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31 06:09최종 업데이트 21.12.31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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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 연재해왔습니다. 4개월 동안 총 37화의 연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어린시절부터 성장기까지 다루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2022년 상반기 소설책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관심을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말]

   

 
소설을 소설가 혼자 쓰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얼핏 보면 그래 보인다. 이야기를 다루는 직업이 소설가 말고도 많지만, 작가의 손에서 시작해 작가의 손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장르는 소설이 유일하다. 연극과 뮤지컬, 영화와 드라마, 게임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도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가 있다. 하지만 그 장르들과 달리 소설은 배우도, 영상도, 음향도 이용할 수 없다. 보조작가도, 조연출도, 프로듀서도 없다. 오로지 혼자서, 서재의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인물을 선보이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외롭고 고단한 일이다. 이 업종에는 연공서열에 따른 예우 따위도 없다. 갓 등단한 신인이나 평생을 이 업에 종사한 원로나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


그렇지만, 나는 어떤 소설도 나 혼자서 쓴 일이 없다. 나와 함께 소설을 쓴 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었다.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저격>을 쓰는 동안은 더욱 그랬다.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 <저격>은 십 년도 훨씬 더 전부터 준비해온 장편이다. 자료를 뒤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만주와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여러 번 답사했다. 이런저런 일을 모두 내려놓고 이 소설의 집필에 온전히 매달린 지 두 해가 되었다.

한동안 다른 책을 만드느라 잠시 외출한 기간을 제외하고 매주 50매의 원고를 꼬박꼬박 썼다. 세상의 일이란 동전처럼 다 양면이 있는 것이어서 때마침 들이닥친 코로나19도 서재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며칠을 보내기도 했지만 한 달 평균 2백 장은 어김없이 썼다.

더러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홍범도와 그의 사람들이 지닌 굉장한 매혹 때문이었다.

나를 앞서 달려나가는 인물을 따라가기 버거운 날도 있었다. 그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서 자기 앞에 닥친 상황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가는 경우였다. 인물들이 이렇게 일을 잘해주는 장면을 통과할 때는, 나는 거의 거저먹었다. 그들의 생각과 선택, 행동을 부지런히 옮겨 적으면 되었다.

반대로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 나도 힘들어졌다.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맞을까? 나는 등장인물들에게 묻고 토론했다. 지금까지 쓴 원고는 내가 홍범도와 그의 주변 인물들과 매일 대화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총을 들고 싸운 기록이다. 신포수와 백무현, 백무아, 남창일, 차이경에서부터 김수협과 장진댁, 금희네, 진포, 박한과 정파총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야 할 길을 선택하고, 함께 행동했다. 이것이 소설가란 직업에 부여된 고단한 의무이자 매력이며, 소설가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나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봉건사회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나 포수가 되었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가장 오래 싸우고, 가장 크게 이겼던 홍범도와 함께 조선과 만주, 연해주, 중앙아시아의 산천을 누비고 다녔다. 나는 우리 세대가 살아보지 못한 100년 전의 비를 맞고 바람을 맛보았다.

사람들은 문장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작가로 안다. 그것은 오직 이 할만 맞는 말이다. 팔 할의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직업이 작가다.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 형상화하는 능력이 소설의 팔 할을 차지한다.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표면에 드러난 사실뿐만 아니라 이면에 감추어진 본질적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세상에는 사실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실이 있다. 그 어떤 과학이나 논리로도 증명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 어떤 진실을 다루는 것이 문학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사람 공부와 세상 공부가 늘 필요하다. 나는 그 공부의 구 할을 내가 읽은 책과 내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쌓았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과 만났던 사람들이 작가로 살아가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밑천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은 내게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참 많은 밑천을 마련해주었다. 학교 공부에 게으른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양껏 읽었다. 책을 만나기 쉽지 않은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내가 서울로 전학 와서 만난 책들은 엄청난 횡재였다. 회수권 한 개 값으로 문고본 철학책과 '세계문학전집'을 낱권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묵은 <사상계>를 한 호씩 따박따박 채워 나갈 수 있었던 청계천 헌책방은 노다지였다. 종로서적에서 살 수 있었던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와 법정, 안병무, 김동길의 에세이는 머리를 씻겨주고 심장을 뛰게 만들어 주었다.

기어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함석헌과 김동길의 강연이 열리는 종로의 기독교회관과 명동의 YWCA회관을 찾아다니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전두환 치하에서 대학과 공장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 베트남과 만주, 중앙아시아의 역사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100년도 더 전을 살았던 <저격>의 인물들에 오버랩되어 있다.

홍범도를 위대한 장군으로 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홍범도를 통해 한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새롭게 출현하고, 그 가치가 어떻게 낡은 가치를 돌파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저격>은 여러 겹의 화자가 겹쳐져 있다. 내포 작가와 내포 화자, 1인칭 서술자인 백무아와 홍범도를 통해 한 시대를 중층적으로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저격>의 형식적 1인칭 주인공은 백무아다. 홍범도는 1인칭 주인공이 아니다. 형식적 1인칭 주인공 백무아에 의해 캐스팅된 1인칭 관찰자다. 서사적 주인공은 홍범도와 함께했던 신포수와 백무현, 백무아, 남창일, 차이경, 김수협, 장진댁, 금희네, 진포, 박한, 정파총, 안국환, 태양욱... <저격>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다.

홍범도는 그들 모두를 연결해내며 그들의 비애와 희열, 도전과 좌절을 함께 겪어나가는 관찰자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인물 하나도 마네킹처럼 세워두지 않으려고 했다. 누구도 자신의 꿈과 욕망 없이 <저격>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모두를 심장이 뜨거운 인간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독자들이 만난 인물 누구 하나라도 심장이 미지근했다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홍범도 장군의 귀환에 맞춰 연재할 기회를 마련해준 오마이뉴스와 다랑어스토리, <저격>을 연재하는 동안 과분한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만주와 중앙아시아, 러시아 답사 여정을 함께 해준 박영희, 최석, 이미하일 선생께도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내년 상반기에 완성된 작품으로 인사드리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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