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17 20:16최종 업데이트 22.01.0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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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티탄>메인포스터 <티탄>메인포스터 ⓒ ㈜영화특별시SMC

 
* 이 글은 다량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데 스포일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포일러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이 글은 영화를 먼저 감상한 뒤 읽어주십시오. 또한 이 글은 신체 훼손과 혐오스러운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로든, 작정하고 밀어붙이든 때때로 칸은 노골적으로 '정치적'일 때가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올해 칸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도,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도, 폴 버호벤의 <베네데타>도 아닌 고작 두 번째 장편으로 칸 경쟁 부문에 겨우 처음 문을 두드린 서른아홉의 여성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에 황금종려를 던졌다.


다시 한번, 그러니까 이런 칸의 선택이 많은 사람에게 의외인 것은 <티탄>이 누구에게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이번 심사위원장이었던 스파이크 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누구보다 지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심사위원들 중 멜라니 로랑과 매기 질렌할도 <티탄>을 지지했을 것이다. 물론 밀렌 파머, 마티 디오프, 타하르 라힘은 역시 자국의 <티탄>을 젖혀두고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영웅>을 지지하기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정치적'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라고 표현하겠는가. 이런 의외의 선택에도 칸에 비판이 제기되지 않는 것은 <티탄>에 그럴 만한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선혈이 낭자한 시퀀스
 

영화 <티탄> 중 유년기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 플레이트를 삽입한 알렉시아 ⓒ ㈜영화특별시SMC

 
<티탄>의 이야기는 다소 파편적이고 괴팍하다. 알렉시아는 유년기에 아버지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인해 한쪽 머리에 티타늄 플레이트를 삽입하게 된다. 사고 이후 알렉시아는 차와 금속에 집착하게 된다.

성인이 된 후 알렉시아는 모터쇼의 스트립 댄서로 활동한다. 모터쇼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신을 추행하는 스토커를 비녀를 머리에 쑤셔 넣어 능숙하게 살해한다. 그 뒤 알렉시아는 알 수 없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자동차와 성관계를 맺게 되고 충격적이게도 자동차, 기계와의 관계를 통해 임신하게 된다. 그리고 알렉시아의 질에서는 불길한 검은 기름이 계속해서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온 알렉시아는 신경이 곤두선 채로 TV 뉴스를 보고 있다. TV에서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아마도 이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스토커를 쇠 막대 하나로 능숙하게 살해한 알렉시아일 것이다.

이때 알렉시아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온다. 알렉시아의 아버지는 교통사고 뒤부터 자동차와 금속에 집착하는, 괴상해진 알렉시아, 괴물 같은 딸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고 있다. 아니, 아마도 어떤 불길함과 두려움 때문에 알렉시아를 외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알렉시아와 아버지는 집에 함께 있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따로 하는 남보다 못한 관계다. 그러므로 알렉시아는 사실상 유년기부터 아버지의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
   

영화 <티탄> 중 잇따른 살인을 저지른 알렉시아는 자신의 존재 근원을 부정하듯 부모를 방에 가둔채 집에 불을 지른다. ⓒ ㈜영화특별시SMC

 
알렉시아는 모터쇼에서 만난 또 다른 스트리퍼인 쥐스틴과 레즈비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알렉시아가 쥐스틴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저 그녀의 유두를 꿰뚫고 있는 '금속 조각'인 피어싱에 대한 알 수 없는 충동 때문이다. 많은 영화에서 가볍지 않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는 동성애 관계는 <티탄>에서 알렉시아의 작은 금속 조각에 대한 집착으로 유발되는 불만족스러운 도착 행위에 지나지 않게 표현된다.

여기서도 알렉시아의 충족되지 않는 불감증은 다시 살인에 대한 충동으로 변한다. 알렉시아는 성적 쾌락을 한 공간에서 공유하던 레즈비언 쥐스틴, 이성애자 커플, 흑인 남성을 쇠 막대로 꿰뚫어 처참하게 살해해 버린다. 이 학살에 가까운 선혈이 낭자한 시퀀스.

그런데 이 잔혹한 시퀀스에서 피해자들의 성 정체성과 인종적 다양성은 문화 산업 내에서 확산되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은유이다. 넷플릭스나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구호에 따라 콘텐츠의 인종적 배치, 성 정체성적 배치를 매뉴얼화하는 경향이 있다. 즉, 저항적인 영화 문법으로 페미니즘, 인종 이슈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기존 영화의 위계적 문법 위에 그저 여성을, 성소수자를, 유색인종을 기계적으로 배치한다. 

쥘리아 뒤쿠르노는 여성과 성소수자, 유색인종을 도식적인 매뉴얼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일종의 식민화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즉, 억압받는 존재들의 규범에 대한 저항은 온건한 공생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이 학살을 벌인 뒤 알렉시아는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방에 가둔 채 집에 불을 지른 뒤 떠난다.
 

영화 <티탄> 중 뱅상은 노쇠해 가는 육체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다. ⓒ ㈜영화특별시SMC

  
잇따라 살인을 저지른 알렉시아는 경찰의 포위를 피하기 위해 머리와 눈썹을 자르고 스스로 코뼈까지 부러뜨려 얼굴을 바꾸고 가슴과 배에 압박 붕대를 감아 남장을 한 채 10년 전 잃어버린 실종 아동 아드리앙으로 신분을 위장해 스스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10년 전 실종된 아이의 아버지인 뱅상과 알렉시아를 대질시키고 뱅상은 알렉시아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알렉시아를 받아들인다.

소방대 대장인 뱅상은 아들 또래인 젊은 소방대원 레인과 동성애 관계를 맺고 있는 게이이며 노쇠해 가는 육체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지탱하고 있는 약물 중독자이다. 알렉시아는 배가 점점 크게 불러오고 유방과 질에서는 계속해서 검은 기름이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뱅상과 소방대원으로 지내며 위태로운 동거를 유지한다.

결국 만삭의 배와 젖가슴을 뱅상에게 들키지만 뱅상은 이미 알렉시아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였듯 "상관없어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야"라고 말하며 만삭의 배와 젖가슴을 가려준다. 성장하며 결여되었던 부성을 처음 느끼는 알렉시아도 스테로이드 중독증으로 위태로운 뱅상을 돌봐주며 둘은 서로 부자 관계와 이성 관계 사이의 혼란스러운 사랑을 확인한다.
 

영화 <티탄> 중 머리와 척추가 금속으로 이뤄진 기계의 아이를 출산하는 알렉시아. ⓒ ㈜영화특별시SMC


프랑스의 혁명기념일 전야인 7월 13일 밤에 열리는 그 유명한 소방서 축제. 근육질의 소방대원들이 몸을 부딪치며 뒤섞이는 가운데 알렉시아는 소방차 위에서 다시 스트립 댄스를 춘다. 알렉시아의 춤으로 당황한 소방대원들의 파티는 중단되고 알렉시아는 만삭의 육체로 소방차와 다시 한번 자기 파괴적인 성관계를 맺는다.

혁명기념일 아침 알렉시아는 뱅상의 침실에서 기계의 아이를 출산하고 뱅상은 머리와 척추가 티타늄으로 이뤄진 재난이자 괴물인 신생아를 받아든다. 앙시앙 레짐을 목매달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바로 그 날에 세상에 태어나는 괴물. 결국 혁명이라는 것은 어떤 윤리적인 주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충동과 같은 '괴물성'(monstrosity) 일 수 있으며 그것의 유일한 성립조건은 앙시앙 레짐, 즉 부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수긍이라도 하듯 뱅상은 이제 막 태어난 알렉시아의 아이에게 "내가 여기 있다"라고 읊조린다.

칸의 정치적 결단

쥘리아 뒤쿠르노는 모두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작 <로우>보다 더 거칠고 급진적인 영화를 들고 돌아왔다. <티탄>은 상영시간 내내 어떻게 충돌할지, 어떻게 파괴될지,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불길하고 괴물같은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우리가 <티탄>을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칸은 성별 인종 상관없이 사람들을 찔러 죽이고, 부모를 산 채로 태워 죽이고, 자동차와 성관계를 맺고 기계의 태아를 잉태하는 이 영화에 스스로 괴물을 출산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황금종려를 선사했다. 아마도 그것은 미학적인 당위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무기력해진 영화계, 특히 프랑스 영화계에는 이런 괴물같은 에너지를 가진 영화가 필요하다는 말 그대로 정치적인 결단이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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