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09 19:10최종 업데이트 21.11.0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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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현지시간)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열린 영국 글래스고의 스코티시 이벤트 캠퍼스(SEC) 밖 보안 철조망 주변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1.11.2 ⓒ 연합뉴스

 
역부족이었다. 글래스고 기후회의(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COP26) 이야기다.

11월 1일 개막식에서 나온 "우리가 우리의 무덤을 파고 있다"는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살벌한 경고, "전쟁과 비슷한 태세"가 필요하다는 찰스 황태자의 비장함, 95세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 경의 영혼을 담은 호소, 런던에서 글래스고까지 약 800 킬로미터를 두 달간 걸어 도착한 시민단체의 간절함, 회의장 밖 기후 운동가들의 압박도 통하지 않았다. 산림 파괴 중단과 메탄 배출량 30% 감축 선언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시 없을 기회였다. 2018년 이후 활발한 시민운동으로 어느 때보다 높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지구 온도 상승 1.5도 이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적어도 45% 탄소 감축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엔 IPCC 보고서도 발표되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경제 회복 문제가 기후 문제를 뒤로 밀어냈다. 위기가 개혁의 촉진제가 되기보다 현상유지 논리를 지탱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바라봐야 할 지점은 속도를 반대로 올리는 곳이 어디인지다. 영국이 한 예다. 2019년에 1990년 대비 40%를 이미 감축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감축해도 2050년 탄소 중립 목표는 무난히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지난 4월 2030년까지 적어도 68%, 2035년까지 78% 감축을 제시했다.

두려움, 미래 세대에 대한 도의적 책임 때문이 아니다. 희망과 새로운 기회, 그에 따르는 번영을 바라보는 움직임이다. 영국은 기후 대책으로 경제 구조를 전면 재편, 빨간불이 켜진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산업까지 선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경제-기후 동시 해결안이 테이블 중앙에 올려졌다. 조건도 좋았다. 지식인 그룹이 그린 뉴딜로 방향을 제시했고, 젊은 세대는 기후 운동과 정치 운동을 결합시켜 지역 사회를 파고들었다. 기후회의 의장국이라는 조건은 기후 변화에 반신반의했던 보리스 존슨 총리를  테이블 앞에 앉혔다. 남은 건 노동당의 '사회주의 그린 뉴딜'이냐 보수당의 '영국식 뉴딜'이냐, 방향성 선택이다.
    
보수당과 노동당의 '꿈'

'낭만적 상상'은 산업혁명 이후 19-20세기 영국 지성계의 원천이었다. 최초의 근대 도시 계획은 자기 공장 노동자들의 이상적 생활을 상상했던 성공한 기업가이자 이상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에서 나왔다.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는 삭막한 도시에서 푸른 숲을 꿈꾸며 최초의 전원도시를 만들었다. 공장제에 회의감을 느낀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전통 및 자연, 그리고 사회주의를 결합한 미적 세계를 추구했다. 그린 뉴딜도 런던의 한 술집에서 나눈 대화에서 나온 발상이다.  

다시 꿈이 등장했다. 시작은 노동당 에드 밀리밴드(Ed Miliband)다. 그는 2008년 에너지·기후변화부 장관 재임 당시, 탄소 감축을 법으로 의무화시키는 기후 변화법을 선구적으로 통과시켰다. 2010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나 2015년 총선 패배로 물러났다. 현재 노동당 내 비즈니스·에너지·산업 전략을 맡고 있는 그는 기후 관련 손꼽히는 전문가다.

2019년 7월, 밀리밴드의 <가디언> 기고문은 "악몽 말고 꿈을 이야기하자"고 시작한다. "깨끗하고 푸르며, 양질의 공기, 도보와 자전거로 쉽게 이동하고,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콘크리트 정글이 아니라 푸른 공간, 보람 있는 그린 산업의 일자리가 있는 곳"을 "미래의 도시와 마을"로 꿈꿨다. 노동당의 기후 대책은 "도덕적 책무"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번영된 민주주의" 사회 건설에 목표가 있다며, 그 맥락에서 "2050년 탄소 중립은 꿈의 실현이 아니라 꿈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 대표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노동당 정책 발표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2015.4.13 ⓒ 연합뉴스

 
2020년 11월, 보수당 존슨 총리도 이상적 미래를 상상했다.
 
그린 산업 혁명이 영국 전역의 삶을 어떻게 전환시킬지 상상해 봐라. 수소 에너지를 이용해서 아침 식사를 만든다. 미들랜드 지역(산업 지대)에서 생산된 배터리로 밤새 충전된 차로 집을 나선다. 주변 공기는 깨끗하고, 트럭, 기차, 배, 비행기가 수소 에너지로 움직인다. 영국의 모든 마을은 그린 기술과 그린 산업이 만든 일자리로 채워질 것이다.
- 그린 산업  혁명을 위한 10가지 계획(The Ten Point Plan for Green Industrial Revolution)
 
둘 다 평범하다. 그러나 화석 연료를 포기하고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양쪽 상상이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노동당과 보수당은 전환의 실현 방법 및 속도에서 대립한다. 윤리성 없는 시장을 불신하는 노동당은 공적 규제를 통해 "경제 정의와 기후 정의"가 작동하는 미래를 원한다. 반면, 공공 영역의 비효율을 비판, 시장을 선호하는 보수당은 정부가 자극제로만 기능하고 시장이 주도하기를 원한다.  

노동당의 '사회주의 그린 뉴딜'

"아주 오랫동안, 나를 포함해서 진보주의자들은 기후 위기와 경제 정의를 분리시켜 논했다."

2019년 7월, 에드 밀리밴드는 사고 전환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영국 노동당은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영국 진보 지식인 그룹이 제시한 그린 뉴딜을 놓쳤다. 하지만 2019년 2월 미국 민주당이 그린 뉴딜을 살리면서 분위기는 역전되었다. ([관련기사] "우리가 민주당을 차지하자" 젊은이들의 의미 있는 도발 http://omn.kr/1vptm)

이후 노동당은 그린 뉴딜을 세 번에 걸쳐 다듬었다. 첫 번째가 2019년 총선 공약 "그린 산업 혁명"이고, 두 번째는 2020년 에드 밀리밴드가 작성한 "그린 회복(Green Recovery)" 보고서다. "사회주의 그린 뉴딜"이 최근 것으로 2021년 9월 노동당 전당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노동당의 목표는 "기후 정의와 경제 정의" 동시 실현으로, '정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기후 정의는 저탄소 경제 전환으로, 풍력과 수소 등 대체 에너지, 국립공원 조성, 전기 자동차, 주택의 난방 시설 개선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 정의는 경제 전환 과정에서 국가의 조정 능력을 확대, 경제적 격차로 벌어지는 사회 문제에 대한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시장을 견제하고자 한다.

주목할 부분은 "공정한 전환(just transition)"이다. 에드 밀리밴드는 재교육 과정을 기획, 새롭게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저탄소 경제 전환 과정에서 밀려나는 탄소 산업 종사자들이 실업자로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한다. 또, 가스보일러 교체나 주택 단열재 보강은 저소득층에게 경제적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저소득층과 임대주택부터 보조할 것을 제시했다.

노동당안의 급진성은 소유권 전환에 있다. 영국의 1980년대는 민영화의 시대로, 대처 총리는 항공, 철강, 통신, 에너지 등 주요 국영 기업을 사적 영역으로 넘겼다. 노동당은 경제 전환 과정에서 교통과 에너지, 특히 에너지 산업은 "공공 소유권"의 이름으로 다시 국유화시키길 원한다. 모든 삶의 기본이 되는 자원만큼은 개인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다.   

소유권 전환은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고 있다. 2021년 7월 보수 싱크탱크(Institute for Economic Affairs) 보고서에 의하면, 영국 젊은 세대(Millennial and Z)는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80%가 주택 문제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하고, 75%는 기후 문제를 자본주의 문제로 인식한다. 그리고 72%는 에너지와 철도의 국유화를 지지한다.

노동당의 고민은 총선이다. 젊은 세대의 지지가 총선 승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는 6대 에너지 회사 국유화 여부에 신중함을 보이고 있다. 반면, 에드 밀리밴드는 재국유화로 가는 것이 맞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이 노동당 대표였던 40대 초반을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다"고 회고하며, 2020년대 노동당은 제국주의를 정리하고 복지 국가로 전환시켰던 1940년대 애틀리(Clement Attlee) 노동당 내각의 과감함을 지녀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보리스 존슨의 '영국식 뉴딜'

2020년 6월, 보리스 존슨은 자신을 "영국식 뉴딜(British New Deal)" 설계자로 칭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보리스 존슨에게 놀라운 이상형이 나타났다 : 루스벨트"란 타이틀로 충격을 표했다. 1936년 "조직화된 돈(월스트리트)은 나를 만장일치로 싫어한다. 나는 그들의 미움을 환영한다"고 했던 루스벨트는 현 영국 보수당의 기반, 신자유주의 대처주의와는 상극이다. 존슨의 루스벨트 수용이 진심이라면 전향에 가까운 발언인 셈이다.

존슨은 2020년 11월 "녹색 산업 혁명을 위한 10가지 계획"을 발표했다. 이 문건의 부제는 "더 나은 재건, 녹색 일자리 지지, 속도 내는 탄소 중립"이었다. 보수당 고유의 상상력이 아니다. "녹색 산업혁명"은 2019년 노동당의 총선 공약이고,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은 미국 민주당 바이든 정책이다. 재생 에너지 산업 투자와 관련 일자리 창출, 전기차, 국립공원 조성 등 노동당의 아이디어를 상당부분 수용했다.

노동당과의 차이는 정부의 개입 정도, 즉 공적 자금 투입 규모에서 나타난다. 존슨 안에 따르면 정부는 120억 파운드(약 19조)를 투자한다. 초기 촉진제 역할로 세 배 규모의 사적 영역 투자를 유도해 25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한다. 제한된 정부 역할로 인해 존슨 안은 노동 시장을 살필 여력이 없다. 불가피하게 내리막길로 들어설 산업의 노동자 재교육에 큰 비중을 둔 노동당 안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왼쪽)가 2일(현지시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삼림과 토지 이용에 관한 행동' 세션에 참석하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2021.11.2 ⓒ 연합뉴스


과연 이 정도의 정부 역할을 생각하며 보리스 존슨이 루스벨트를 언급했던 것일까. 초기 구상이 확실치 않지만, 존슨 안이 재무부 리시 수낙(Rishi Sunak)과의 마찰로 후퇴했음은 사실이다. 전형적 시장경제론자이고 기후 문제에 소극적인 수낙은 "재정 확장은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수정안의 결과는 2021년 10월 탄소 중립 전략(net-zero strategy)에 드러났다. 영국 가정의 85%가 사용하는 가스보일러는 탄소 배출의 15%를 차지, 난방 개혁 없이 탄소 중립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2028년까지 매년 60만 개 열펌프 교체 계획은 방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비용으로, 최소 1500만 원 선이다. 하지만 책정된 보조금은 15%인 9만 개를 보조할 수 있는 금액에 그쳤다. 양동이에 물 몇 방울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일었다. 

보수당 내각이 천천히 정책 기조를 옮기는 사이에 북대서양의 다른 한쪽, 미국이 크게 치고 나왔다. 1조 달러(1180조 원) 초대형 인프라 법안이 11월 5일 마침내 통과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인프라, 기후, 복지를 합한 3조 5천억 달러(약 4천조원)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민주당 내부 갈등으로 하원에서 지난 두 달간 공회전했다. 결국, 예산안을 축소하고 두 가지로 쪼개 따로 하원에 상정했다. 이번에 통과한 것은 첫번째인 인프라 1조 달러 예산안으로, 바이든은 "미국을 재건할 노동자 계급(블루칼라)의 청사진"이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다음에 처리할 것이 기후와 복지 부문의 1.8조 달러(2100조원) 예산안이다. 남은 예산안까지 통과되면, 바이든표 그린 뉴딜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루스벨트는 자본과 싸우며 자본주의를 지켰다. 그의 뉴딜은 자본과 시장 옹호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루스벨트를 업고 북대서양 양 쪽에서 시작된 그린 뉴딜. 모험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기후 변화 정책도 꿈을 꾸는 방향으로 움직이길 바란다. 거기에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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