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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동해에는 새우와 그것을 담근 젓이 없고, 소금에 담가 우리나라 전역에 흘러넘치게 하는 것은 서해의 젓새우이며 속어로 세하(細鰕)라 하고 소금을 덜치고 말린 것을 미하(米鰕)라 하고 색깔이 흰 것을 백하라 한다." - 난호어목지(서유구, 1820)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해조류에 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우리 민족과 긴밀하게 연관된 미역에 대한 기록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처음 실린 미역에 대한 기록은 1406년 4월 20일이다. "각도의 해도만호가 병사를 시켜 둔전(屯田)하고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으니 경비를 능히 하지 못한다"고 하는 전라도 관찰사의 보고이다. 

또한 이어 왜인 동시라가 미역을 따서 생활을 영위하고자 전라도 흑산도에 갔다가 장(杖)을 받게 되고 이에 태종은 '스스로 바다로 내려가 이익을 취하는 자를 금지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아무나 들어가서 마음대로 채취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지정된 곳, 정해진 구역이 할당되어 그 안에서만 생활할 수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돈이 되는 물산이었다.

왜 이렇게 미역이 중요하게 취급되었을까? 하나는 중요한 먹거리로서 취급되었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구황작물(救荒作物)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또한 진헌진상품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탄생의 대명사, 우리의 고유한 먹거리로 정착되었다. 조선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말한다.

사람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갓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잡아먹혀 고래의 뱃속을 보니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으며 장부의 악혈이 모두 물로 변해 있었다. 이로써 미역이 산후 산모를 보호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세인에게 알려져 널리 미역을 이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해조류인 미역이 생명탄생 시에 필요한 중요한 식재료로 이용되게 된 계기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조류를 섭취하는 선구적인 역할은 미역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고,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미역과 다시마가 그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구황작물론이다. 해조류가 우리나라의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 중요한 구황작물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태종실록 1407년 7월 30일 기록 "바다에 내려가 구황할 물건을 채취하다가 바람을 만나 상패(傷敗)하였다"는 보고나, 세종실록 1423년 8월 29일에 "흉년을 구제하는 물건은 황각(黃角)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진제창을 설치하고 쌀죽과 황각채와 미역 등물을 주되 또 승도 중에 자비심이 있는 자를 택해서 그 삶고 익히는 것을 위임하여 조석으로 진휼 공급한다"(세종실록 1437년 1월 13일)고 한 기록을 보면, 톳과 미역 외에도 많은 해조류가 구황작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진헌진상품으로 올려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왕실이 올려진 것은 진상이라 하고 중국 황제에게 보내진 것은 진헌이라 했다. 완도는 예부터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편에 언급된 해조류는 "분곽 상곽, 올멱, 해모, 우무, 해각, 황각, 매산이, 김, 감태" 등을 진상품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중국 명나라에 진헌하는 해산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해조류가 다양하게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조해채, 해채, 사해채, 해채이, 곤포, 해의, 감태, 해화, 황각이 그것이다.

"진어 1830마리, 민어 550마리, 상어 90마리, 망어 380마리, 홍어 200마리, 농어 100마리, 연어 500마리, 대구 1,000마리, 잉어 200마리, 숭어 440마리, 문어 200마리, 조기 1,000마리, 청어 500근, 송어 500근, 도미 500근, 복어 700근, 고등어 200근, 오징어 200근, 대하 200근, 황어젓 6통, 잉어젓 1통, 토화젓 9병, 굴젓 3병, 생합젓 4병, 송어젓 3병, 백하젓 7병, 자하젓 4병, 조기새끼젓 4병, 홍합젓 2병, 조해채(早海菜) 500근, 해채(海菜) 1,000근, 사해채(絲海菜) 300근, 해채이(海菜耳) 300근, 곤포(昆布) 400근, 해의(海衣) 100근, 감태(甘苔) 200근, 해화(海花) 200근, 황각(黃角) 300근, 잣 1,000근, 황주 5병, 소주 5병입니다."

특히나 전라도에서는 다양한 미역을 진상하고 있다. 또한 전라도에서 중궁전의 유모상궁(阿只尙宮)에게 보낸 해조류는 상곽, 분곽, 조곽, 황곽, 김, 다시마로 역시나 미역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여기서 분곽이란 가루로 만든 미역을 말하고 조곽은 아직 어리고 푸릇푸릇한 미역을, 사곽은 미역잎만 말린 것을 말하고 감곽은 가정신앙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거나 삼신고사를 지낼 때 주로 제물로 사용되는 미역을 말하며, 청곽은 넓미역을 말하며 전라도 사람들이 멀리 독도까지 가서 얻고자 했던 귀한 미역이었다.

완도에서는 임산부가 아이를 해산했을 때 기본적인 공물로 미역국과 백반을 차리고 있다. 한반도 전체적인 양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산기(産氣)가 보이면 산실 윗목에 짚을 깔고 위에 미역 한 줄기를 걸쳐놓은 쌀은 가득 담은 지앙동이와 정화수 한 그릇을 차린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앙동이의 쌀과 미역으로 백반과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인다. 이렇게 7일째, 21일째, 28일째, 35일째, 42일째, 49일째 되는 날에도 먹인다. 미역국이 탄생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역과 다시마가 많이 생산되는 생일도는 아예 생명 탄생을 축하하는 섬이 되었다.

이렇게 미역은 삼국시대부터 민족의 생명력을 부양한 영험한 제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고 지금도 그 기능은 살아서 미역국을 먹는 풍속은 더욱 번성하고 있다. 특히 해조류가 웰빙과 건강에 좋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우리에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식품이 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고 있는 웰빙식품이 되었다.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다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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