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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신문물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생소한 기계 앞에서 안절부절 당혹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려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근대적 시·공감각을 철도역으로 상징되는 기계들에 길들면서 느끼게 됐다. 

기차를 타려면 정해진 시간 안에 맞춰 역에 나가야 한다. 역에 나가보니 기차는 떠나고 없다. 시간 개념이 없어서다. 차츰 강박적 시간관념에 길든다. 역무원 통제에 따라야 하고, 차표를 사 개찰구를 통과하는 일은 부수적 행위다.
 
지금의 경찰청 맞은 편 이화여고 서쪽에 있었던 경인선 기점 서대문역의 1908년 모습.
▲ 최초 경성역(서대문역, 1908) 지금의 경찰청 맞은 편 이화여고 서쪽에 있었던 경인선 기점 서대문역의 1908년 모습.
ⓒ 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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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시작과 함께 제물포∼경성역(서대문역)을 잇는 42km 경인선은 걸어서 하루거리를 두 시간 거리로 바꿔 놓았다. 직선이 바탕인 철로는 쭉 뻗어 나가기만 하는 시선과 시감각을, 두 시간으로 단축되어버린 거리는 급박한 공감각을 심어놓기에 충분했다.

느긋하던 걸음이 잰걸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정해진 시각에 맞춰야 하는 강박과 빠르게 직진하며 움직이는 시·공감각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형 인간'의 탄생이다. 이 모든 게 한 공간에 응축된 철도역에서 스스로 근대형 인간으로 개조되어야 함을, 그 당시 철도를 타 본 사람이라면 다 느꼈을 것이다. 근대는 검은 연기 내뿜는 기차와 함께 참으로 잔망스럽게 찾아들었다.

뒤바뀌는 철도 기점(起點)

대한제국이 경인선을 부설하면서 의도한 종착역은 지금의 경찰청 맞은편, 이화여고 서쪽 돈의문 남쪽이다. 이곳이 본디 경성역이다. 입지는 대한제국 정궁으로 자리매김한 경운궁에 가깝고, 노면전차와 직결되어 환승 등 편리함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다.

경인선 건설 중에 일제는 노골적으로 남대문역(서울역과 염천교 사이) 부속 토지를 한성부에 요구한다. 남대문역을 철도 기점으로 삼으려는 의도다. 이는 남산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가깝고, 주로 충무로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염두에 둔 행위다.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있던 남대문정거장의 1910년 모습.
▲ 남대문정거장(역)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있던 남대문정거장의 1910년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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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를 겁박해 36.4만㎡(11만 평)를 수용(1899)하려 하자, 황실과 백성들이 들고일어난다. 지맥을 끊고 수원화성 능행 길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부지는 17.13만㎡(5만1819평)로 줄여 수용된다. 총보상비 15.3만 원마저 일제가 차관형식으로 한국 정부에 떠안긴다.

경부선 부설권을 강탈해간 일제와 그 자본가들이 설립한 경부철도(주)가 1903년 경인철도(주)와 합병하면서 남대문역을 경인·경부선의 중심역으로 삼을 의도를 드러낸다. 러일전쟁 때 체결된 '한일의정서'로 1904∼06년 남대문역 인근 광대한 토지를 헐값에 징발해간다.

서둘러 경부선이 개통(1905.01)되고, 경성역 이름을 서대문역(1905.03)으로 바꿔버린다. 용산역에 조차장을 건설(1906.11)하여 전쟁과 대륙 진출 중심 기능을 부여하고, 여객과 화물운송은 남대문역에서 분담 처리한다.

강제 병합 후 일제는 한반도 철도 운영을 남만주철도(주)에 맡긴다.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병참선 관리 차원이다. 또한 서대문역을 폐쇄(1919.03)하고 아울러 남대문역에서 연희동을 지나 경의선 수색역을 연결하는 지선을 완공(1919.06)한다. 이제 남대문역이 한반도 철도의 기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름도 경성역(1923.01)으로 바꿔 부른다.

식민 통치 축에 앉은 경성역

강제 병합 후 일제가 수립한 경성시구개수계획(1912)이 충무로 일대 일본인 거류지를 위한 것이었다면, 개정(1919)된 시구개수계획은 본격적 식민 통치 기반을 닦는 일환이었다.

식민 지배 5주년 기념으로 경복궁 전각을 헐고 벌인 '조선물산공진회'는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에 짓기 위한 사전포석이다. 아울러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길(태평로, 1914년 전에 폭 27m)을 경성 상징 가로로 만들어 식민 통치의 권위를 드러내자는 복선이 깔려 있었다.

총독부(1916년 착공)∼경성부청(1923년 부지확보)∼철도 호텔(1914)∼조선은행(1912)∼조선신궁∼경성역을 잇는 식민 도시 경성의 통치 축이 이때 같이 구상되었다는 추측은 그래서 매우 타당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들이 1920년대 중반까지 순차적으로 벌어진다.
 
옛 서울역 역사의 모체로 평가받는 스위스 루체른 역의 모습. 1896년 지어져 사용되다 1971년 화재로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음.
▲ 스위스 루체른 역 옛 서울역 역사의 모체로 평가받는 스위스 루체른 역의 모습. 1896년 지어져 사용되다 1971년 화재로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음.
ⓒ 이영천(문화역서울284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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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驛舍) 건설은 철도 운영 주체인 남만주철도(주)가 맡는다. 경성역 설계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동경대 교수인 츠카모토 야스시가 소장한 입면도 등으로 그가 관여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정도다.

경성역은 알려진 대로 동경역이나 암스테르담역, 헬싱키 중앙역을 모방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스위스 '루체른역(1896년 건립되어 1971년 소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일제 남만주철도(주)가 195만원을 들여 3년 간 공사 끝에 1925년 10월 완공한 경성역.
▲ 경성역(1929) 일제 남만주철도(주)가 195만원을 들여 3년 간 공사 끝에 1925년 10월 완공한 경성역.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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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다. 외벽을 붉은 타일과 화강석, 인조석 등으로 마감했으나, 지금은 붉은 회벽으로 바뀌어 있다. 바로크와 르네상스풍을 혼합한 외관에 중앙에 4각 돔을 얹었으며, 균형 잡힌 좌우대칭에 권위적인 평면 구성이다.
 
1, 2층 통층인 출발역대합실 내부 모습. 인조석으로 추정되는 돌기둥이 인상적임. 앞뒤 아치 창과 천장 돔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으나, 천장은 태극문양 스태인드글라스로 변형.
▲ 출발역대합실 1, 2층 통층인 출발역대합실 내부 모습. 인조석으로 추정되는 돌기둥이 인상적임. 앞뒤 아치 창과 천장 돔에서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으나, 천장은 태극문양 스태인드글라스로 변형.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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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을 구분하는 화강석 띠 장식은 철도 이미지에 어울리게 직선으로 처리하였다. 애초부터 역 전면에 대형시계를 두어, 근대의 표징인 시간관념을 강박한다. 1, 2층 통층인 출발대합실은 3면에서 빛이 들어오게 설계하였으나, 천장은 태극 문양 스테인드글라스로 대체되었다.
 
역사 2층에 당시 한끼 식사비용 3원 20전 하던 최고급 양식당 '그릴' 자리. 내부모습 등은 완공 당시와 큰 변화가 없음.
▲ 옛 양식당 그릴 역사 2층에 당시 한끼 식사비용 3원 20전 하던 최고급 양식당 "그릴" 자리. 내부모습 등은 완공 당시와 큰 변화가 없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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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광장에서 보면 2층이고, 선로에서 보면 3층이다. 지하는 역무실, 1층은 출발대합실과 사무공간이고, 2층엔 당시 장안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양식당(그릴)과 다실(티-타임), 귀빈실과 이발소 등이 있었다.

양식당 그릴에서 한 끼 식사는 3원 20전이었다. 쌀 한 말이 70∼80전 하던 시절이니, 이 식당을 이용한 부류가 누구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식민 지배 일본인 관료는 물론이고 이완용보다 더 심한 친일파였다는 윤택영 같은 매국노들이다.

공사 기간 2년으로 착공(1922.06)하였으나, 관동대지진(1923.09)으로 공사비 삭감과 공기 연장이 불가피했다. 초호화판으로 준공(1925.09.30)된 역사에는 승강설비 및 스팀 장치, 벽난로까지 갖추고 있었다.

오래된 낯선 공간
 
지금은 문화역서울284 공간으로 사용 중인 옛 역사와 광장 앞에 선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 옛 서울역 역사와 강우규 의사 지금은 문화역서울284 공간으로 사용 중인 옛 역사와 광장 앞에 선 왈우 강우규 의사 동상.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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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역사 앞에 주먹을 불끈 쥐고 오른손에 수류탄을 든 결연한 표정의 동상 하나가 서 있다. 왈우 강우규 의사다. 연해주 부근에 망명하여 독립을 도모하던 강 의사는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해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7월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을 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을 거쳐 8월 서울에 잠입한다.

9월 2일 사이토 총독이 남대문역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신문기자와 수행원, 일본 경찰 등 37명 사상자를 내고 총독은 화를 면한다. 수류탄이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 탓이다. 거사 뒤 현장을 빠져나와 여기저기 피신 다니다, 9월 17일 일제 앞잡이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1920.11.29.)당한다. 의사 나이 65세다.

일제 강점기 경성역에서 남쪽으론 쌀과 수탈된 원료가 실려 나갔고, 북쪽으론 수많은 무기와 군인, 군수품이 실려 갔다. 부산으로 끌려간 나라 잃은 황실 가족이 볼모로 배를 타야 했고, 일본에 공부하러 간 수많은 유학생이 대한해협을 건넜다. 신의주 향해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려는 수많은 지사가 경성역을 출발했고,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만주에서 땅을 일구려 맨몸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이 끝나자 모든 사람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배곯는 가난 때문에, 혹은 공부하러 또는 일자리 찾아 무작정 기차를 타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그때마다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 황량한 서울역(1947년 되찾은 이름) 광장이었고, 그곳에서 마주한 낯섦에 무척 당혹스러워한다. 촌뜨기로 혹은 공돌이·공순이로 천대받으며 살아내야만 했던 강퍅한 시공간에서 눈빛보다 마음이 먼저 떨리고 움츠러들게 만들던 오래된 공간이다.

한반도를 전쟁 전진기지 삼아 만주와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거쳐 유럽에 닿으려 일제가 도발적으로 만들어낸 국제기차역 서울역. 이제 오롯이 우리 몫이다. 그러나 70년 넘게 끊어진 허리는 여태 그대로여서, 대륙을 향하도록 기획된 서울역 유전자는 고사 직전이다.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를 고속으로 연결하는 철도(GTX-A선)가 공사 중인 옛 서울역 역사 앞은 여전히 분주함.
▲ 옛 서울역 역사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를 고속으로 연결하는 철도(GTX-A선)가 공사 중인 옛 서울역 역사 앞은 여전히 분주함.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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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이 이식시킨 시·공간감이 자라나 모든 게 빛의 속도로 소비되는 초고속사회를 잉태시켰다. 이식된 근대공간에서 우리가 극복해 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찾고 이어가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시끄러운 굉음으로 또 다른 고속철(GTX)을 공사 중인 서울역 광장에서 새삼 한다.

태그:#경의_경부선, #왈우_강우규, #남대문역_서울역, #식민통치공간, #경성역-서대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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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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