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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1월 8일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1월 8일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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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그것도 누구보다 강렬하게 했던 사실은 확고하지 않느냐."
"체포·사망은 국가에서 했기에 국가에 자료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연좌제로 평생 억울하게 살았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른바 '백마탄 여장군'으로 불리는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선생의 후손들이 8일 오전 경남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가슴이 묻어 놓았던 말을 털어놓았다.

김명시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에 상하이에 파견돼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을 조직했다. 1930년에는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이후 신의주에서 체돼 7년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해 중국으로 탈출,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김명시 장군의 오빠 김형선(1904~1950)와 남동생 김형윤(1910~?)도 독립운동을 했지만, 아직 아무도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명시 선생은 1949년 10월 10일, 추전경찰서에 체포됐다가 사망했다. 당시 내무부장관(김효석)은 "그가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명시 선생의 경찰 체포와 사망 경위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타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8년부터 김명시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옆에 있는 생가에 표지판을 세우고 '김명시 장군 친족 찾기 운동'을 진행해왔다. 이후 김명시 선생의 외사촌과 친가 쪽 친인척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창원시는 2019년 10월 생가 터에 '표지판'을 세웠다.

김명시 장군의 독립운동 행적은 뚜렷하다. 이에 열린사회희희망연대는 2019년 국가보훈처에 김명시 선생에 대한 '서훈' 신청을 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공적 심사에서 탈락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김명시 장군의 흔적을 찾기 위해 국가기록원, 경기도남부경찰청(부천 관할)에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의미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 단체는 국가보훈처가 '북로당' 활동 관련으로 김명시 장군에 대해 서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관련 자료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김명시 선생의 '북로당' 관련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국토통일원에서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1988년)에 근거해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에 들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북로당은 1946년 8월 28~30일 사이 평양에서 창립대회를 열었고, 이때 선출된 중앙위원(67명)과 후보(20명), 중앙검사위원(7명) 명단에 '김명시'라는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으며, '정치위원'이라는 조직도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 단체는 "북 정부 수립에 공훈이 인정된 사람을 안장한 국립묘지인 '신미리애국열사릉'에, 김명시와 같은 시기 남쪽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인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김명시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국가보훈처에 재심신청했지만, 보훈처는 "사망 경위 등 광복후 행적 불분명"의 사유로 '보류' 결정했다. 이후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이 보훈처에 항의하기도 했다.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1월 8일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1월 8일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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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활동하는 '장씨'와 결혼했다"

이에 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이 창원을 방문해 김명시 장군의 후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김명시 장군의 '외사촌' 김재두(90)씨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명시 누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해방 전후 몇 차례 집에 오기도 했다"며 "하루는 중국에서 사진을 보내왔는데, '장씨' 성을 가진 분과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같이 활동하는 그 분과 결혼을 했다고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김명시 장군이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다. 김재두 선생은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했을 때 당시 정부는 '자살'이라 발표했지만 타살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외사촌' 김필두(84)씨는 "명시 누님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도 다 나와 있다. 사회주의 활동을 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런데 왜 서훈이 안된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해방 후 행적 관련 자료는 국가가 찾아야 한다. 정부 책임인데 왜 기록이 없다는 말이냐"며 "누님이 혼자 잘 살려고 독립운동을 했느냐. 오직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필두씨는 아버지가 보관해 오던 김명시 장군 형제들의 사진을 갖고 있다가 2019년에 열린사회희망연대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김영만 고문은 "보훈처도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안다. 현재까지 우리가 파악하기로, 김명시 선생은 북로당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며 "다른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서훈을 받은 사례들이 있다. 김명시 장군도 늦었지만 서훈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백남해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장은 "보훈처에서 김명시 장군에 대해 서훈을 하지 않는 이유가 1947~1949년 사이 행적을 알 수 없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며 "그 기간 동안 정부 차원에서 자료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 작가는 "김명시 선생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어, 친가보다 외가 쪽에 관련 기억이 있을 수 있다"며 "우리 가까이에 친인척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겠느냐"라고 했다.

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은 "해방공간의 자료가 문서로 나오기에는 한계가 있다.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왔다"며 "삼일절, 광복절, 순국선열기념일에 맞춰 공적 심사를 하는데, 내년 광복절 전에 김명시 장군에 대한 공적 재심사를 하겠다"고 답했다.
 
'백마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1월 8일 창원마산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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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명시 장군, #독립운동가, #백마탄 여장군, #국가보훈처, #열린사회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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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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