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7 07:22최종 업데이트 21.11.17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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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오월어머니회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청년·대학생들의 방문 반대에 가로막혀 서 있다. ⓒ 유성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광주까지 가서 사과문을 낭독하면서도 전두환 옹호 발언을 끝내 취소하지 않았다. 이 같은 태도는 윤석열 후보의 성격이나 선거 전략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가 속한 보수정당의 근본적 한계와도 무관치 않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몰락한 뒤 1981년 1월 15일 출범한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뿌리를 둔 국민의힘은 지난 40년간 민정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같은 당명들을 사용했다. 명칭이 이렇게 바뀌는 동안 이 당은 5·18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취할 기회가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기가 바로 그때였다.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 창당에 가담함으로써 1987년 6월항쟁 및 1988년 13대 총선이 만든 정치지형을 왜곡시킨 인물인 동시에, 5·18 광주 학살을 촉발시킨 1980년 5·17 쿠데타의 피해자였다.

그래서 민자당 내 민주계 리더인 김영삼은 민정계(신군부 세력)나 공화계(구군부 세력)와 달리 5·18 학살에 대해 어느 정도 단호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개칭되고 13일 뒤인 1995년 12월 19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이 통과되고, 그로부터 얼마 전인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고 12월 3일 전두환이 고향에서 잠옷 바람으로 체포된 것은 민주계와 김영삼이 5·18 학살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회창의 기회와 석연찮은 핑계

바로 이 시기에 보수정당 대선후보가 된 인물이 이회창이다. 12·12 및 5·18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형과 노태우 징역 17년형이 확정되고 3개월 뒤인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가 바로 그다.

이회창은 김영삼 정권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단죄가 이뤄지는 속에서 대선주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5·18 학살에 대해서도 대쪽 같은 입장을 취할 기회가 있었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대쪽 같이 나무라듯 5월 학살극을 자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취할 기회가 있었다. 6월 항쟁 이후에 부각된 판사 출신 정치인이라 전·노와 직접적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회창은 기회를 놓쳤다. 그것도 상당부분은 자의에 의해서였다.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이 된 첫 해인 1997년의 5월 16일에 '5·18묘역 성역화사업 준공식'이 열리고 이 자리에 이홍구 신한국당 고문 등이 참석하는데도, 이회창은 사전에 예정된 광주 방문을 연기했다.

5·18을 맞아 이홍구 고문뿐 아니라 박찬종·이수성 고문과 신한국당 주자인 이인제 경기지사도 광주를 방문했지만, 이회창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문을 연기했다. 신한국당 사람들로 인해 광주가 들썩였던 이 시기에, 정작 당의 간판인 이회창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그해 5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망월동에 주자들 붐벼'라는 기사는 "대선 주자들이 한꺼번에 광주를 찾는 모습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는 말로 이회창의 해명을 보도했다. 번잡해질까봐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회창 캠프는 '일정상의 이유'도 거론했다. 하지만, 17일자 <경향신문> '대쪽 5·18 기념식 불참'은 실제로는 스케줄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당 사무처 관계자들은 '지난 12일 당사에서 벌어진 소동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점쳤다. 소동이란 당·정이 5·18 사상자를 국가유공 대상자로 처리키로 했다는 일부 보도와 관련, 상이군경회 간부들이 당사로 몰려와 거세게 항의한 것을 가리킨다. 결국 이 대표의 5·18 기념식 불참은 다분히 보수층을 의식한 (것이라는) 느낌을 자아낸다.
 

1997년 5월 17일자 <경향신문> 보도 ⓒ 경향


5·18에 즈음한 광주 방문을 기피한 이회창은 7월 21일에 대선 후보가 된 뒤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5·18 청산 열기가 뜨거웠던 이 해에, 소속 정당인 신한국당이 그 열기를 이어가는데도 당의 대선후보인 그는 딴 세상 사람인 듯 행동했다.

참회 대신... '자작극' 의심받은 광주행

10월 31일 광주 유세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5·18에 대한 그의 몰이해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11월 1일자 <조선일보> 7면 기사는 그가 "광주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주장하고 DJP 연대를 직공했다"고 보도했다. 자기 당의 뿌리인 신군부세력이 광주에서 자행한 죄악을 참회하기는커녕 도리어 광주시민들을 상대로 지역주의 타파를 운운했던 것이다.

이날 그의 입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호남인들의 지지를 탓하는 발언도 나왔다. "어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니 이곳에서 2등인 저는 3.3%, 김대중 총재는 86.7%였다"며 "이런 식의 편견은 민주주의를 멍들게 하는 것"이라며 자신에 대한 낮은 지지율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했다.

대선이 임박해지자 이회창 캠프에서는 수상한 조짐도 나타났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광주 유세 때 봉변당한 일이 계기가 돼 지역감정에 더욱 더 불이 붙고 이것이 노태우 당선에 일조했던 일을 재현시키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만한 조짐이었다.

대선 투표 8일 전 발행된 1997년 12월 10일자 <경향신문> 4면에 따르면, 11월 21일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개칭된 이 당의 맹형규 대변인은 '광주 지역에서 이회창 후보의 선전벽보가 대거 훼손되고 있다'는 12월 9일자 논평을 통해 벽보 훼손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윤호중 국민회의 대변인은 "87년 대선에서 사용된 지역감정 유발을 위한 정치심리 전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나라당의 고도의 심리적 교란 공작"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광주 자작극을 벌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던 중에, 이회창이 투표 2일 전에 광주를 전격 방문하는 일이 일어났다. 12월 16일 발행된 <매일경제> '이회창 후보 광주행 신경전'은 이를 두고 "당초 예정에 없던 광주 방문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국민회의는 "지역감정을 부추겨 달걀 돌팔매, 밀가루 세례를 받으려는 자작극을 기획하고 있다"며 경계했다

1987년 광주 유세 때 노태우에게 당했던 광주시민들이 경계심을 품어서인지, 16일 아침 광주로 날아간 이회창 앞에 모인 시민들은 소수였다. 이회창은 1시간 남짓 광주에 머물렀고, 연설을 들은 청중은 1997년 12월 17일자 <한겨레> 5면에 따르면 200여 명이었다.

위의 '대쪽 5·18 기념식 불참' 기사는 신한국당이 5·18 청산을 추진했으므로 이회창이 5·18 기념식 참석을 꺼릴 필요는 없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여당 대표로서는 '떳떳이' 고개를 들고 참석할 수 있는 기념식"이라며 '떳떳이'에 따옴표까지 쳤다.
 

회고록 출간한 이회창 전 총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회고록 출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남소연

 
이회창과 윤석열

이회창은 그해 대선은 물론이고 2002년 대선에도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나라당 간판으로 활동한 이회창이 5·18 청산 열기가 뜨거웠던 1997년에 적극적 참회의 의지를 표시했다면,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한나라당의 후계 정당들이 5·18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입장이 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회창은 기회를 놓쳤다. 대쪽 이미지를 통해 민정당 계승 정당의 색깔을 상당부분 바꿔놓는 데는 기여했지만, 자기 당의 5·18 청산 작업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신한국당 정권이 청산 작업을 전개할 때, 그의 시선은 보수층에 가 있었다.

<이회창 회고록> 제2권은 "나는 당내 주요 간부들과의 협의를 거쳐 1997년 8월 31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추석 전 사면을 김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발표했다"며 "전·노 전 대통령은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국가수반을 지낸 분들인 만큼 사면은 시대적 화합의 정치라는 의미에서 논의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당내에서도 찬성론이 많았다"고 말한다. "전두환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호남에도 많다"는 윤석열처럼, 이회창 역시 "당내에서도 찬성론이 많았다"며 자신의 건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사면 건의에 대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사과와 반성을 전제한 사면론으로 응수하고 나오자, "나는 8월 29일 TV 토론회에서 사회대통합을 위해 국민 간 갈등, 불화를 씻어내는 차원에서 사면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일단 운을 띄웠다"고 이회창은 회고했다. 그는 사과·반성이 필수적이지 않다고 봤던 것이다.

그는 '어찌되었든 국가수반을 지낸 분들'이라고 말했다. 광주 학살을 '어찌되었든'이란 한마디로 묶을 수 있는 인물을 1997년, 2002년 두 번씩이나 대통령 후보로 뽑았다는 것은 보수정당의 패착이었다.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광주까지 가서 끝끝내 전두환 발언을 취소하지 않는 것은 비단 윤석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회창에 의해 계승된 이 정당의 근본적 문제를 반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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