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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변 바닷가를 걷는다. 겨울 햇살이 포근하고 바람은 거칠지 않아 감미롭다. 지난 한 달 동안 거닐던 바닷가가 어느새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검은 바위와 굴곡진 해안선, 바위 절벽을 매섭게 때리던 바람과 파도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오늘은 모든 게 평온하기만 하다.

해가 바뀌고 1월 3일, 제주살이 30일째다. 한 달이 쏜살같이 흘렀다. 제주 한 달 살기 일주일을 남기고는 연말연시를 틈타 친구들 두 팀이 다녀가고, 지난 봄에 결혼한 큰아들 부부가 다녀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으나,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유지하던 생활의 리듬이 깨져 조금 아쉽다.

전에는 제주도에 여행 오면 관광지 몇 곳만 대충 둘러보고 돌아가곤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제주도 곳곳에 깊숙이 들어가 낱낱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내와 함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한 해를 같이 보내고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와 함께 해준 좋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더없이 고맙다.
 
바람과 파도로 성난 바다는 간데없고, 그지없이 평온한 바다가 그림같다.
▲ 제주 겨울바다 풍경 바람과 파도로 성난 바다는 간데없고, 그지없이 평온한 바다가 그림같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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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많은 영광과 보람, 시련과 역경 속에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낙오되지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와 준 내가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군대 전역 후 젊은 패기로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하고 다시 시작한 직장에서 30년을 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마음에 등불 하나 켜고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우리는 누구도 영원히 살지 못하며, 또 무엇 하나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 욕심을 부리면 살아왔는지, 가슴을 치면서도 그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무책임한 방관이다. 그동안 삶을 방치하며 방관자로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다.

늘 비어있는 마음 한구석을 채우려고 무언가를 갈망하고 쫓아왔는데 그 무엇 하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너무 크고 빛나는 것만을 바라지 않았는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지를 들고 허상과 미망에 빠져 헤맨 것은 아닌지 후회스럽다.

이제는 내가 지금 여기서 존재적 가치를 찾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일상에 변화의 물감을 입히며, 그 색감에 맞춰 조화롭게 살고 싶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위해 벌여야 했던 분투, 뜻을 이루지 못해 맞게 되는 분노와 좌절, 어떤 조직에서나 겪는 동료들과의 갈등, 이런 것들이 쌓여 스트레스가 되고 결국은 건강까지 망가트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무수히 봐왔다.

그러면서도 나도 그것을 답습하는 바보 같은 짓을 퇴직하는 날까지 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와서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했을 것이다. 다만 감정이나 보폭을 조절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곤 하지 않았나 후회된다.
 
제주 애월 그지없이 평화로운 바다와 오렌지색 석양이 조화롭다.
▲ 제주 애월바다  제주 애월 그지없이 평화로운 바다와 오렌지색 석양이 조화롭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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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그래왔듯이 정년퇴직을 앞둔 지난 한 해도 참 열심히 살았다. 코로나 상황이 엄혹한데도 지지난해 작은아들에 이어 큰아들이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그 와중에 기사 자격증 하나를 취득했다. 내가 절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동안 가슴에 묻어뒀던 작가로의 꿈을 이뤘다. 문단을 통해 정식으로 수필가로 등단한 것이다.

학창 시절 문예지를 애독하고 신문과 잡지에 글을 투고하며 문학청년으로서의 꿈을 키우던 열정의 시절도 있었는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형화된 보고서와 앞만 보고 달리는 고단한 밥벌이에 절어 꿈을 유폐시키고 말았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세월 속에서 꿈은 그렇게 산화되고 부식되었을 것이다. 직장이라는 톱니바퀴를 벗어나니 마음의 틈에서 잠들어 있던 꿈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늘 가슴을 억누르던 소중한 꿈이었다.

바다 멀리 구름으로 수놓은 서쪽 하늘이 언뜻언뜻 비추며 오렌지색으로 사선을 그으며 물들어간다. 한 달 동안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이곳에서 품은 마음으로, 이곳에서 살던 모습으로, 여유롭고 편하고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하고 싶던 공부도 좀 하고, 좋아해서 시작한 수채화와 서툰 하모니카도 틈틈이 즐기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남은 내 삶을 지탱해 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 소중한 것들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며 살 것이다.

태그:#겨울바다, #제주 애월, #제주 한달살기, #제주여행, #오렌지색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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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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