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30 07:09최종 업데이트 21.09.30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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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 주의! 이 글에는 <오징어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 며칠간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 대한 왈가왈부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추석에 집에 내려갔더니 가족들까지 <오징어 게임> 이야기를 했다. 주변에서 호평을 듣긴 어려웠다. '인간 본성' 운운하며 자극적인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게 얼마나 해로운지, 작품 속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거래하는 방식이 얼마나 진부한지, <도박묵시록 카이지>·<배틀로얄>을 필연적으로 연상시킬 만큼 얼마나 클리셰 밭이고 서사적으로 만듦새가 거친지 많은 사람이 얘기했다.


대체로 맞는 말이었다. <오징어 게임> 속 장면들은 언젠가는 한 번쯤 본 듯했고, 착하고 선량해서 의외의 빈틈을 찾아내는 주인공과 그의 크루들, 탐욕과 배신이 엎치락뒤치락 뒤섞이는 관계망, 위선자인 엘리트, 양아치, 성을 자원 삼는 여자, 흑막, 온갖 종류의 사망 플래그는 이후 내용이 뭔지 처음부터 다 예상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오징어 게임>이 좋았다. 바로 그 '뻔한' 점 때문이었다. 이 서사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뻔한지 지금부터 천천히 톺아보고자 한다.

1. 뒤틀린 공정함

<오징어 게임>에서 주최 측은 '공정한 경쟁'을 강조한다. 모두가 자신의 목숨 단 하나를 내놓고, 맨몸으로 부딪혀야만 한다는 것이다. 미리 게임을 알려준 진행자들과 그 진행자들에게 붙어서 소위 '뽀찌'를 받아먹은 참가자를 단호하게 처벌하고, 그 시체들을 효시하여 공정에 관한 의지를 천명한다.

이 강력한 처벌은 어떻게 보면 의아하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은 애초에 공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더 빨리 달리는 자, 더 머리가 좋은 자, 더 운이 좋은 자, 하다못해 경험을 통해서 규칙을 통과할 수 있는 자까지 다양한 불공정성이 게임 안에 내재해 있지만, 주최 측은 오직 '게임 스포일링'만을 강력하게 견제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류의 데스게임 장르에서 공정이란 '불확실성'을 통해 담보되기 때문이다. <배틀로얄>에서는 어떤 무기를 배급받을지 알 수 없고, <도박묵시록 카이지>도 손에 들어온 패가 무엇일지는 짐작할 수 없다. <신이 말하는 대로>도 <오징어 게임>처럼 어떤 게임을 시작할지, 심지어 언제 게임을 시작할지조차 알 수 없다.

이 룰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룰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들뿐이다. 룰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은 룰 안에 포섭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이 역시 별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데스게임 장르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 룰을 만드는 이들은 굳이 설명될 필요조차 없다. 이 설정 자체가 돈과 힘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에 대한 막연하고 불투명한 분노와 의심에 기대있다. 이들은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룰에 휘둘리는 이들을 보며 안락한 자리에서 즐거워한다.

제일 처음 <오징어 게임>에 들어오게 되는 방식조차도 '악마와의 거래'로 흔히 알려진 클리셰다. 악마는 세상의 온갖 풍파에 휩쓸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거나 적어진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얼핏 공정한 것 같은 내용을 제시하지만, 그 내용이 구현되는 방식은 압도적으로 인간에게 불리하다. 사랑하는 이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계약을 했더니만 대가가 그 사람의 죽음이라든지, 타인을 저주했더니만 자신에게 두 배의 저주가 돌아온다든지.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인간의 선택 때문에 발생한 일이 된다. 이 모든 면면은 '공정'의 이름으로 첨예하게 구축된 '불공정'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2. 오직 싸움만이 몫 없는 이들의 몫

언급했듯 판은 '불확실성'만을 담보로 공정한 척 불공정하다. 이런 불공정한 판이 공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몫 없는 이'들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수십억의 빚을 지고, 인생 끝까지 떠밀려서 어떻게도 할 방도가 없는 이들이고,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도 도박에 중독되어 인생 거하게 말아먹는 바람에 불공정한 판에 자기 인생을 걸 수밖에 없는 이들이 등장한다. <배틀로얄>에서는 사회적 결정권이 없는 고등학생들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느닷없이 싸움을 시작해야만 한다.

이 싸움은 상대방을 다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설령 상대방의 죽음을 가져온다고 해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 안에서 '약한 자를 솎아낸다'고 표현된 무작위 살육은 이 클리셰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타인을 더 많이 죽이면 내가 살 확률이 직접적으로 높아지는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타인을 해친다. 타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내 생명을 위협한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힘, 성, 말빨, 지능, 경험 등 다양한 자원을 활용하지만, 그 자원을 가지고 타인을 살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애초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은 생에 주어진 정언명령이다. 태어난 이상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모두 독에 가까운 쓴맛을 보면 얼굴을 찌푸리고, 몸에 해로운 악취를 맡으면 그 악취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이 발동한다. 삶의 벼랑 끝에 몰렸다고 그 정언명령이 사라질 리 없다. 인간은 함께 살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켰고, 협동하는 것이 인간의 수명을 상당히 오래도록 늘려놓았다. 그러나 그 문명이 역으로 구축된 기이한 계(界) 안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이 역시 이런 종류의 장르가 가지는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3. 단결의 불가능성

앞에서 서술한 것과 완전히 같은 이유로 단결은 가능하지 않다. 물론 데스게임 세계관 안에서도 인물들은 때때로 단결한다. 인류는 거친 자연과 맞서 싸우기 위해 단결해 왔고, 계급과 계층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단결해 왔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왔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그 도움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 서로에게 도움을 선물처럼 주고받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 지극히 합당하고 당연한 원리다. 그러나 이 단결은 지극히 일시적이다. 결과적으로 타인의 말살 위에 나의 생존이 구축되기 때문이다.

데스게임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최초에 그룹을 형성한다. 함께 다니면서 두려움을 없애려 하고, 서로를 지켜주면서 생존 확률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 수가 줄어들수록 그룹은 와해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구슬치기라는 에피소드를 삽입했다. 가장 단짝이라고 여기는 이들끼리 짝을 지어서 외부의 적과 싸우게 하는 줄 알았더니만, 단짝끼리 서로 죽여야만 하는 룰을 제공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중 줄다리기 장면 ⓒ 넷플릭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고 신뢰할 힘이 있다. 단결해서 이 뒤틀린 판을 깨버릴 수는 없는가? 이토 카이지는 왜 도박판을 뒤엎고 나오지 않는가? <배틀로얄>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모두 힘을 합쳐 섬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십오소년 표류기>의 형태를 띨 수는 없는가? <오징어 게임>은 아예 초반부터 단결은 이 뒤틀린 판을 깰 수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계약서에는 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 최초에 이 참가자들은 결국 게임을 중단하는 데에 성공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판을 깨려면 오로지 그 '판'만이 나의 세계여야 한다.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의 어느 일부분을 깨는 게 아니라, 그걸 깸으로써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 구축되는 강력한 파괴여야만 한다. 만약 <오징어 게임> 속 게임 관두기가 조지 오웰의 < 1984 >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혁명이라면 참가자들은 결코 오징어 게임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바깥에는 각자가 처한 다차원의 현실이 있다. 죽어가는 가족, 쫓아오는 경찰, 나의 장기를 노리는 범죄자, 도저히 갚을 엄두가 나지 않는 빚.

오징어 게임에서 탈주한다고 해서 내 세계가 무너지는 게 아니기에 참가자들은 단결을 배제한다.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서 서로를 속이고, 신뢰를 가장하고, 등을 치고,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이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렇게 놓인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것이 인류의 역사기도 하지 않던가.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중 구슬 게임 장면 ⓒ 넷플릭스

 
전형성과 핍진성

전형적이라는 말은 흔히 콘텐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자주 쓰인다. 공식처럼 마련된 서사와 캐릭터를 별다른 고민 없이 가져다 쓰는 바람에 이야기가 몹시 지루해졌거나 현실에 달라붙지 못했을 경우 붙는 딱지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보면 전형(典型)이란 '기준'이다. 어떤 부류를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특징을 죄다 모아서 만들어놓은 것이 전형이다. 전형은 그렇기에 쉬이 편견과 연결되고,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고, 개인의 구체적 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경험에 근거한 핍진성(逼眞性)을 갖는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오징어 게임을 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현실은 예측불가능하다. 세상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사람을 세우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흔들린다. 현실에서 인간은 '악마와 계약'을 하는 대신, '털어서 먼지 나는' 삶을 산다. 때로 생존하기 위해 불의에 눈을 감고, 불의에 저항하는 다른 사람을 돕는 대신 그 자리를 살기 위해 낚아채기도 한다. 서로의 바닥을 더 깊게 파내려가는 경쟁에서 그 룰을 제공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 앞에서 저항하지 못하지만, 돈 많고 권력 있는 이들이 부당하게 삶을 살아갈 거라는 막연한 의심과 분개도 갖는다. 그 막연한 의심과 분개는 일정 부분 경험해 왔기에 강렬해진 측면도 있다. 지금은 뚜껑을 열었지만, 한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던 슈뢰딩거의 대기업 총수에 대해 사람들은 돈을 주고 여성을 사면서 "오늘 너 때문에 내가 황홀했어"라고 말한 장면을 기억한다. 물류회사 대표가 시위하던 화물차량 기사를 한 대에 100만 원이라며 폭행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그 부가 자신의 몫에서 추출되었을 거란 사실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파리바게트 등에 빵과 재료를 운송하는 SPC 배송기사들은 얼마 전 파업에 들어갔다. 배송을 하는 화물차를 막아서고 화물차 기사를 끌어내고 폭행했다. 공장 앞에서 밀가루 배송차량을 막아섰다. 특수고용노동자인 배송기사들이 대체운송 인력을 투입해도 부당노동행위로 문제제기할 수 없기에 몸으로 막아서는 수밖에 없다는 내용은 함께 보도되지 않는다. SPC가 노동조합 탈퇴를 종용하고, 조합원에게는 조직적으로 물량을 주지 않았다는 노동조합 측의 주장은 '을질', '폭행' 같은 단어들 속에서 유야무야 흩어졌다.
 

SPC 소속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들은 지난 15일부터 SPC 사업장에서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광주 지역은 이미 12일부터 파업에 돌입한 상태다. ⓒ 공공운수노조 제공


택배노조는 파업하는 동안 대체인력으로 일했던 다른 노동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택배노조가 파업하는 동안 대체인력을 구해야 했던 대리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화제가 되는 동안, 택배노조가 한 것이 '파업'이고, 파업에 대체인력이 투입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은 같이 언급되지 않는다.

헌법에는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어 있다. 이는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다. 단결해서 고용주에게 손실을 입힐 수 있다고 정의되어 있다. 단결해서 판을 깨뜨리는 최대한의 권리를 보장해 둔 것이다. 당연하게도 노동조합의 규약에는 파업파괴자를 징계하는 조항이 있다. 파업하겠다고 결정을 했는데, 누군가가 출근해서 일한다면 '단결'할 수 없다. 몫이 없는 이들이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단결해서 판을 깨는 수밖에 없기에, 최소한도로 판을 깨보자고, 싸울 힘을 조금이라도 주자고 만들어놓은 것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파업권이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에게 서로를 죽일 권한과 단결하지 못할 환경을 준다. 플레이어들은 주어진 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말'이다. 배달해야 할 곳이 두 배 이상 늘어났으니 차량과 인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하며 파업을 시작했을 때, 룰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말'을 파업하는 이들의 빈자리에 끼워 넣었다. '새로운 말'은 살아남기 위해 그 자리에서 운전했고, 파업하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를 폭행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대중서를 쓴 신경의학자로 유명한 올리버 색스는 자서전인 <온 더 무브>에서 어느 파업의 경험을 토로한다. 1966년 장시간 근무에 형편없는 급여환경에서 일하던 간호사, 간호조무사, 경호원 등이 파업에 들어가자 상위노조인 보건종사자노조가 연대파업을 선언한다. 어떤 직원들은 자신들이 환자를 버린 것 같다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엉망인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죄책감과 싸우며 파업에 돌입한다.

파업이 일주일을 넘기기 시작하자, 올리버 색스는 파업 라인을 빠져나간다. 노동자들은 올리버 색스가 파업 라인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학생 두 명과 함께 환자들의 몸을 뒤집고 용변처리를 돕는다. 올리버 색스는 그 일을 경험하며 간호사들과 간호조무사들, 잡역부들이 평소에 얼마나 심각한 노동환경에 놓여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난 다음 날, 올리버 색스의 차 유리는 메모 하나와 함께 박살나 있었다. '사랑해요, 색스 박사님. 그래도 박사님은 파업파괴자예요.'

파업을 파괴하는 걸 막을 수 없게 한다면, 파업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 파업파괴를 이행하는 것은 게임을 설계하고 제공한 이들이 아니다. 오로지 게임의 '말'들만이 서로의 바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SPC의 대표이사는 파업을 부수기 위해 화물차를 운전하지 않는다. CJ대한통운의 대표이사도 파업을 부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물류작업을 진행하지 않는다. 전형적이고 지겨운 그 이야기들을 우리는 이미 삶으로 매일 경험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속 주인공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였던 성기훈(이정재 분)은 공장 점거 파업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다. 단결해서 싸웠지만 싸움은 패배했고 이제 그는 대리운전기사로 일한다. 성기훈의 고백을 들은 오일남(오영수 분)은 "10년쯤 전에 있었던 파업"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파업이 명백히 쌍용차 파업에 대한 비유라는 걸 다시금 재확인해 준다. 이 상황에서 굳이 쌍용차를 밀어 넣다니, 이조차도 너무 뻔하다. 쌍용차 파업이라는 걸 알자마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징어 게임>은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클리셰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심지어 거기에다가 낡은 K-사회파 서사를 적당히 버무렸다. 이 작품에 대한 평이 하나같이 평면적이고 진부하고 지루하다고 나오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루하다고 말하려고 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토록 뻔한지, 뻔한 이야기가 뻔하게 반복되니 이렇게도 핍진하게 느껴지는지 묻고 싶어진다. 뻔한 악당들이 만든 게임 속에 사는 우리한테는 뻔한 이야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은 어쩌면 더 인간적이다. 현실에서는 서로 목숨 줄을 쥐고 흔들라는 명령은 내려졌지만, 456억은 없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서영은 SF를 주되게 소설 및 칼럼 등을 써 왔습니다. 혼자 쓴 책으로 <악어의 맛><낮은 곳으로 임하소서><유미의 연인>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이웃집 슈퍼히어로><다행히 졸업><여성작가SF단편집><아직은 끝이 아니야><인어의 걸음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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