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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지은 '경성감옥'의 내부모습
▲ 일제가 지은 "경성감옥"의 내부모습 일제가 지은 "경성감옥"의 내부모습
ⓒ 박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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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은 1921년 11월 4일 마포경성감옥에서 출감하였다.

2년형의 만기 출감이었다. 1919년 3월 1일 구속되었으니 실제로는 2년 8개월 만이다. 혹독한 고문으로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3ㆍ1혁명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경성감옥에서는 민족지사들의 주도로 옥중만세 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정오가 되자 3ㆍ1혁명의 수인(囚人)들은 물론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일반 기결수들까지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1천 7백여 명이 부르는 만세소리가 이웃 공덕동 일대에 번져 마을주민들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으로 이갑성ㆍ오화영 두 사람이 벌감에 갇히고 박동완 등 민족지사들은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박동완이 석방될 때 이승훈 등은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었다. 형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년 쯤 더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경성감옥에는 2백 명이 넘는 이른바 정치범이 갇혀 있었다. 그는 이들을 두고 출옥하는 심사가 결코 편치 않았다.

지금 조선의 각처 감옥에는 만 명이 넘는 사람이 갇혀 있고 내가 있던 경성감옥만 보아도 여러 해의 징역 선고를 받은 사람이 이천 명이나 되고 그 중에 정치범만 해도 경성감옥에 이백 명이나 되며, 각처의 감옥을 합치면 또한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많은 동포형제가 현재의 감옥제도 아래에서 낮으로 밤으로 얼마나 고통에 신음하는지 생각하면 실로 뼈가 저린 일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약간이나마 그 고통을 줄일 수가 있다면 이많은 동포에게는 실로 작지 않은 행복이 될 것이라. (주석 5)
 
17인 만기출옥(동아일보, 1921.11.5)
 17인 만기출옥(동아일보, 1921.11.5)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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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바른 팔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필도 어려웠다.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부모의 유산으로 받았던 부동산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올린 경매로 헐값에 매각되어 경제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물적기반을 옭죄었다. 

출감 후 '민족대표'의 위상은 처신이 쉽지 않았다.

국민들은 여전히 외경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총독부는 '불령선인'으로 낙인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만큼 행동거지에 조신해야 하고, 언행에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힘든 삶이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설움과 아픔을 다독이며 미완으로 끝난 3ㆍ1혁명의 역사를 곱씹으면서 신앙심으로 버티었다. 

출옥 후 6개월 쯤 지난 1922년 4월 <기독신보>에 복귀하였다. 전임 주필 최상현의 사임으로 다시 편집인이 되어 제작과 경영의 책임을 맡았다. 총독부의 간섭과 감시가 갈수록 심해져서 견디기 어려웠다. 33인 민족대표들은 그들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 무렵 국내 유일한 민족자본 출판사인 조선기독교 창문사에서 발간하는 잡지 <신생명(新生命)>이 경영이 어려움에 빠지자 박동완은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잡지는 1923년 7월 16일 창간되었다.

기독교 창문사는 1921년 8월 31일 윤치호, 이상재, 유성준, 이승훈, 김석태, 박승봉, 최병헌, 김백원 등 당시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유력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주식회사 광문사(廣文社)를 창설한 바 있었는데 그것을 1923년 1월 30일에 기독교 창문사로 명칭을 바꾸고 사장 이상재, 전무 박봉서가 취임하면서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월간 <신생명>지였다.

그러므로 당시 하나밖에 없던 한국 선교사회(현 대한기독교서회)가 선교사들의 재정으로 주로 선교사들의 글을 펴내는데 반해 기독교 창문사는 한국인의 재력과 글로 문서선교 운동을 펴보자는 정신으로 한국인들이 세운 출판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면도 당시로서는 124면이라는 파격적인 지면에 일찍이 <창조> 동인으로 신문학 도입에 앞장선 소설가 전영택을 주간으로 하고 역시 당시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채필근, 송창근, 임영빈, 방민근, 최상현, 이은상, 김필수 등이 필진이 되어 종교, 철학, 문학 등의 무게있는 글을 발표하고 있었다. (주석 6) 

그는 비교적 안정된 <기독신보>를 떠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신생명>을 살리고자 주간을 맡았다. 창간 후 1년이 지나 <신생명>은 전영택이 편집 겸 주간의 자리를 떠나고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박동완을 초청한 것이다.

<신생명> 제5호(1923년 11월 발행)는 경찰에 의해 발매금지되고, 제10호 (1924년 4월호)에 전영택이 기고한 글에 삭제를 요구했다.

"우리는 죽으려하는 조상나라를 위하여 붙들고 울고 부르짖고 있을 따름이외다.(…) 조선을 위하여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30만의 소리가 신생명이외다." 라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창문사에서 발간된 <신생명>은 소설가 전영택이 주간으로 있으면서 종교, 철학, 문학 등의 글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은 <신생명>의 지면을 통해 글을 발표하였다. 박동완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槿), 근곡(槿谷), 근생(槿生), 근곡생(槿谷生) 등의 필명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종교와 우리의 사명>, <나의 맞고자 하는 예수> 등의 글을 발표했다. 또한 높은 수준의 영어 실력을 근간으로 <영혼의 경매>라는 제목의 번역물을 연재하거나 <신을 사랑하여>라는 번역시를 발표하였다. <기독신보>에서 주필로 활동하면서도 <신생명>에 자신의 글을 틈틈이 발표하였다. (주석 7)


주석
5> 이승훈, <감옥에 대한 나의 주문>, <동아일보>, 1922년 7월 29일.
6> 윤춘병, 앞의 책, 146쪽.
7>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1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동완, #민족대표_33인, #박동완평전, #근곡_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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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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