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중반까지 안성기와 박중훈이라는 '양대산맥'에게 의존하던 한국 영화계는 90년대 후반부터 송강호와 최민식, 설경구 같은 연극배우 출신들이 대거 영화로 유입되면서 배우의 인재풀이 다양해졌다. 연극배우 출신들이 영화 쪽에서 대거 성공사례를 만들어내자 연극 또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많은 연기자 지망생 및 배우 유망주들이 영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승우였다. 계원예고와 단국대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며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던 조승우는 1999년 거장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오디션에서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이몽룡 역에 캐스팅됐다. 이후 초승우는 <와니와 준하>,<후아유>를 거쳐 2003년 손예진과 절절한 멜로연기를 선보였던 <클래식>을 통해 200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멜로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시절 조승우는 '충무로 최고 유망주'라는 타이틀을 오롯이 혼자 누리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연극 <청춘예찬>을 통해 주목 받다가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 출연하며 무려 8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쓸었던 '괴물신인' 박해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일 역시 조승우 못지 않게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관객들이 가장 좋아했던 박해일의 캐릭터 중 하나는 영화 <인어공주>의 순박한 집배원 청년이었다.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직 멜로왕자

박해일은 안성기, 송강호 등과 함께 드라마 외도 한 번 없이 '영화 외길인생'을 걸은 배우 중 한 명이다.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얼의 아역을 연기하며 영화에 데뷔한 박해일은 <질투는 나의 힘>으로 주목 받은 후 <국화꽃 향기>에서 고 장진영과 애절한 멜로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에서 3번째 용의자 박현규를 연기하며 연기변신을 시도한 박해일은 2004년 <인어공주>를 통해 다시 여성관객들을 설레게 한 멜로왕자로 돌아왔다. 

<인어공주>에서 고두심과 전도연이 2인1역을 소화한 조연순의 남편 김진국의 청년 시절을 연기한 박해일은 순박하고 친절한 우체국 직원 연기를 통해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실 <인어공주>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파이더2>와 <슈렉2>에 밀려 전국66만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인어공주>는 N포털사이트 평점이 8.94에 달할 정도로 흥행성적에 비해 관객 만족도가 높은 영화였다.

<국화꽃 향기>와 <인어공주>를 통해 젊은 멜로 전문배우로 떠올랐지만 박해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박해일은 <연애의 목적>에서 양아치 변태교사, <괴물>에서 운동권 출신의 취준생, <극락도 살인사건>에서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보건소장, <이끼>에서 집요한 성격으로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인물을 연기하며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했다. <은교>와 <덕혜옹주>에서는 노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연기에 대한 실험 및 도전정신이 뛰어난 박해일은 1~2년에 한 편씩 꾸준히 히트작을 내던 2000년대에 비해 최근에는 히트작이 나오는 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박해일에게는 '히든카드'가 남아 있다. 박해일은 <명량>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젊은 시절의 이순신을 연기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박해일은 김한민 감독이 연출한 <극락도 살인사건>과 <최종병기 활>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바 있다).

전도연의 1인2역과 박해일의 청량한 연기
   
사실 <인어공주>는 박해일보다는 '전도연의 영화'에 가깝다. 전도연은 <인어공주>에서 젊은 시절의 조연순과 그녀의 딸 김나영을 연기하는 1인2역을 소화했다. 

하지만 전도연의 연기는 옆에서 그녀의 화려한 개인기(?)를 잘 받쳐 준 박해일의 뛰어난 호흡이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사실 어린 나이부터 해녀 일을 하느라 학교를 다니기는커녕 글을 배울 시간조차 없었던 연순에게 진국(박해일 분)은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로 보였을 것이다. 관객들이 폭소를 터트렸던 "오라이~~" 장면에서도 유일하게 스크린 속 연순은 웃음기 없이 진국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연순에게 열심히 한글을 가르치던 진국은 육지로 전근발령이 나고 연순에게 공책과 필기구 세트를 선물하며 힘들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에 충격을 받은 연순은 물질을 하다가 의식을 잃어 동료 해녀들에 의해 구출된 후 한참을 앓아눕는다. 진국은 육지로 떠나기 전날 밤 바닷가에서 물을 길어 후들거리는 몸을 붙잡고 연순을 위해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나영에게 연순을 부탁하며 제주도를 떠난다.

< 공동경비구역 JSA >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한 장의 사진으로 영화의 엔딩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인어공주> 역시 연순이 사는 마을 사람들이 찍은 단체사진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당시 진국은 자전거를 끌고 그 길을 지나가다가 버스 뒤쪽에서 사진을 찍는다. 이 사실을 기억해내는 현재의 연순(고두심 분)이 지긋이 웃으며 진국을 떠올리는 <인어공주>의 엔딩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인어공주>를 연출한 박흥식 감독은 2000년 전도연, 설경구 주연의 멜로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인어공주> 역시 많은 호평 속에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2015년 11년 만에 선보인 신작 <협녀, 칼의 기억>이 43만 관객에 그치며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고 2016년 <헤어화> 역시 전국 48만 관객으로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연기대상 6회 대배우의 억척스러운 연기
   
고두심 배우는 지상파 3사에서 6번의 연기대상과 1993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수상했던 레전드 연기자다. 50대 이후에는 각종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을 맡는 경우가 있다 해도 전설적인 연기자인 고두심 배우를 분량도 썩 많지 않은 장년의 조연순 역에 캐스팅한 것은 박흥식 감독과 <인어공주> 제작진에겐 큰 행운이었다.

고두심 배우는 욕을 입에 달고 아무데서나 침을 뱉는 버릇이 있으며 남이 버린 옛날 물건을 챙기는 것을 좋아하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조연순을 연기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 진국(김봉근 분)을 구박하곤 하지만 진국이 두 사람의 추억이 있는 제주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뒤를 따라 제주로 내려온다. 비중은 썩 크지 않았지만 고두심 배우의 존재감이 있었기에 <인어공주> 속 조연순 캐릭터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인어공주>에는 오늘날 주인공 박해일 만큼 유명해진 배우 이선균이 나영과 결혼을 약속한 도현 역으로 출연했다. 어머니의 옛날 앨범을 보며 연순과 나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예비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제주행 배를 타는 착한 사위 역할이다.

<인어공주>의 진정한 신스틸러는 연순의 동생 조영호를 연기한 아역배우 강동우였다. <인어공주> 이후엔 단역으로 출연했던 <백만장자의 첫사랑>을 제외하면 배우 활동이 없을 정도로 활동이 짧았지만 뛰어난 감초연기를 통해 영화 속 많은 웃음지분을 책임졌다. 조영호의 성인 역할은 배우 이한위가 맡았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조카인 나영에게 부동산 투자를 권하는 등 여전히 허풍 가득한 캐릭터로 웃음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