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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영애, 영식 등에 쓰인 '영(令)'은 높임의 뜻이 있어 이들은 높임말로 쓰인다.
 영부인, 영애, 영식 등에 쓰인 "영(令)"은 높임의 뜻이 있어 이들은 높임말로 쓰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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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을 앞두고 소환된 '영부인'이 말썽이다. 영부인이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뜻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겪지 못해서 이승만·윤보선 대통령 때도 그랬는지는 알지 못한다. 박정희 정권 때는 '영부인' 호출은 가끔이었지만, 전두환 시절의 '땡전 뉴스'에서는그 빈도가 늘었었다. 

'영부인'은 죄가 없다

죄 없는 '영부인'이라는 낱말이 말썽이 난 것은 윤석열 후보 부인인 김건희씨의 학력과 경력에 의혹이 일면서다. 의혹이 짙어지자 난처해진 윤 후보가 '영부인'이란 호칭을 쓰지 말자고 제안하고, 집권하면 대통령 배우자를 보좌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 밝히기까지 이른 것이다. 

윤 후보로서는 좋은 일도 아닌데, 배우자 문제가 계속 여론을 달구자, 그게 부담스러웠던 게다. 그러나 사실 '영부인(令夫人)'의 원래 뜻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에 불과하다. 7·80년대만 해도 청첩장 아래에 '동영부인(同令夫人)'이라는 구절이 반드시 박혀 있곤 했다. 그것은 "영부인과 같이 오라는 말"이었다.
 
1970년대식으로 재구성해 본 청첩장. 맨 아래에 '동영부인'이라 적힌 것은 '영부인과 함께 오라'는 뜻이다.
 1970년대식으로 재구성해 본 청첩장. 맨 아래에 "동영부인"이라 적힌 것은 "영부인과 함께 오라"는 뜻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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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령)'은 ① 명령할(령),② 법률, 규칙(령) ③ 우두머리(령),④ 높일(령) 등의 뜻을 갖는데, ① 영장(令狀), ② 법령(法令), ③ 현령(縣令), ④ 영애(令愛)와 같이 쓰인다. '영부인'의 '영'은 물론 '영애'와 같은 의미다. '영애'는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이고 '영식(令息)'은 "윗사람의 아들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참고) 

'남의 아내'를 두루 가리켰으나 '대통령 부인' 지칭으로 굳어져
  
영애나 영식은 '윗사람의 딸, 아들'을 이르지만, 영부인은 '남의 아내'를 두루 가리킬 수 있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 낱말은 쓰임새가 줄면서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만 주로 쓰이니 그 의미 영역이 축소된 셈이다. 오늘날 영부인이란 낱말은 천천히 사라져가는 말이다. 같은 뜻이라는 '귀부인, 영규, 영실, 영정, 합부인'이란 낱말도 사실상 쓰이지 않는다.

'부인(夫人)'도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로 쓸 수 없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출연자들이 자기 처를 '우리 부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례다. 자기 배우자를 이를 때는 '처'나 '아내'를 쓰면 된다. 

일반인들이, 같은 뜻의 '부인'이 있는데 굳이 대통령 배우자를 이르는 말로 굳어진 영부인을 쓸 일이 없어졌다. 영식이나 영애도 마찬가지다. 1997년 박아무개라는 의사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비리를 폭로하면서 계속 쓰던 '영식님'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한글 전용으로 '한자로 된 호·지칭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영식'이나 '영애'는 호칭어가 아니라 지칭어다. 그런데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아드님'이나 '따님'으로 써도 충분하므로 오늘날 이 낱말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사전에 영식·영애와 비슷한말로 제시한 '영랑·영윤·영자·옥윤·윤군·윤옥·윤우·윤형'(영식)이나 '규애·애옥·영교·영녀·영랑·영양·영원·옥녀'(영애)도 이미 사어(死語)에 가깝다. 
 
부모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부모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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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자기 부모와 남의 부모, 살아계신 부모와 돌아가신 부모를 이르는 한자어 낱말을 가르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춘부장'이나 '자당'이란 낱말을 듣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돌아가신 부모를 이르는 말은 '선친' 정도만 간간이 쓰일 뿐이다. 결국 한글 전용이 굳어지면서 일어난 어휘의 변화다.

영부인이 의미 영역이 축소되었다면 확대된 예로 '사모님'이 있다. 원래 글자 그대로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남의 부인'이나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임새가 커진 것이다. 

'호칭'은 '옳고 그름의 문법' 아닌 '문화'

<한겨레>는 창간 무렵부터 대통령 부인의 이름 뒤에다 '여사'를 붙이는 대신 의존 명사 '-씨'를 썼다. 그러나 2017년 8월, 독자에게 "대통령 부인 존칭을 '씨'에서 '여사'로 바꿉니다"라는 알림을 내고 다른 신문과 마찬가지로 '여사'를 붙이기 시작했다. 민주적인 언어를 지향하려 한 원칙을 바꾼 것은 "독자 여러분의 요구와 질책, 시대의 흐름에 따른 대중의 언어 습관 변화 등"을 심각하게 고민한 결과라고 하면서.

'부인'과 '영부인'의 뜻이 같긴 하지만, 국가 원수의 배우자를 존중하는 뜻으로 '영부인'을 굳이 쓰겠다면 그걸 쓰지 말자고 할 일은 아니다. <한겨레>가 위 알림에서 밝힌 대로 "호칭은 옳고 그름의 '문법'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에 가깝다"라고 한 원로 국어학자의 조언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영부인, #높임말, #언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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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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