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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경주 첨성대의 야경.
 어둠이 내린 경주 첨성대의 야경.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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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에 가까운 부부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두 사람이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봤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이거나 1980년대 초쯤이었을 터.

경북 경주 첨성대 앞에 나란히 선 부부는 말 그대로 금방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젊었다. 신부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신랑은 결혼식을 준비하며 샀을 것이 분명한 깔끔한 새 양복 차림.

"우리 때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라 외국으로 놀러 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지.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는 신혼부부도 드물었어. 그저 기차 타고 온양 온천에 가거나, 버스 타고 경주에 가는 게 최고의 신혼여행이던 시절이야."

40년 전 옛날을 추억하는 남편과 아내의 웃음이 너무도 환해서 보기 좋았다. 그랬다. 부부가 들려준 추억담처럼 경주는 한때 각광받는 신혼여행지였다. 이와 관련해 <한국 일생 의례사전>은 20세기 우리나라의 신혼여행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신혼여행은 1950~1960년대까지도 여전히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경제적 여유를 가진 중산층 이상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신혼여행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면서 결혼식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신혼여행은 널리 보급되어 경주·온양·속리산·제주도 등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낮보다 아름다운 경주의 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신혼여행은 낮에 하는 관광도 좋지만, 밤의 낭만도 중요한 여행.

30~40년 전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난 선남선녀들은 어둑한 저녁이면 커다란 왕릉과 전설이 숨 쉬는 소나무 숲, 동궁과 월지 등을 산책했을 것이고 그들이 함께 보낸 로맨틱한 '신라의 달밤'은 허니문 베이비를 만들어내지도 않았을까.

프랑스 영화 제목처럼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속삭였을 그 시절 신혼부부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밤의 경주는 많은 부분 변해왔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은 깔끔한 정돈이 이뤄졌고,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화려하고 빛나는 조명이 서라벌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돋보이게 꾸며주고 있다.

아마도 1980년대 경주를 찾은 이들에겐 오늘날의 경주 야경이 더없이 낯설 수도 있을 듯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니까.
 
예스러운 멋이 있는 황리단길 한옥 카페.
 예스러운 멋이 있는 황리단길 한옥 카페.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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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경주의 밤'을 이제는 누가 즐기고 있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어두워진 길을 달려 21세기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을 향했다.

지척에 동궁과 월지, 첨성대, 계림, 대릉원 등이 몰려 있으니 서라벌의 밤 풍경을 두루 살필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경주시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슬로건으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횡포를 막기 위한 마스크 착용 등 개인위생 규칙 준수는 매너 있는 관광객의 기본.

경주의 주요 여행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문화관광 홈페이지는 '밤의 경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동궁과 월지, 월정교, 경주읍성 등 내로라하는 야경 명소들이 경주의 화려한 밤을 밝힌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루미나 나이트워크'도 볼거리다. 이곳은 스토리가 있는 숲속 산책길이다. 기마인물형 토기에서 착안한 '토우대장 차차'가 이승과 중간계, 지하세계를 넘나들며 천년왕국 신라로의 대장정을 안내한다."

야경을 즐기는 젊은 연인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

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황리단길로 나섰다. 꽤 많은 여행자가 삼삼오오 거리를 오가고 있다. 대부분이 20~30대로 보이는 연인들과 가족 단위 관광객들.

손을 꼭 잡거나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젊은이들은 저녁을 먹으며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를 찾아다녔다.

밤의 황리단길은 그런 연인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는 곳으로 이미 이름이 높다. 개조하거나 신축한 한옥풍의 건물엔 한식당과 일식당은 물론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여러 종류의 수제 맥주와 포도주를 판매하는 카페들은 실내 장식이 감각적이고 세련됐다. 서울이나 부산의 유명 카페 못지않다. 또한 여타 도시에 비해 음식과 음료의 가격도 합리적으로 보였다.

내가 들어간 곳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이탈리아 음식점이었는데, 피자와 파스타 맛이 썩 좋았다. 한국식 전통가옥에서 유럽 요리를 즐기는 것. 경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선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이다.

반세기 전 신혼여행객의 자리를 대신 채운 연인과 식구들이 식사 후 찾아갈 '서라벌의 야간 명소'는 어딜까? 열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을 앞세운 부부의 뒤를 따라 '경주의 밤'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유럽과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수십 개 나라를 여행한 친구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인적 드문 밤거리를 걸어도 위험하지 않은 세상에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야."

이 말이 터무니없는 과장만은 아니다. 사실 한국의 야간 치안은 어느 나라보다 좋은 편이다. 큰 도시와 소읍(小邑) 모두가 그렇다. 일단 곳곳에 가로등이 켜져 환하고, 범죄 예방 효과를 인정받은 CCTV도 요소요소에 설치돼 있다.

경주도 마찬가지다. 첨성대에서 시작해 계림, 월정교, 동궁과 월지를 거쳐 대릉원 인근까지 2시간 가까이 밤의 경주를 유유히 산책했다. 당연지사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야경을 즐기고 있어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헛갈릴 정도. '신라의 달밤'을 걷고 싶다는 로망은 몇몇 사람만의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경주 동궁과 월지의 밤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들.
 경주 동궁과 월지의 밤 풍경을 즐기는 여행자들.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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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조명과 함께 고풍스런 밤의 낭만을

낭만적인 경주의 밤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건 어둠이 숨긴 고대 유적을 환히 비추는 색색깔의 조명인 듯했다.

작은 산처럼 거대한 능(陵)을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보랏빛 조명, 김알지 탄생 설화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계림 산책로를 밝힌 푸른 조명, 순간순간 색을 바꾸며 첨성대를 비추는 조명….

동궁과 월지에 도착해 지친 발걸음을 잠시 쉴 때면 갖가지 빛깔 조명 사이로 신라의 역사 한 장면이 영상처럼 흘러간다.

사적 제18호인 동궁과 월지는 어떤 곳일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만든 책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질문에 답한다.
 
"동궁과 월지는 임해전(臨海殿·신라 안압지 서쪽의 궁궐 건물)이 속한 통일신라의 동궁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나 2011년에 동궁과 월지로 사적 명칭을 변경했다. 월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과 신하들이 모여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관광도시가 되려면 낮에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더불어 볼만한 밤의 구경거리도 두루 갖춰야 하는 시대가 왔다. 경주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황리단길-첨성대-계림-월정교-동궁과 월지-대릉원'으로 이어지는 서라벌의 밤거리는 현대적 감각과 역사 유적·유물을 함께 만날 수 있기에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관광 코스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은 매 순간 바뀌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행의 트렌드도 변한다. 1970~1980년대 신혼부부들에게 사랑받았던 '경주의 밤'은 이제 연인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에 게재된 것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경주의 밤, #첨성대, #황리단길, #대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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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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