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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3월 26일 기록을 보면 고만만호 김상(金商)은 진상하는 해의를 무역한다고 말하고 휘하 군사들에게 면포를 거두어드린 사례도 있다. 여기에서 해의의 값는 상당히 고가였는데 1650년 효종1년 3월 23일의 기록을 보면 "남쪽지방에 갔을 때 어공(御供)하는 해의 1첩값이 목면 20필까지 간다"고 기록됐다.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만도 하다. 목면 1필에 쌀이 12두였으니 김 1첩값이 쌀 두가마니 반이었다는 말이다. 엄청난 가격이다. 이런 소리를 전해 들은 조선 효종은 이후로는 해의를 봉진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1657년(효종) 9월 26일 비변사등록의 기록에는 '서울에서 무역하기 어려운 물건이 있으면 부득불 전라도에서 상납해야 한다'며 그 구체적인 물목으로 김을 지정하고 김을 반드시 전라도에서 상납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기름이나 꿀, 황랍, 후추, 해조류 등의 물품의 관리를 맡는 관청인 의영고(義盈庫)에서 관리하였으며, 1308년 고려 충렬왕 34년에 설치되어 1882년 고종 19년 12월 29일에 폐지되었다. 
 
미역과 다시마, 김 등의 해조류를 담당하는 공식적인 우리의 역사는 600여 년에 달하고 있다. 1473년 성종실록 4월 28일자를 보면 의영고에서 해조류는 유통기한을 2년으로 정해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조15년 1637년 12월 9일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숙녕전 제사용으로 쓰고 남은 물목을 보면 해의(海衣), 다시마, 미역, 가사리, 황각 등의 해조류를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궁중의 제사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지중추부사 등을 북경으로 보내면서 해의를 평균 1백근(60kg)을 가져다 조공했다. 그 물품을 마련하는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국을 제외한 일본 등 우리나라 인접국들과의 관계를 서술한 외교서인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제5권을 보면 1802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선물한 목적으로 김(海衣) 90첩을 전라도에서 생산하여 부산에 실어다 납부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그러나 귀한 것에는 문제가 발생하고 부정이 끼어든다. 김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귀한 김을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들이 가만 두었겠는가? 엄청난 부정과 부패가 자행되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백성들이 짊어졌다. 효종 때 일시적으로 해의의 진상이 금지되었지만, 그 후로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1726년 영조는 10월 30일 기한 안에 봉진하지 못한 전라감사를 ‘대죄하지 말고 회유하라’고 할만큼 어떻게 보면 진상하는 해의의 수량과 요구하는 해의의 질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792년 정조16년 1월 27일 기록을 보면 ‘지금 영남에서 봉진한 김(海衣)을 보건데 모양이 예전 그대로이니 몹시 놀랍다. 명령을 내린 후 즉시 바로잡지 않은 감사는 중하게 추고하고 봉진한 수령도 잡아다 심문하여 엄히 처단하라’고 명령한다.

김의 채취와 수확, 생산이 쉽지 않고 주어진 할당량은 해야 하니 편법이 판을 쳐, 김을 덕지덕지 기름종이(油芚)처럼 여러장 겹쳐 발라 붙여서 두껍게 만들거나 크게 만들려고 풀로 붙이거나 침을 발라서 정갈하지 못하고 잡스럽게 만든 김을 진상(1793년 11월 27일 기록)하는 등의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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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약산도에 ‘정가섬’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그야말로 조그마한 섬이었다가 최근에는 어민접안시설 설치로 인하여 연륙되어 섬이라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섬이 그야말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어낸 출발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류의 열풍속에서 전라도가 만들어낸 세계최고의 히트상품인 김(海衣)을 만들어낸 시작이 이 조그마한 섬에서 기인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김이 많이 양식되었다. 자연산 돌김을 채취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인공적인 시설을 통해 양식으로 김을 얻고자 함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양식으로 김을 생산하던 섶꽂이 양식보다 발달한 방법은 대발을 설치하여 김을 양식하는 떼발 양식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양식은 완도군 조약면 장룡리에 살던 정시원(鄭時元)이 그곳 앞바다의 죽도(竹島) 부근에 어전을 설치하였는데, 그 어전의 대발에 김이 부착하여 발육이 좋은 것을 보고, 어전의 발을 모방하여 떼발을 만들어 김을 양식하면서 본격적으로 김의 양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죽도 부근의 조그마한 섬이었던 곳을 지금도 주민들은 ‘정가섬’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정가섬이 있는 장용리에 많이 살고 있는 文獻公派 鄭氏의 족보에 ‘정시원’이 실존 인물로 나오고 그의 출생연도가 정조 21년(1797)으로 되어 있으므로 떼발식 김 양식법은 19세기 초엽이나 중엽무렵에 정가섬에 처음 개발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방법의 개발은 김 양식업에 있어서 세계 최초의 기술 혁신이었으며, 후일 일본에서 이 정가섬의 양식법을 본떠서 뜬발식 양식법의 개발에 응용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일본식 양식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 양식업의 조기적 발달을 자랑하는 일본에 앞서서 우리나라에서 김 양식법이 개발되었던 것이고 그 양식법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임금은 딸인 정명공주에게 각종 약재와 약초가 많이 나는 약산도를 하사하였다. 약산도가 정명공주의 궁방전이 된 것이다. 약산도의 약초와 각종 진귀한 것들, 그리고 조세는 정명공주에게 납부되었다. 약산도를 가진 정명공주는 83세까지 생존하여 역대 왕실가족 중에서는 최장수를 기록하였다. 
 
약산도가 일제강점기에 토지조사사업과 맞물려 궁중재산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됨에 따라 조약도는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약산도에서 김을 양식하던 주민들을 중심으로 약산도를 지키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약산도의 섬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수하게 되었는데 정가섬을 중심으로 김이 호황을 누려 3년만에 약산도 매수대금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가섬이 조약도를 살리고 김을 세계에 알리게 된 출발지가 되었다.

김은 우리 한국을 빛나게 해주는 대표 해조류이다. 김이 없었다면 오늘날 완도의 명성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김은 완도를 대표하는 해조류이고 나아가 지금은 세계적인 식품이 된 그야말로 한류식품의 대표주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반도를 떠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세계인의 식품이 됐다. 이 해조류의 시작은 완도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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