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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예술관 인근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송강 정철의 시비가 있다.
 치악예술관 인근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송강 정철의 시비가 있다.
ⓒ 원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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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초임발령 시절, 회식 자리에서 국어가 전공이었던 교감 선생님이 술잔을 따라주며 시 한 구절을 읊어주셨다. 주는 대로 받아 마실 수밖에 없던 초임이라 술깨나 취한 상태였지만, 들려주던 시구절은 아직도 생생하다. 권주가라며 교감 선생님이 들려준 시는 정철의 <장진주사>였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 이어 묶여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랑비 회오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들 어찌하리."


지금 다시 읽어봐도 절창이다.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머물렀던 적이 있다. 강원도 관찰사로 머물면서 지었던 <관동별곡>은 정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양주와 여주를 거쳐 원주로 들어오는 과정을 '섬강이 어디메뇨, 치악이 여기로다'로 묘사하는 등 빼어난 작품이다. 

송강 정철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장진주사>와 <관동별곡> 등 남긴 작품으로 미루어 천재적 재능을 갖추고 멋과 풍류가 넘치는 삶을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두 누이가 왕실의 후궁으로 들어가 어려서부터 궁궐을 드나들었고, 강원도 관찰사를 비롯해 성균관, 사헌부, 이조, 좌의정, 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니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었지 싶다. 

하지만 송강 정철의 삶은 남긴 글처럼 주옥같지 못했다. 정치인으로서 정철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알려진 기축옥사에서 1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위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정철이었다.

위관은 수사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정철은 모반 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반대파였던 동인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연산군부터 명종 때까지 벌어졌던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에서 희생된 사람이 5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기축옥사에서 죽어간 1천여 명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강원도 관찰사로서 정철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정철이 관찰사로 재임하던 1578년(선조 13년)에 강원도는 수해와 냉해 등 자연재해가 심했다. 이런 시기에 정철은 <관동별곡>을 지었다. 작품 내용 중에 수해와 냉해에 신음하는 강원도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은 보이지 않고, 내금강과 관동팔경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절을 읊고 있다. 

정철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구절구절 이어지는 주옥같은 표현에 감탄하면서 정철이 살아온 삶 또한 글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 믿게 된다. 작가가 살아온 삶이 글로 승화된 것이란 생각에서다. 하지만 정철은 그렇지 못했다. 살아온 삶은 가사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 주옥같은 글과 전혀 달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원주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북원여고 역사교사 입니다.


태그:#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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