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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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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국에 많다. 대흥사에 있는 대웅보전 편액도 그중 하나. 신지중학교 담벼락에는 원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대부분 표현했다. 거기에 더해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원교의 후예들의 작품도 새겨져 있으니 의미있는 일이다.

답사문화가 성행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원교의 글씨라면 모두가 생소했다. 그런데 원교의 글씨와 관련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 이야기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타지역에서 원교 이야기가 더 많이 활용된다.

관광해설사의 입담을 통해 또는 인문학 강의에서 이미 원교 이야기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교양과목처럼 인문분야의 한 맥을 이룬다. 예술가들도 원교의 사상을 창의적이고 매력적인 소재로 여기고 있다. 놀라운 것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내용을 토대로 원교가 걸어간 길을 만들어 관광 자원화하는 지자체도 있다. 얼마나 사무치길래 사람들은 원교 이광사의 정신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일까.

변화의 바람은 어느 시대나 필요하다 

18세기 조선 사회.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의 고유색을 한껏 드러냈다. 진경시대(眞景時代)라고 할 만큼 문화의 비약적 발전을 이룬 이때는 성리학이 조선의 고유 이념으로 뿌리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우리 문화 우수성의 인식은 조선이 중심이라는 조선 중화의식을 표방했던 것.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성립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문화의 자존감과 우수성 인식은 글씨에서 동국진체로 발현했다.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가 시작했고 원교가 완성했으며 전주의 창암 이삼만에 의해서 꽃피웠다고 한다. 옥동 이서는 필결(筆訣)을 저술하여 <동국진체>를 창시했다. 필결은 조선 최초의 서론으로 글씨의 획에 음양오행 등 주역의 이치가 있음을 설명했다. 그는 왕희지의 악의론을 독실히 연마하여 해서·행서·초서에서 자가체를 확립했는데, 이것을 옥동체나 동국진체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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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는 서결(書訣)의 전편과 후편을 서술했다. 이광사는 왕희지와 위부인(衛夫人)의 서론만이 법식으로 삼을만하다고 하여 그들의 서론에 기반을 두고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서결을 서술했다.

그는 왕희지의 진적에 위작을 진본으로 믿고, 이를 해서의 근본으로 삼아 서법 수련을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 고유색을 강조했다. 18세기 조선 사회는 새로운 사상과 전문가의 활동이 전개되었고, 그 중심에 조선의 글씨 동국진체와 사상가들이 있었다.

원교 문화의 거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일본의 나오시마는 한때 철광산업을 하던 곳. 섬 주민이 50명 정도 남을 만큼 폐허가 된 섬이었다. 그런데 한 기업가가 그곳에 미술관을 짓고 예술섬으로 만들었다. 이후, 전 세계의 수많은 예술가와 행정가들이 찾아오는 꿈의 섬이 됐다.

일본의 예술 섬 탄생은 문화기획가들에게 있어서 정석적인 사례로 통한다. 그것이 성공적인 모델이 되어 각 지자체가 미술관 사업에 눈을 돌렸고, 문화예술의 바탕이 감성여행의 중심역할을 하게 됐다. 관광 상품을 새로운 산업 중심으로 이끄는 지자체가 여전히 미술관 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는 추세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꾸준히 문화예술적인 요소를 추구한다. 문화예술이 살아있는 지역은 관광자원이 풍성해졌고 끊임없는 지역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것은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 자연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이끈다. 나오시마 예술섬의 사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과 투자가 있어 가능했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엔 세계적인 문화예술관광의 핵심이 됐다. 

매년 목포와 진도가 선정되어 수묵비엔날레가 열린다. 목포가 예향의 도시로 급부상한 것은 목포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힘이 컸다.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의 자손인 남농 허건의 영향이 있었다. 지금은 해남에서도 진도가 선정된 그것처럼 행사를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다. 여러 해 지역의 예술인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지역사회에 그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완도 신지도에도 수묵비엔날레가 열릴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품어 봄직하다. 

문화예술 여행객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신지도를 예술관광 메카로 만들면 그러한 관광객들이 신지도로 올 것이다. 수묵비엔날레 관람을 위해 이웃 동네에서 열리는 길 위의 인문학 팀을 따라나선 적이 있다. 거기에서 미술관을 담당하는 전문 큐레이터와 종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문화예술적 자산이 너무도 많은 자신의 지역을 예술관광 메카로 부각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해마다 많은 사람이 해외로 예술관광을 떠나는데, 자신이 사는 지역에 내려와 살다 보니 문화예술적 자산이 너무도 많았다며, 그 자산을 활용해  3년간 수묵비엔날레와 연계한 수묵기행을 이어왔다"고 전했다.

그는 수묵비엔날레를 이용해 세계의 많은 큐레이터를 지역으로 오게 하고, 그들이 돌아가 소문을 내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했다. 이 모든 대화를 이웃 동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신지도에도 적용되어야 할 사항임을 느낄 수 있었다. 

5년이 지난 지금 곳곳에 산재한 문화예술의 영역인 지역의 이야기 발굴과 지역사회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열정이 샘솟고 있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며 지역의 자산이 된 것이다. 

원교 이광사 신지도에 다시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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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만 몰려 있던 학풍이 주를 이루던 조선사회에 지방에서의 새로운 학풍이 세상을 뒤흔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싹트게 한 곳이 바로 유배지였다. 이런 사상을 받들어 신지도에서 완도지역의 항일정신이 싹틀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라는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원교 이광사 적거지는 신지도 금곡마을에 있다. 푯말 하나 없이 폐허로 남아 인적 드문 곳을 새롭게 단장했다. 원교 이광사 문화의 거리는 일반인의 접근성을 위해 신지면 소재지에 형성했다. 

누구나 찾아오기를 원하는 지역 사람들의 바람이 있었다. 이곳 역시 지역 예술인들의 참여로 다양하고 의미있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함을 새삼 느낀다. 원교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원교 이광사를 기억하고 그의 사상을 전하는 후예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그 삭막한 유배지에서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변화의 바람은 불어올 것이다. 막막한 세상의 바닥까지 가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곳에서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힘든 세상 오롯이 견디며 살다 간 원교 이광사의 정신이 신지도에 여전히 남아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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