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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편집자말]
지난 사오 년간, 집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농수산물시장에 자주 갔다. 탐스럽게 진열된 과일과 쌓여 있는 싱싱한 채소를 보면 마음이 넉넉해졌다. 어렸을 적 시장에 가면, 어머니와 상인이 살갑게 안부를 묻고 서로 값을 눙치며 돈을 건네고 물건을 받던 따뜻한 정경이 살아났다. 지금은 농수산물시장에 가는 발길이 뜸해졌다. 지난여름, 단골 가게에서 샀던 열무 한 상자 때문이다.

사오자마자 바로 김치를 담그려고 보니, 박스 아랫단에 있는 열무가 대부분 무르고 상한 걸 발견했다. 다시 차를 타고 바꾸러 갔다. 상한 열무를 본 주인은 "내가 아침에 봤을 때는 말짱했거든"이라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변명만 했다. 심지어 분명 내가 산 열무보다 가격이 싼 열무로 슬쩍 바꿔가라는 말까지 해서 기분이 상했다.

더는 의미가 없어진 단골
 
단골에게는 좋은 물건을 주리라 믿고, 가격도 흥정하지 않는 내가 호구였던 걸까.
 단골에게는 좋은 물건을 주리라 믿고, 가격도 흥정하지 않는 내가 호구였던 걸까.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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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가게였기에 더 실망했다. '단골의 의리'를 나만 생각한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평소에 물건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시장이라고 무조건 깎고 보거나, 상인도 깎을 것을 어림해 미리 높여 부르는 행태가 싫었다. 마트의 가격표를 에누리하지 않듯, 신뢰 속에 재래시장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상인이 덤을 줄 때, 기분 좋게 받을 뿐이었다. 단골에게는 좋은 물건을 주리라 믿고, 가격도 흥정하지 않는 내가 호구였던 걸까. 친정어머니는 네가 순해 보이니까 속여먹은 것이라고 하셨다.

고(故) 박완서 작가의 <노파>라는 콩트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추운 날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노파가 안타까운 마음에 채소를 사준다. '마음 좋은 아주머이'라고 불리는 단골이 되고 나니, 노파는 슬쩍슬쩍 썩은 걸 섞어주기 시작했고, 값도 남보다 비싸게 받았다. 어쩌다 주인공이 불평하면 '마음 좋은 아주머이'답지 않다고 핀잔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사과 없는 상인의 응대에 화가 났다. 대형마트에 불량상품을 가져가면, 안내창구에서 두말없이 환불해준다. 단골이라는 이유로 왜 감정노동을 해야 할까? 그 일 이후, 농수산물시장에 가는 일이 줄었다. 다른 가게에서 장을 보고 나올 때, 단골 가게 주인과 눈이 마주칠까 서둘러 지나가는 일도 마음의 짐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싫어진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섞지 않아도 되는 건조한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아닌가 보다. 예상 외로 주변 50대 중년 지인들이 무인 주문 기계인 키오스크(KIOSK)가 오히려 편하다고 말한다. 물론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당황하기도 한다. 중장년층이 햄버거 가게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다가 주문을 포기했다거나, 공항 키오스크에서 가족 발권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했다는 뉴스 기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나 역시 커피전문점에서 헤맨 적이 있다. 키오스크에서 아이스 카페라테를 시키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림에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냥 뜨거운 걸 마시자' 싶어 카페라테 버튼을 누르니 그제야 아이스(ice)냐 핫(hot)이냐를 묻는 화면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우유의 양도 얼음의 양도 물었다. 그때까지 긴장했던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연한 커피를 좋아해 매번 직원에게 "얼음을 조금 빼고 우유를 더 넣어주세요" 말하는데 점원이 바로 알아듣지 못할 때는 반복해서 말하기가 번거롭고, 내가 까다로운 사람이 된 듯해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키오스크가 편하다"는 50대 지인들
 
키오스크 Kiosk (터치스크린 방식의 정보전달 시스템인 무인단말기)
 키오스크 Kiosk (터치스크린 방식의 정보전달 시스템인 무인단말기)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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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50대 지인들도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키오스크가 편리하다고 한다. 말 속도가 빠른 젊은 점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곤란할 때도 잦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판매자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어쩌면 좋고 싫고를 떠나 시대의 변화에 소외되지 않으려면 키오스크에 빨리 적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비대면이 일상화된 코로나 이후 키오스크는 패스트푸드점, 식당, 카페는 물론 병원, 극장, 공항까지 급증했고, 사람 없이 상품과 키오스크만 있는 무인가게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간편함과 신속성이라는 키오스크의 장점이 무색해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 동네 작은 과자점에 들렀다. 막 개점한 시간이라 주방에서 주인이 뛰어나오더니, 키오스크를 켠다. "그냥 주문받으시면 안 되나요?" 키오스크로만 주문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계가 켜지기를 둘이 마주 보며 기다리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주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주문을 하지 못하다니.

키오스크는 단골의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고 이해를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판매자의 표정이나 말투 때문에 기분 상할 일도 없다. 물론 반가운 인사와 말 한 마디에 오가는 정을 바랄 수도 없다. 주인과 말 섞을 일 없이, 주문 번호표만 오가는 세상이 되었다. '단골'이라는 단어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신 '적립 포인트'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아닐지.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재래시장, #단골, #키오스크, #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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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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