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가칭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건립 부지.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가칭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건립 부지.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광화문과 건춘문 궁장(宮牆) 모서리 밖에 선 망루, 동십자각이 외로워 보인다. 동십자각 동쪽으로 낮은 언덕이 보인다. 언덕 너머가 안국방이고 그곳으로 향하는 폭넓고 번잡한 길이 일제가 뚫은 율곡로다.

언덕 북측을 키 높은 돌담이 막고서 모두를 거부할 것처럼 서 있다. 무척 생경하다. 무엇을 가리고 싶어서였을까? 지나는 이들이 보아선 안 되는, 혹은 숨기고 싶은 무엇이라도 담장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일까?

이 땅은 긴 시간 금단의 땅이었다.

울창한 숲, 솔재
 
18세기 후반 도성대지도 중 경복궁 부근. 사진 중앙에 송현과 벽장동이라 쓴 글씨가 보이며, 좌측으로 십자루와 사간원 등도 보인다.
▲ 옛 경복궁 주변 18세기 후반 도성대지도 중 경복궁 부근. 사진 중앙에 송현과 벽장동이라 쓴 글씨가 보이며, 좌측으로 십자루와 사간원 등도 보인다.
ⓒ 서울역사아카이브(부분편집)

관련사진보기

 
모든 땅은 역사를 품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땅은 특히 더 그렇다. 도로가 뚫리기 전엔 제법 높다란 언덕에 소나무가 우거져 '솔재(松峴)' 혹은 '벽장(壁莊)'이라 부르던 고개이니 숲이 무성했음이 분명하다.

한양은 동쪽 지세가 상대적으로 허하다. 법궁인 경복궁도 마찬가지다. 궁궐 설계자가 동쪽 허한 땅 기운을 북돋우려 이 언덕에 비보(裨補) 숲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 숲은 오랜 기간 울창한 풍모를 지켜냈고, 따라서 이름도 자연스레 솔재가 되었다.

땅은 임진왜란을 겪게 되는 선조와 광해군 때에 이르러 부마나 외척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후 세도정치 때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 소유였다가, 안동김씨 김병주에게서 다시 김석진으로 소유권이 바뀐다. 김석진은 1910년 강제 병합이 이뤄지자 자결한 인물이다.

율곡로가 바꾼 땅의 운명
  
일제가 1912년 세운 계획도. 붉은 원 쪽으로 시가지가 확장되고, 그 서쪽으로 방사형 가로망계획이 보인다. 동-서축으로 아래서부터 지금의 퇴계로, 을지로, 종로, 율곡로가 계획되었다.
▲ 경성시구개선계획도 일제가 1912년 세운 계획도. 붉은 원 쪽으로 시가지가 확장되고, 그 서쪽으로 방사형 가로망계획이 보인다. 동-서축으로 아래서부터 지금의 퇴계로, 을지로, 종로, 율곡로가 계획되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1912년 '경성시구개수(市區改修) 계획'을 수립한다. 핵심은 명동과 충무로 일대 개발을 통해 그곳에 모여 사는 일본인 자산가치를 높이고, 한양상권을 일본인이 장악케 하려는 의도다. 1912년 계획이 1919년 수정되어, 지금 서울 도심 가로망 골격을 이뤘다.
 
경성시가도 중 경복궁 주변. 지금의 안국사거리까지만 넓은 도로(율곡로)가 개설되었다. 안동별궁을 창덕궁별궁으로 표시하였고, 그 왼쪽 솔재 땅엔 식은사택(殖銀舍宅)이라 써 있다.
▲ 경복궁 주변(1927년) 경성시가도 중 경복궁 주변. 지금의 안국사거리까지만 넓은 도로(율곡로)가 개설되었다. 안동별궁을 창덕궁별궁으로 표시하였고, 그 왼쪽 솔재 땅엔 식은사택(殖銀舍宅)이라 써 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부분편집)

관련사진보기

 
운종가 남쪽에 동-서축 가로망(을지로와 퇴계로)을 신설·확장하고 여기에 남-북축 도로를 이어 방사형 가로망을 형성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북쪽에도 동-서축 가로망을 뚫어 북촌 조선 귀족을 달래는 한편 경복궁과 창덕·창경궁을 지탱하는 북악산 지맥(地脈)을 끊어내는 2중 효과를 노린다. 지금의 율곡로다.
 
경성시가도 중 경복궁 주변. 1932년 개설된 율곡로가 광화문에서 이화동 중앙시험소까지 개설되어 있다.
▲ 경복궁 주변(1933) 경성시가도 중 경복궁 주변. 1932년 개설된 율곡로가 광화문에서 이화동 중앙시험소까지 개설되어 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부분편집)

관련사진보기


율곡로는 계획에 따라 1913∼14년 광화문∼안국동까지 폭 21.8m, 길이 500m 도로가 먼저 개설된다. 1932년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지맥을 끊어내면서, 안국동∼이화동까지 길이 2075m 도로를 이어 나간다. 이중 종묘와 창경궁 지맥을 잇는 복원공사가 최근 완료되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솔재는 언덕이 낮아졌고, 가로변에 접한 땅은 쓸모와 가치가 몰라보게 달라진다.

사간동과 솔재 땅 대부분은 이완용보다 더 지독한 친일파였다는 윤덕영·택영 형제가 1918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동생이 순종 장인이다. 형은 서촌에 저택을 지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동생은 말년까지 빚을 얻어 비루한 삶을 영위한 '채무(債務)왕'이란 오명을 얻은 기회주의자다.

식민지 수탈기관의 직원 숙소

강제 병합 후 일제는 헌병경찰제라는 총칼을 앞세워 조선 경제를 순차적으로 장악해 나간다. 수탈적 농업정책과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농지약탈, 더불어 1911년부터 10여 년간 시행한 '허가제의 회사령'이다.

이를 통해 회사설립을 총량 관리하면서 민족자본의 생장과 발전 저지는 물론, 미개발의 값싼 원료시장으로 조선을 방치하려는 속셈을 드러낸다. 또한 일본산업구조에 종속·보완되는 관계를 설정, 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업종과 생산량 조절을 통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기업을 노골적으로 지원하려는 제도다.

이 모든 첨병 역할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맡았다. 동척은 금융 부문 강화 목적으로, 1918년 10월 한성농공은행 등 6개 농공은행을 합병 조선식산은행을 설립한다.
 
조선 수탈은 물론 대략침략에 필요한 전쟁비용을 충당한 조선식산은행 본점. 남대문로 2가에 있었다.
▲ 조선식산은행 본점 조선 수탈은 물론 대략침략에 필요한 전쟁비용을 충당한 조선식산은행 본점. 남대문로 2가에 있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관련사진보기

 
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 산업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핵심 기관으로, 동척의 비호 아래 성장한다. 1920년 이후 대륙침략 시기, 조선을 식량 공급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산미증식계획에 금융을 지원한다. 중·일전쟁 시기엔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으로 조선의 자본을 몽땅 빨아들여 군수산업에 밀어 넣는다.

식산은행은 한마디로 전비(戰費)를 공급하는 돈줄이었다. 이런 악랄한 기관 직원 숙소로 솔재 땅이 소용되었다. 1918년 은행설립과 함께 이완용보다 더 지독한 친일파 형제가, 혹시 이 땅을 자진 헌납하진 않았을까?

높은 돌담을 두른 주한 미 대사관 직원 숙소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온다. 한반도엔 동-서로 38선이 그어지고, 남한엔 미군정청이 들어선다. 1948년 민족은 분단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그해 9월 미군정청 재산과 부채를 한국 정부에 이양하고, 한국 정부는 미군정청 등이 제정 시행한 모든 법률과 규칙을 승계한다는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이 한·미 간에 체결된다.

이 협정 보조조항에 따라 미국이 원하는 재산과 부지 소유권을 미국 정부에 양도해야만 했다. 이때 면적 37,141㎡ 솔재 땅이 포함된다. 소유권을 넘겨받은 미국 정부는 이 땅에 높은 돌담을 두른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를 지어 사용한다.

서울 율곡로 북쪽 지역은 건축물 고도제한 등 도시계획 용도지역·지구 제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의도를 떠나 지금의 정겨운 경관을 보존해준 시금석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1990년대 들어 '미 대사관과 문화원, 송현동 직원 숙소 이전' 협상이 급진전을 이룬다. 여러 대안이 모색되고 부수적인 협상과 도시계획 및 관련 법 규제 완화가 논의되나, 큰 진전을 이뤄내진 못한다. 와중에 한계를 느낀 미국 정부는 1997년 대사관 직원 숙소 이전을 결정하고 솔재 땅 매각을 추진한다. 매입자로 삼성생명이 결정된다.

건축물 고도제한의 강력한 힘
 
안국사거리 방향 모습. 돌담 중간에 옛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하던 문이 보임.
▲ 송현동 부지 안국사거리 방향 모습. 돌담 중간에 옛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하던 문이 보임.
ⓒ 이영천

관련사진보기

 
삼성은 호암미술관 이전에 맞춰, 이 땅에 미술관 및 대규모 복합시설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뒤이어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계약이행이 주춤하다 2000년 1400억 원에 매매계약이 성사된다. 하지만 삼성의 계획은 도시계획 및 관련 법 규제의 벽에 부딪힌다.

삼성은 2008년 대한항공에 솔재 땅을 매각한다. 가격은 2900억 원이다. 한진은 이 땅에 지상 4층·지하 4층의 특급호텔을 지으려 한다. 땅콩회항으로 유명해진 사람 작품이다. 하지만 이는 '학교보건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다.

2011년 이명박 정부 문체부는 노골적이었다. 학교보건법을 피해갈 '관광진흥법' 일부개정을 추진한다. 하지만 야당 반대로 무산된다. 2013년 박근혜 정부도 똑같은 일을 벌인다. 청와대 10대 그룹 총수 오찬 간담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특급관광호텔의 건립규제 완화가 절실하다"고 요청을 하고, 박근혜가 긍정적으로 화답한다. 당시 문체부는 또다시 관광진흥법 일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지만 무산된다.

한진은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서울 중부교육청과 법정 다툼까지 벌였다. 하지만 헌법소원은 스스로 취하했고, 서울 중부교육청을 상대로한 행정소송은 결국 패소하고 만다.

2019년 대한항공은 솔재 땅 매각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서울시와 긴 협상을 벌여 올해 8월 26일 마침내 합의에 이른다. LH가 솔재 땅을 우선 매입하여 서울시 보유토지와 등가로 교환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문화재 기증과 송현동의 낙점... 다시 향기가 퍼지는 땅 될까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소유하던 2만3000여 점 문화재와 미술품이 국가에 기증되었다. 전후 사정과 원인을 떠나, 국민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동시에 이 방대한 문화재를 잘 보관하고 후대에 고이 이어줄 책임과 의무도 같이 떠안게 되었다. 이를 위한 집(기증관)이 필요하다.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가칭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협약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문체부가 후보지 선정을 농밀하게 진행한 듯 보인다. 그리고 지난 11월 9일 솔재 땅을 최종후보지로 선정한다. 기증관 부지 면적은 9787㎡로 예정되어 있다. 당해 부지 상당의 국유지를 서울시와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기증관은 국제현상설계공모 등 절차를 거쳐 2027년 완공 예정이다.

솔재 땅은 경복궁과 광화문, 북촌과 인사동은 물론 박물관·미술관 등 가히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인프라가 인접한 곳 중심이다. 또한 주변은 안동별궁, 사간원, 감고당 등 오랜 역사 흔적이 짙은 향기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도시계획 및 건축 규제가 상당하다는 제약도 동시에 안고 있다.

이 모든 게 조화를 이뤄 자연과 생태,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지는 '천년 가는 아름다운 집'이 지어졌으면 좋겠다. 잘려 나가 빛을 잃은 솔재 푸르름이, 생태와 문화의 향기로 다시 피어나 온천지에 퍼져나가길 빌어본다.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가칭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건립 부지.
▲ "이건희 기증관" 건립 부지 10일 종로구 서울공예박물관 옥상에서 바라본 가칭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건립 부지.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태그:#솔재_송현동, #율곡로, #조선식산은행_직원_숙소, #미_대사관직원_숙소, #이건희_기증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