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된다. '톰보이' 스타일의 청년이 등장해 자신을 소개한다.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다. 요즘 한국 독립영화에서 드물지 않은 성소수자 주인공이구나 하고 머릿속으로 대충 이후 전개될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의 삶과 고난, 여기에 추가로 뭐가 들어갈까? 하면서 두뇌회로를 가동하려는 찰나. 중년 여성이 뒤를 이어 출현한다. 세상에나! 아까 등장한 트랜스젠더 청년의 어머니라고 한다. 자식의 정확한 정체성을 온전히 다 맞추진 못해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뒤를 이어 이번엔 귀여운 인상의 청년이 등장한다. 자신을 게이라고 밝힌다. 뒤를 이어 그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녀도 자식의 성 정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가족들이 인터뷰에 등장하거나 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달라 보인다. 아니, 실제 진 주인공은 두 청년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들로 보인다. 재빨리 영화에 대한 상상 속 설정을 수정해본다. 영화는 계속 이어진다.
 
<두 개의 문> <공동정범> 등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파헤친 일군의 작품들로 다큐멘터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잘 알려진 여성주의 미디어 공동체 '연분홍치마'의 10번째 작품 <너에게 가는 길>은 연분홍치마가 지속적으로 착목해온 성소수자 의제를 다룬 4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을 다루는 연작들인 < 3xFTM >(2008년),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2009년), <종로의 기적>(2010년)에서 이어진다.) 해당 주제를 다루는데 경력과 내공이 만만찮은 연분홍치마가 선보인 본 작업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전폭적인 협력 아래 그간 소개해온 영역의 새로운 확장성을 시험하는 도전인 셈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존재들의 '커밍아웃'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 (주)엣나인필름

 
<너에게 가는 길>은 도입부에 등장했던 FTM 트렌스젠더 '한결'의 어머니 '나비'와 게이 '예준'의 어머니 '비비안'이 각자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일상과 함께 성 소수자의 부모로서 그녀들이 벌이는 활동들을 다룬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을 법한,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당사자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과는 또 다른 결의 수난을 감당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 내내 펼쳐진다.
 
이 영화는 자녀들의 커밍아웃 과정에서 가족들이 겪게 마련일 갈등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해당 지점은 주인공들의 과거 회상을 주로 인터뷰 내용으로 언급하는 정도다. 그 대신에 커밍아웃 단계를 극복하고 본인들 또한 성소수자의 가족으로 커밍아웃 후 펼치는 활약상을 소개하는데 주력한다. 성소수자와 그 가족들의 커밍아웃을 격려하고 지지하는데 초점을 맞춘 작품의 색깔이 명확한 편이다.
 
커밍아웃 1단계: 나는 퀴어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 (주)엣나인필름

 
그럼에도 모든 것의 시작은 자녀들의 성소수자로서 커밍아웃에서 비롯된다. '나비'의 자녀 한결과 '비비안'의 자녀 예준의 성정체성 고민이 두 주인공에게 공개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영화가 탄생할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영화의 기본 얼개는 자녀들의 커밍아웃을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려는 두 주인공의 의지와 활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한결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Female to Male 성별 정정을 준비한다. 하지만 한국의 법제도는 성소수자의 정체성 인정에 대해 아직 '비정상적' '예외사례'로 규정하는 인식에 가까운 태도를 고수하는 중이기에 한결의 앞에는 우리가 동사무소에 민원 처리하러 갈 때랑은 비교 불허의 어마어마한 절차와 난관이 첩첩산중이다. (2019년에 개정되었다) 성인인 당사자의 성별 정정에도 부모의 동의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한결은 강제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다행히 '나비'는 한결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응원하게 되지만, 영화 바깥의 다른 '한결'들은 그런 이해와 격려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예준의 커밍아웃 부분은 한결이 겪어야 하는 물리적 수술 등의 과정은 없기에 상대적으로 보기에 편한 편이다. 그는 커밍아웃 후 자신의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온다. 외국 시트콤에선 종종 등장하는 장면임에도 국내에서 이런 장면을 본다는 건 여전히 생소한 경험이다. 그 다음에는 예준이 남자친구의 어머니를 대면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2연타로 관객의 고정관념을 공략한다. 서로 상반되는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 풍경은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역할분담을 한 것처럼 대조를 이룬다.
 
가장 격렬한 순간이지만 다소 아쉬웠던 부분은 한때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왔던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관련 파장 당시 한결이 겪는 좌절감 묘사 부분이다.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로 겪어야 하는 사회적 차별과 고민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상황 묘사를 위해 해당 사안을 가져온 것은 이해되지만 민감한 이슈라 그런지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치는 느낌이다. 좀 더 본격적으로 입장을 소개하거나 반대로 굳이 본 작품에서 다루기보다는 별도로 집중하는 방식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다소 밸런스 패치가 조절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커밍아웃 2단계: 나는 성소수자의 가족입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 (주)엣나인필름

 
<너에게 가는 길>의 가장 두드러진 색채가 바로 성소수자들의 가족이 주역으로 올라서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자녀의 커밍아웃 순간을 충격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얼핏 당시를 회상하는 담담한 주인공들의 회상만 들어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질 것만 같던 상황을 관객은 상상할 수 있다. 그 청천벽력 같은 선포에 당황해 하고 오랜 숙고 끝에 성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식이요, 가족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판단기준으로 먼 길 돌아오는 과정을 거친 주인공들의 결단은 이후 영화 속에서 그들이 자녀들과 선보이는 일상으로 대신 전해진다.
 
'나비'는 한결의 성별 정정 과정에 함께 하며 딸에서 아들로 변경되는 자녀를 꾸준히 격려한다. 딸이건 아들이건 자신의 자녀임에는 변함없는 일이니. 그렇게 굳게 결심한 '나비'는 힘들 때 한결이 기댈 수 있는 거대한 산처럼 어머니의 위력을 증명한다. '비비안'은 친구 같은 어머니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터뷰를 보면 비비안이 예준의 선택을 인정하는 과정이 더 힘들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비비안도 대단하지만 예준의 아버지이자 비비안의 남편인 '지미'도 영화에서 크게 등장하진 않지만 전향적인 부모상의 일각을 지탱하는데 한몫 담당한다.
 
<너에게 가는 길>이 성소수자부모모임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제작된 바대로, 주인공들의 기본적인 상황이 소개된 후부터는 정기적으로 17차례에 걸쳐 기록된 부모모임 회의와 활동 장면이 지속적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나비'와 '비비안'이 역할을 분담해 소화하던 성소수자 부모 캐릭터가 부모모임 장면들을 통해 개별이 아니라 집단으로서 정체성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자녀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 부모들은 딱딱한 실명 대신 각자 애칭이나 별명을 부르며 자신들이 각자 겪었던 천지개벽할 것 같던 체험들을 나누고 함께 자녀들을 조력할 궁리를 열심히 한다.
 
그리고 해마다 언론에서 다뤄지는 퀴어 페스티발이나 성소수자 관련 행사에 훼방을 놓으러 출몰하는 이들과 자녀를 지키기 위해 당당히 맞서는 광경이 어김없이 선보여진다. 해당 장면들은 관련 문제에 관심 가진 이들이라면 종종 방송으로 접했을 내용이지만 부모모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저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돌아본 뒤 다시 보게 될 때 좀 더 풍성하고 진한 색깔로 다가올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밝은 부분, 예준이 유학간 캐나다에서 퀴어 페스티벌에 나가기 위해 자녀와 함께 복장을 준비하고 함께 거리에 선 '비비안'의 '커밍아웃' 장면은 영화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뇌리에 남긴다.
 
커밍아웃 3단계: 주체적 여성으로 목소리 내기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 (주)엣나인필름

 
'나비'는 34년차 소방공무원이다. 사회에서 필수적이고 중요한 공익적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마땅히 사회적으로 존경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자신의 일에 당당한 '나비'의 모습이 조명된다. 그런데 나비와 한결의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아버지'와 '남편'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나비'는 싱글맘이다. 그녀는 고된 소방공무원 일을 해내면서 청소년 시절 많은 방황을 했을 한결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닥친 현실의 시련에도 묵묵히 맞선다. 그 과정을 통해 헌신적인 부모로서의 역할은 물론 자신이 평생 견지해온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운명 또한 더 굳게 다진다.
 
'비비안'은 27년 차 항공기 승무원이다. 역시 당당한 전문 직업인으로 자부심과 숙련을 겸비한 존재다. 대개 우리가 전문직 여성에게 아직도 온전히 거두지 못한 편견, 일에 몰두해 가정은 뒷전이 아닐까? 하는 구시대적 인식을 비비안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일상을 통해 가뿐히 넘어선다. 남편과, 자녀와 충실한 대화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는 철저한 자기관리 면모와 함께 자녀 예준이 어려워하지 않고 부모와 대화하고 상의하며 시련을 줄이는데 큰 몫을 한다. 그리고 해당 과정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장해온 인생의 연장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 물론 아버지들도 참여하고 있지만 어머니들의 비율이 높다는 점, 그리고 비비안과 예준의 남자친구 어머니가 모임에서 대면하는 인상적인 순간은 (영화의 메인은 아닐지언정) 여성 연대의 구현이자 사회적으로 (백래시들에도 불구하고) 약진하는 흐름과 겹쳐져 보인다. 한국사회의 부모들이 온전히 놓기 힘든 가부장제 풍조를 성소수자부모모임의 구성원들이 적지 않은 진통 끝에 극복해내고 참여하는 일련의 과정 또한 여성들의 각성과 진출 확산과 자연히 매치된다.
 
<너에게 가는 길>의 방향성과 역할, 그리고 보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스틸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해당 주제에 당연히 뒤따르는 당사자의 시련과 사회적 차별을 담아내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편견과 혐오에 따른 고통을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공유하려는 부흥회 용도에 최대한 밀착한 작업이다. 그 의도에 관련해선 아주 효율이 높을 작업으로 영화는 완성되었다. 그 대신에 <너에게 가는 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소수자들이 어렵게 꺼낸 커밍아웃 직후부터 한동안 가족들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을 혼란과 슬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한편이 모든 걸 다 포괄하고 끌어안아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과도한 중압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불러오기 쉽다. 성소수자 당사자와 가족들이 역할을 서로 나눠 위기를 헤쳐 나가는 영화 속 풍경처럼 한국 독립영화들의 조합으로 2인3각처럼 해당 지점을 보완할 수 있다.
 
<너에게 가는 길>의 주제의식과 연결되는 일련의 작업이 단편 독립영화들에서도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2020년 소개되어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알려진 이유진 감독의 작품 <굿 마더>는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딸을 인정은 하지만 주변에 알리진 못한 채로 속앓이를 하던 어머니의 고뇌를 담아내면서 타인의 문제에서 자신의 문제로 주제가 이동될 때 누구나 겪게 될 실존적 고민을 진하게 표현해낸다. (해당 작품 역시 성소수자부모모임이 함께 했다) 역시 같은 해 소개되어 적잖은 주목을 받았던 변성빈 감독의 <신의 딸은 춤을 춘다>는 병역 문제로 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트랜스젠더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함께, 성소수자 정체성을 숨긴 채 병무청 직원으로 일하는 주인공의 지인과의 갈등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너에게 가는 길>과 함께 보고 토론하거나 감상을 나눈다면 좋은 결합이 될 테다.
 
<너에게 가는 길>은 무척 스펙터클한 순간들을 여럿 선보인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이 알려지게 된 계기 중 하나, 퀴어페스티발에서 그들이 선보인 프리 허그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축제를 가로막던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의 기괴한 행동이 선보이는 명암이 보는 이들을 새삼 몸서리치게 한다. 그 직후 '나비'와 '비비안'이 자녀들과 일상에서 나누는 친구 같은 밀당 풍경이 흐뭇한 풍경을 선사해준다. 마치 겨울 끝 봄 햇살 기운 같은 무지갯빛 스케치의 순간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모모임 회원들의 커밍아웃 자기소개 장면들이다. 저런 당사자들이 우리 곁에 적지 않겠구나 하는 실감과 함께 그들이 극복해낸 시련과 고통으 시간들이 너무나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들을, 그리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 가부장제 권위와 기복적 이익집단의 위선 따위 다 소거된 후 순수한 결정체로 재탄생한 가족 공동체의 순기능이 찬란하게 빛나는 풍경이다.
너에게 가는 길 연분홍치마 성소수자부모모임 변규리 감독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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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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