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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가 스페인, 포르투갈이라고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좋아하고 많이 여행하는 곳이 라틴아메리카일 것이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라는 단어가 언제 생겼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단어는 19세기 후반인 1860년대에 나타났다. '아메리카'라는 단어도 유럽인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으로 단어의 어미를 '아'로 운율화 시키며 만든 것이다.

상당수 남미의 나라들은 스페인으로부터 1810년대에 독립하기 시작했지만 약 50년 동안은 보수/진보세력 사이의 격렬한 내전을 치렀다. 전자는 스페인이 심어준 가톨릭교회의 보수성을 자랑스럽게 지키자는 것이고 후자는 프랑스혁명 정신인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 즉,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의 '자유민주주의'를 근대 국가 설립의 기초로 삼으려는 세력이다. 후자가 승리하여 지배계급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남미는 삼권분립이 철저하고 판사, 검사들도 우리보다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다. 물론 일부 검찰, 경찰은 부정부패에 빠져있어 돈 많은 사람들을 제대로 수사, 처벌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서 프랑스 즉 '라틴'유럽을 지향하는 단어인 '라틴아메리카'가 출현한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19세기는 유럽, 그중에서도 북서 유럽(프랑스, 영국, 독일 등)인 '노스웨스턴'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를 제국주의 침략을 하던 시기였다. 우리도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그보다 훨씬 먼저인 16세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를 침략했다는 것은 그렇게 실감이 되지 못한다. 그냥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아있다. 남미는 19세기에 정치, 문화적으로는 프랑스, 경제적으로는 영국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미국이 이 대륙을 자신의 '뒷마당'으로 삼게 되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식민지 시기에는 이 대륙을 "신세계"로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근대국가를 출범시키면서 원주민계와 아프리카계 주민 대중을 근대국가의 구성원에서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당연히 근대 자본주의 국가건설에 실패한다. 예를 들어, 19세기 내내 이 대륙의 약 80%이상의 주민은 '문맹'이었다. 근대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우리를 식민화시키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일본어를 교육시킨 것과 대비된다. 또한 1910년에 터진 멕시코 혁명의 초기에는 약 90%이상의 국민이 근대적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인 17세기에는 식민지 권력 체계의 중심에서 소외된 가난한 하층 백인들은 변두리 동네에서 원주민계와 아프리카계 주민과 이웃으로 가깝게 지냈다. 이들 가난한 백인들은 배제할 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체험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집단적 무의식속에 깊이 남아있다.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문맹은 뒤집어 얘기하면 구어성의 문화인데 어느 학자에 의하면 구어성의 문화는 집단적 기억과 사회적 연대의 문화가 강하다고 한다. 그리고 스페인의 식민지 시기 이전인 잉카제국 시기 이전의 오랜 옛날부터 시작해서 원주민들은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농업 문화를 식민지시기를 거쳐 현재에도 가지고 있다. 이런 흐름덕분에 현재에도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조직화가 잘되고 동네 평의회, 주민총회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잘 만들고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서로 연대를 잘하고 집단적으로 저항과 시위도 잘하는 배경이다.

이 공동적·집단적 성향의 리더 그룹의 특징은 지배하되 군림하지 않는 것이다. 즉 위계서열이 약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집단적, 공동체성이 강하지만 유교적 영향과 중앙집중적 정치 체제로 인해 위계서열의 차별성이 강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남미에서는 186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백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정체성은 무시, 배제됐다. 이것이 바로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의 정치 문화적 맥락이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먼저 예술인 지식인들이 이런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고 1990년대부터 사회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남미에서는 대중이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를 많은 사람들이 "좌파의 부상"으로 이해하는데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라틴'이후, '아메리카'이후를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 즉 유럽으로부터의 제대로 된 독립을 원하고 이를 위한 전략이 라틴아메리카 통합이다.

최근 멕시코 대통령이 온건한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고인이 된 차베스는 급진적 통합을 추진했다. 유럽은 선진국 '북'으로 상징되고, 남미 대륙은 개발도상국 '남'으로 상징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대륙을 '남미'로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는 1965년경부터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다면 남미는 이미 16세기부터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저임금에 양질의 교육받은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된 경공업제품(가발, 의류, 신발 등)에서 중공업제품(자동차, 조선 산업제품 등), 이제는 하이테크제품(반도체 등)을 경쟁력 있게 잘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선진국'에 진입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이에 비해, 남미는 16세기부터 일차산품인 농,광업제품(밀, 사탕수수, 커피, 석유, 천연가스, 구리 등)을 땅에서 추출하여 유럽으로 수출하는 국제 분업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의 콩을 대대적으로 재배하여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우리처럼 수출경제이지만 구조적 성격이 다른 것이다. 남미는 약 500년 이상 이렇게 살아왔다. 따라서 땅의 주인인 대지주는 토지개혁의 실패로 더욱 막강하게 되었고 부르주아는 우리처럼 산업부르주아가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공업제품(치약, 비누까지 수입)의 수입상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우리 같은 하이테크 기업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아니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추출경제의 지대 수입으로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부동산 투기세력이 편하게 돈을 버는 것과 똑 같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우리는 고속성장을 하였다면 남미는 물가상승분을 제외한 실질 경제성장율은 약 0.5%수준에 머물렀다. 그리고 공업제품을 유럽이 공급하였으므로 항상적으로 '공급부족'으로 인한 인플레에 시달려왔다. 수요부족이 아닌 것이다. IMF의 경제위기 대처방안은 과거 수요를 억제하는 긴축처방이었는데 잘못된 처방이었음을 최근에는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1965년경부터 모든 국민이 중산층이건 노동자계급이건 물질적 욕망의 추구로 각자 도생으로 개인적 경쟁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즉 "부자되세요"의 문화가 강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이런 문화를 선호했기 때문에 50년 이상 극우 세력이 지배계급으로 헤게모니를 가져올 수 있었다. 남미와 달리 자유주의는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시기에 저항세력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 세력도 지배계급이 되었다. 사회전체가 물질적 욕망 추구를 위해 개인주의적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해서.

물론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 진보적 지식인들은 다양한 집단적 참사의 비극 앞에서 "당신과 당신 가족도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떨 것인가"를 강조하면서 돈만을 추구하지 말자고 개혁을 소리 높여 강조하지만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우리같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대만은 우리와 달리 최근의 어느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들었다고 한다. 남미 사람들은 경제성장에는 실패했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덕분에 연대의 문화가 강해 각자도생의 경쟁에서 오는 비극은 우리보다 적게 겪는다.

태그:#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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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라틴아메리카 사회, 문화의 연구자입니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하베리아나대 문학박사입니다. 부산외대에서 HK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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