 그동안 참고 잘 살았다! 지금 인생을 즐겁게 사니 내가 정말 고맙다. 여봐요들, 나 지금 멋지게 사는겨?"
 
월간옥이네 통권 52호(2021년 10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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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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