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28 12:21최종 업데이트 21.11.28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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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방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했다(1961. 11. 27.). ⓒ 국가기록원

 
5·16 쿠데타 2년 5개월 뒤인 1963년 10월 15일의 제5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격돌한 선거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과 쿠데타를 승인해준 사람의 관계가 되어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하야 성명 때까지 10개월간 정치적 동거를 했던 두 사람이 이 대선에서 맞붙었다.

이 선거는 3년 전의 3·15 부정선거와 비교될 만했다.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초래한 1960년 3·15 대선에서 이승만의 득표율은 100.00%였다. 반면 1963년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는 46.64%를 득표하고 민정당 윤보선은 45.09%를 득표했다. 1.55% 포인트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는 점에서 3·15 선거와 대비될 만했다.


그때까지 치러진 다섯 차례 대선에서 그만한 박빙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 적은 없었다. 1948년 대선에서는 이승만 92.3% 대 김구 6.7%, 1952년 대선에서는 이승만 74.61% 대 조봉암 11.35%, 1956년 대선에서는 이승만 69.98% 대 조봉암 30.01%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 뒤 1960년 3월 15일에 100%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이 나왔다가 그해 8월 12일 다시 치러진 국회 간선제 대선에서 윤보선 82.2% 대 김창숙 11.5%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고 나서 1963년에 1.55% 포인트라는 초유의 표 차이가 나왔던 것이다.

1.55% 포인트는 그 이후의 대선을 놓고 봐도 매우 근소한 차이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이회창의 차이는 1.53% 포인트,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는 2.33% 포인트,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의 차이는 3.53% 포인트였다. 1.55% 포인트는 역대 2위에 해당한다.

20만 이상의 통·반장이 공화당으로

그런데 1963년 대선에서 그 같은 근소한 차이가 생긴 것은 어느 면에서는 '자장면 값'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 

그해 대선은 박정희의 공산당 경력이 문제가 된 선거로 잘 알려져 있다. 윤보선은 빨갱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박정희를 맹공격했고, 그해 10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 '낡은 매카시즘의 수법'에도 보도됐듯이 당황한 박정희는 그런 공격을 구태의연한 정치 악습으로 몰아붙였다. 그런 수법 좀 그만 쓰자는 식으로 방어막을 쳤던 것이다.

그런 외형적 현상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 것이 있다. 그해 대선이 자유당 때 못지않은 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이다. 관권선거·금권선거 같은 부정선거의 키워드들이 이때도 유감없이 작동했다. 박정희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점과 더불어 5·16 군인들이 아직은 덜 부패했을 거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해의 부정선거가 덜 부각됐을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선입견은 미국도 갖고 있었던 듯하다. 박정희 정권의 모순과 문제점을 수록한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에도 그해 대선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도널드 프레이저가 위원장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 발간하고 정식 명칭이 <한미관계 보고서>인 이 책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대해 "민주공화당이 통제하는 재정적·인적 자원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극도로 치열했다"고 한 뒤 "선거는 전반적으로 공정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이때만 해도 정치군인들이 깨끗했을 거라는 선입견이 '선거는 극도로 치열했지만 전반적으로 공정했다'는 서술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해 선거는 공정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았다. 당시의 언론보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한미관계 보고서>에도 언급된 것처럼, 이 선거는 공화당이 재정적·인적 자원을 통제하는 속에서 치러졌다. 공화당이 장악한 인적 자원 중 하나는 전국의 통·반장들이었다. 이들이 그해 부정선거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관권선거가 극심했던 이승만 때도 통·반장을 노골적으로 선거에 동원하지는 못했다. 실질적으로는 동원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엄금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일례로 1956년 4월 15일 자 <조선일보> '통반장 동원은 위법'은 "내무부에서는 13일 하오 서울특별시에 공문을 보내 서울 시내의 각 통장과 반장은 개인의 자격으로 정·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체를 지도하면서 선거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요지의 선을 그어 명시하였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통·반장들이 통·반이라는 조직체를 이용해 선거운동에 개입할 수 없다는 지침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랬던 것이 1963년 대선 1개월여 전에 나온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입장 표명으로 뒤바뀌게 됐다. 실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도 통·반장들의 개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해 9월 7일 자 <조선일보> '통·반장의 정치활동 무방'이라는 기사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9월 6일에 선관위는 통·반장들이 공무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거운동 개입을 인정하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통·반장이 야당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이 조치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전국의 통·반장 조직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20만 이상의 통·반장들을 사실상 공화당 조직으로 편입하는 유권해석이었던 것이다.

그해 2월 26일 창당 당시, 공화당 당원은 14만이 안 됐다. 그랬던 것이 대선 당시에는 150만을 넘었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당원들과 더불어 20만 이상의 통·반장들까지 합법적으로 공화당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선거는 전반적으로 공정했다'는 <한미관계 보고서>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를 느낄 수 있다. 당원들을 모으고 통반장들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금전이 대량으로 살포될 수밖에 없었으니, 관권선거·금권선거의 실태가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자장면 한 그릇 값 살포

통·반장들의 선거운동 참여는 선관위 결정에 따라 합법적이 됐지만, 그들의 운동 방식은 결코 합법적이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여당 조직책이 된 이들은 불법 선거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중 하나가 금전 살포였다.

그해 9월 28일 자 <경향신문> 1면 좌하단 기사는 "민정당의 김영삼 임시 대변인은 공화당이 28일 하오 2시 서울 고교 교정에서 여는 박정희 대통령 후보 유세의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막대한 동원비를 살포하고 있다고 폭로했다"고 한 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16통 7반장 대리 이승로씨가 가가호호 다니며 유세 참가비로 1인당 20원씩 지급하고 다닌 사실을 보도했다.

민정당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반장들에게 할당된 동원비는 2백 원씩, 통장들에게 할당된 것은 3천 원씩이었다. 반장 1명당 10명, 통장 1명당 150명을 동원할 책임이 부여됐던 것이다. 민정당은 이런 식으로 지급된 운동 비용이 서울시에서만 1900만 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서울시민 95만 명을 동원할 금전이 지급됐을 것으로 추산했던 것이다.

1963년 물가를 기준으로 하면, 20원은 자장면 한 그릇 값이었다. 원래는 25원이었지만 그해 초 당국의 압력으로 서울시 자장면 값이 20원으로 인하돼 있었다. 그해 2월 9일 자 <동아일보> 8면은 "서울시는 9일 상오 중국 음식점도 우동·짜장면을 2십 5원에서 2십 원으로 환원하도록 지시하였다"고 보도했다. 행정당국이 물가를 '지시'할 수 있었던 시절의 풍경이다.

당국에 의해 서울시 자장면 값이 20원으로 인하된 상태에서 서울시 통·반장들이 박정희 연설회 참가비용으로 20원씩 살포했다. 서울시 통·반장들에게 지급된 금전이 1900만 원 이상으로 추정되므로, 박정희와 공화당이 95만 이상의 서울시민들에게 자장면 1그릇 값을 쏜 셈이 된다. 서울시 이외의 여타 지역까지 고려하면 금액 규모는 훨씬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1961년 5월 16일 당시 박정희 반란군은 서울 시내에서 실탄을 발사했다. 그날 발행된 <조선일보> 1면 하단 기사는 UPI 통신을 인용해 "16일 새벽 서울 거리에서는 한국 해병대와 육군 헌병들 간에 치열한 사격전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그렇게 실탄을 쏘아가며 쿠데타를 성사시킨 박정희와 반란군이다. 그랬던 이들이 2년 반 뒤의 대선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실탄'을 쏘아대며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고작 1.55% 포인트 차이의 승리였다. 그나마 '자장면 값'이라도 쏘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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