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9 06:02최종 업데이트 22.01.1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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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에서 일해공원 명칭을 바꾸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생명의 숲 되찾기 합천군민운동본부'가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 명칭을 바꿔달라고 제기한 주민청원을 놓고 합천군이 오는 21일 지명위원회를 연다.

합천읍 합천리에 소재한 일해공원은 약 65억 원을 들인 공사 끝에 2004년에 '새천년 생명의 숲 공원'이란 이름으로 개장됐다. 이랬던 곳이 3년 뒤 '합천군을 널리 알린다'는 명분하에 전두환 아호를 딴 일해공원으로 바뀌었다.
 

경남 합천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아호를 딴 '일해공원'. ⓒ 윤성효

 
3.1운동과 전두환

1919년 3·1운동 당시 경남에서는 21개 군 전체가 반일 시위에 동참했다. 3월 3일 부산·마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이후, 마지막 시위로 추정되는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 시장 시위 때까지 격렬한 항일운동이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이 일본군 총격으로 쓰러졌다.


합천군은 창원·진주 등과 더불어 경남 도내에서 시위가 가장 격했던 곳이다. 3월 18일부터 4월 말까지 계속된 시위로 일본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7명과 부상자 36명이 발생했다. 윤병석 전 인하대 교수의 <3·1운동사>는 "일군의 무차별 사격과 다수인의 검거로 격앙된 시위 군중은 각 관공서를 부수고 문서를 소각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의 사태를 빚었다"고 합천군 시위 양상을 묘사한다.

그처럼 숭고한 합천군 3·1운동을 기리고자 세워진 조형물이 일해공원 내의 3·1독립운동기념탑이다. 일제 총칼에 맞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거룩한 사건을 기념하는 탑이 학살자 전두환의 아호를 딴 공원 내에 있는 현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힘들다.

그 기념탑 옆에 커다란 종이 매달린 대종각이 있다. 전두환 사망 다음 날인 작년 11월 24일 벌어진 장면과 관련해 그날 발행된 <오마이뉴스> 기사 '전두환 분향소, 고향 합천 일해공원에 무단 설치돼'(http://omn.kr/1w5f6)는 "완산 전씨 문중은 24일 아침 일해공원 대종각 주변에 분향소를 설치했다"며 "분향소에는 전두환씨 영정 사진과 함께 조화가 놓였다"고 보도했다.
 

전두환씨 문중에서 합천 일해공원에 설치한 분향소. ⓒ 윤성효

  
바로 그 "대종각 주변"이 3·1독립운동기념탑 앞이다. 기사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기념탑 앞에 분향소가 차려지고 그 안에 전두환 영정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을 생각하며 고개 숙여야 할 장소에서 전두환을 위해 고개 숙이도록 해놓았던 것이다. 3·1운동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일해'에 담긴 의미

'일해'라는 명칭에 담긴 전두환의 구상을 생각해보면, 전두환 고향을 포함한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전두환과 관련해 이 글자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 조형물이 있는 공원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국민적 시선이 쏠린 자리에서 일해에 담긴 의미를 해설한 인물이 있다. 1988년 11월 8일 국회 5공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순달 전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이 바로 그다. 1983년부터 2년간 이사장으로 근무한 그는 전두환의 대구공업중학교(훗날의 대구공고) 3년 선배다.

이날 청문회 상황이 수록된 '국회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김영삼이 총재인 통일민주당의 김동규 의원이 "일해재단의 일해라는 명칭은 전두환씨의 아호를 인용했다고 하는데 일해라는 아호는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최순달은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며 "태양과 같이 온 세계를 비추고 또 바다와 같이 모든 만물을 받아들이는 뜻에서 일해"라고 답했다.

전두환은 퇴임 뒤에도 세계를 비추고 만물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7년 단임제를 공약하기는 했지만 퇴임 후에도 상왕 역할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 희망을 실현시키고자 지식인들을 비롯한 각계각층도 모으고 재벌들이 기부한 대규모 자금도 저장해둘 수 있는 일해재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소망은 일해재단과 관련된 물리적 장치들에서도 확인된다. 일해재단은 대통령이 이용하는 서울공항과 가깝다. 최순달과 함께 출석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2~3킬로미터 되는 것 같다"고 발언했다. 일해재단 자리에 있는 세종연구소에서 서울공항까지의 이동 거리는 구글 지도로 검색하면 23분이다.

그런 곳에 청와대에나 어울리는 제2영빈관이 설치됐다. 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기증한 봉황 무늬 선물도 거기로 옮겨졌다. 전두환이 전용으로 쓸 사우나 시설과 테니스장도 조성됐다. '제2의 청와대', '전두환 전용'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제2영빈관

일해재단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안현태는 전두환이 퇴임 뒤 일해재단을 근거로 활동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안현태는 이곳이 세계 주요 지도자들이 자주 방문하게 될 곳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나카소네, 레이건 등과의 친분 관계로 보아 그런 분이 수시로 초청될 수 있고 경호 상 영빈관에 하루 정도 같이 유하면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이 퇴임 이후를 이처럼 철저히 대비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 역시 그가 퇴임 후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리라 기대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때 미국 재무장관을 전두환의 연희동 자택에 파견한 것도 그런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됐다.

1993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 7면은 "미국의 베이커 재무장관은 (노태우) 취임식 후 연희동으로 전 대통령을 방문, 레이건 대통령의 공식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며 "미국이 예우를 갖춰 퇴임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그가 앞으로도 영향력을 유지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이 7년 단임에 만족하지 않을 거라고 미국이 판단한 것은 일해재단과 더불어 현행 헌법 제90조 때문이었다. 1987년 10월 29일 공포된 현행 헌법의 제90조에는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 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제1항),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제2항)는 조문이 있다.

전두환이 퇴임 뒤 성남시 일해재단에 앉아 서울시 청와대를 조종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까지 만들어뒀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새로 취임할 노태우뿐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새로 취임할' 전두환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행 헌법이 공포된 시점은 1987년 6월 항쟁 4개월 뒤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민주화 열기가 강했던 시기에 말도 안 되는 이 같은 조항이 법률도 아닌 헌법에 규정된 것은 전두환 측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퇴임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댄 결과이기도 했다.
 

생명의숲 되찾기 합천군민운동본부는 12월 6일 오전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 "일해공원 명칭 변경을 위한 공원지명 제정 주민발의를 한다"고 했다. ⓒ 윤성효

 
전두환의 상왕 플랜, 헌법 제90조

김대중·김영삼과 김종필이 이끄는 야당들뿐 아니라 노태우가 새로 이끌게 된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내보내기 위해 만든 '헌법 전두환 조항'이 바로 제90조였다. 위 <경향신문>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아래의 괄호 속 내용도 신문에 실린 그대로다.
 
혹시 퇴임을 거부할지도 모르는 전 대통령(당시까지만 해도 전 대통령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에게 퇴임 후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권교체를 담보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정치권에 깔려 있었다. 이에 따라 여야는 청와대 측이 요청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헌법에 명시했다.
 
전두환은 퇴임 뒤에 상왕이 되고자 원로자문회의 설치를 요구했고, 여야 정치권은 그런 심리를 역이용해 그를 진짜로 퇴임시키고자 제90조를 삽입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이 자기 꾀에 넘어간 측면도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5·18 학살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임시정부 성격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킴으로써 사실상의 집권인 제1기 집권에 성공하고, 동년 9월 1일 제4공화국 유신체제 하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2기 집권을 이루고, 제5공화국 헌법 발효 이후인 1981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기 집권을 이뤘다.

이랬던 그는 퇴임일인 1988년 2월 25일부터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서 상왕에 오르고자 했다. 실질적인 집권인 제4기 집권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일해재단과 원로자문회의에 기초한 전두환의 상왕 플랜은 그의 제4기 집권을 위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퇴임 뒤 전두환의 상왕 구상을 누구보다 적극 훼방하게 될 노태우도 한동안은 전두환의 일해재단 구상에 협조하는 듯 행동했다. 이렇게 여야 정치권이 합심해서 자신의 상왕 구상에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청와대를 떠나는 날에도 전두환은 섭섭하거나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 인용된 채문식 전 민정당 대표위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청와대를 나설 때도 기분이 좋아 보였을 뿐 아니라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랬다고 한다. 연희동 주민들과 막걸리를 마실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주민들과의 술자리가 파한 뒤에는, 차를 마시면서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아니고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좀 강화시켜 국정의 어려운 일들에 대해 뒤에서 봐주려 한다"며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 안에 세워져 있는 전두환 동상. 목 부위가 파손되어 있다. ⓒ 연합뉴스

 
그가 얼굴 표정으로 뿐 아니라 구두 발언을 통해서도 퇴임 이후를 자신한 것은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일해재단이라는 물적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퇴임 뒤에도 "태양과 같이 온 세계를 비추고 또 바다와 같이 모든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일해 이념'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이 사용한 일해라는 글자에는 위험한 학살자의 '희망사항'이 담겨 있다. 그런 명칭을 합천군이 전두환과 관련해 계속 사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적·시대적 정서에도 배치된다. 더군다나 3·1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 공원을 전두환의 아호를 따서 부르는 것은 역사 문제와도 충돌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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