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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원상회복추진위원회 소속 교사들이 본인이 해직 당시 겪었던 국가 폭력 행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1989년 5월 28일 전교조 결성 선언 이후, 군사정권의 전교조에 대한 구조적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해임, 파면 등 중징계와 구속 수사, 행정처벌과 형사처벌이 동시에 집행되었다. 동료 교사의 목이 눈앞에서 떨어지는 서슬 퍼런 칼춤 앞에 선생님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탈퇴 조치 됐다.

나는,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며 탈퇴 교사를 이해했다. 그러나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이 '나'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탈퇴를 할 수가 없었다. 구속을 각오했다. 그런데 당시 대구농고에는 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 탈퇴하지 못한 내가 6명이나 더 있었다. 6월 16일, 젊은 선생님 7명이 모여 대구농고 분회를 결성했다. 이 7명을 대표하여 분회장(대의원)으로서 6월 25일(일요일)전남대 대의원대회에 참석했다. 그날 오후 귀갓길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나는 검거되었다.

검거 후 실려 간 곳은 대구남부경찰서였다.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었다. 저녁 무렵,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기자가 나왔고 갑자기 얼굴에 카메라를 비추었다. 어색했지만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었다. 그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유치장에 들어서자 당번 형사는 나에게 허리띠를 풀어 달라고 했다. 허리띠로 목을 매서 자살하는 범죄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허리띠도 없이 철창 안에 엉거주춤 앉아 있자니 그저 한 사람의 범죄자로 전락한 것 같은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하룻밤을 착잡하게 보내고 오전에 호송차에 실려 대구지방법원에 검사 조서를 받으러 갔다.

검사 조사 당일 구속 집행 명령 

검사는 지금이라도 탈퇴하면 모든 것은 없던 것이 되고 다시 교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죄없이 목이 잘리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정권의 폭력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각오는 돼 있었다. 나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눈치채고 검사는 서둘러 조사를 끝냈고 나는 교도소로 바로 보내달라고 했다. 다시 돌아온 유치장에서 나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떠올라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가던 때 밤 열 시였다. 검사의 조사 당일에 구속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밤 열한 시쯤 화원교도소에 입소했다. 철창을 열고 또 열고 또 열고 몇 구비를 돌아서 그날 입소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열댓 명 정도가 잠들어 있었다. 입구 쪽 벽에 틈을 만들어 나는 고단한 육신을 뉘었다. 이튿날 아침, 담당자가 나오더니 옷을 죄다 벗게 하고 쪼그려 뛰기를 시켰다. 나는 그가 지켜보고 있는데 물건을 덜렁이며 알몸으로 5회 정도 쪼그려 뛰기를 했다. 치욕스러워 눈물이 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과 젖은 눈을 보고 미안했던지 그는 죄수복을 건네주며, 범죄자들이 똥구멍에 담배나 마약을 숨겨오는 경우가 있어서라고 우물쭈물 이유를 설명했다.

이튿날 희부연 시멘트벽을 배경으로 죄수 증명사진을 찍고 내가 배정되어 간 곳은 7사의 위쪽에 있는 감방이라 해서 7사상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화원교도소의 7사는 주로 강력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 소년범들이 갇혀 있는 공간이었다. 15명의 소년범들과 1명의 정리원(방장), 총 16명이 5평 남짓한 방에 수용되었는데 나는 정리원이었다. 정리원의 역할은 감방 안의 질서, 즉 군기를 잡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군기는 정리원이 아니라, 감방 복도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는 '소지'가 잡는 것이었다. 7사상을 맡은 소지는 마약사범이었는데 당시 대구에서 이름난 폭력 조직이었던 돈지파의 일원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녔다. 그가 복도를 지나가며 눈빛만 쏘아보아도 소년범들은 대번에 얼어붙었다.

사건이 터졌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내가 구속된 후 전교조 대구지부는 당번을 정해 면회를 왔고 그날은 내 생일을 축하해서 비닐 팩에 담긴 닭고기를 영치품으로 넣어 주었다. 아이들한테 영치품을 나누어주고 있는데 소지가 철창을 두드리며, 동작을 멈추고 영치품을 자기한테 넘기라고 했다. 안 된다고 하니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바로 문을 따고 들어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넘어졌고 코에서는 코피가 사정없이 쏟아졌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감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소년범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혼자 맞았고 혼자 휴지를 찾았다. 혼자 흐르는 코피를 닦았고 혼자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혼자, 콧대가 심하게 부어 있음을 감지했다.

사무치게 외로웠고 사무치게 화가 났다. 화가 나자, 소지와 돈지파 깡패집단과 결탁한 화원교도소의 유착이 직관적으로 보였다. 이를 악 물었다. 단식을 결심했다. 그리고 실행했다. 그날 저녁을 굶고 아침을 굶었다. 소문은 빨랐다. 운동시간에 내 나이 또래의 사내가 문신을 과시하며 다가왔다. 단식을 풀지 않으면 자기 아는 '알라'를 시켜 돌로 머리를 까고 칼로 등을 찍겠다며 협박했다. 분노 때문이었는지 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의 말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빙그레 웃으며 지금 한 번 그래 보라고 배를 내밀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듯 우물쭈물 물러섰다. 다시 점심을 굶고 저녁을 굶었다. 누가 시켜서 그랬는지 그날 밤에는 라면이 특식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몫을 너무나 맛있게 잘 먹고 있었다. 미칠 듯한 냄새였다. 희미한 의식 속에 잠이 들었다.

이튿날이었다.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소지가 복도에 꿇어앉아 큰 소리로 빌고 있었다. "선생님이 이러시면 저는 7년이나 치뜨게 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속으로, 정말 고마웠다. 그가 자존심을 죽인 덕분에 내 육신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화 나는 대로 살면 화가 삶을 망친다며 선생님답게 단아한 훈계를 주고, 그가 몇 달을 안고 고민하던 항소이유서까지 내가 써 주었다. 그 후 그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89년 9월 11일 오후, 나는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받고 75일의 구금에서 풀려났다.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나에게 행정처분의 소명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 파면 처분까지 완료해 놓고 있었다. 파면과 구속! 탄압이 준 상처를 실존적으로 겪어가던 그 무렵 내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솔직히 내 삶은 여전히 바보처럼 스물아홉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괴로움을 겪을 때, 스물아홉으로 반추하면 못 견딜 정도의 것이, 견딜 만한 것으로,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마침내 새로운 행복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젊으면서도 행복한 바보다.

돌아보면 어찌 나뿐이었으리라. 나보다 더 오랜 기간 구금 생활을 하고 심지어 징역까지 산 선생님들도 많다. 갇힌 사람들만 아니다. 해직의 고통 속에서도 교육 운동을 이어가다가 연탄 가스에 유명을 달리했던 선생님도 있다. 자살 소동을 벌이는 가족을 앞에 두고 탈퇴 각서를 써야 했던 선생님의 상처도 깊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복직 기회를 거부하고 세상에 숨은 선생님도 있다. 오늘날 합법화된 전교조는 이 모든 '상처 위에 핀 꽃'이다. 전교조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획일적이었지만 개인이 받은 탄압의 상처는 고독했다. 하여 상처가 주는 아픔은 실존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다. 나는 전교조의 간고한 역사를 통해 고귀한 노동의 신성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여 교사가 노동자라는 엄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살과 뼈에 사무치는 긍지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전교조는,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상처이기에 영광'인 내 영혼의 기적이고 축복이다. 그러나 어쩌랴. 상처니 축복이니 하는 정신승리법적 삶의 한편에 '라떼는'이라 해 놓고 가벼이 웃어넘길 수 있는, 꼰대인 듯 꼰대 아닌 삶을 꿈꾸는 것을. 원상회복이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상식이 되는 때를 바라는 것을.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을.

태그:#전교조해직교사,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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