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1 05:59최종 업데이트 22.03.11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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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전쟁 발발 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천연가스를 유럽에 융통해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발발 15일 전인 2월 9일 하기우다 고이치 경제산업 대신이 밝힌 내용이다. 천연가스 공급국인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 경우에 유럽 천연가스 사정이 악화될 수 있다는 미국의 요청을 받고 내린 결정이다.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3월 2일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밝힌 내용이다. 안 그래도 북아프리카 및 중동 난민들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동유럽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동유럽이 새로운 난민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일본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핵 공유

또 다른 움직임도 있다. 움직임의 진원지는 아베 신조 전 총리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핵 공유'를 외쳤다. 작년 9월 22일 윤석열 국민의힘 경선 후보가 외교·안보 공약으로 발표한 핵 공유 의제가 일본 극우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베 신조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편승해 군사대국화를 가속할 의중을 표출했다. 개전 사흘 뒤인 2월 27일 후지TV에 출연해 우크라이나가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를 통해 세계 3위 핵전력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핵무기를 넘긴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그때 전술핵을 일부 남겨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논의도 있다"라며 미국과의 핵 공유와 관련해 "일본도 여러 선택지를 내다보고 논의해야 한다"라는 말로 운을 뗐다.

미국이 씌워주는 핵우산에 만족하지 않고 공유 형식으로나마 핵무기를 가질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비핵화한 뒤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처럼 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닷새 뒤인 3월 4일에도 이 문제를 재차 거론했다. 자민당 내 아베파 파벌 모임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지만, 만일의 사태의 절차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며 "비핵 3원칙을 기본 방침으로 한 역사의 무게를 충분히 되새기면서 국민과 일본의 독립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논의를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핵우산만으로는 부족하다', '핵의 제조·보유·반입을 불허한 1971년 중의원 비핵 3원칙 결의를 염두에 두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비핵 3원칙의 무게를 되새기자는 부분보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부분에 방점이 찍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2021.9.3 ⓒ 연합뉴스

 
기시다 총리는 7일 참의원에 출석해 핵공유에 관해 "인정할 수 없다"라고 발언했고,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이즈미 겐타 대표는 5일 "위기를 이용해 핵을 논의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일본을 이끌어가는 극우 정치인들은 기시다나 이즈미가 아닌 아베 신조에게 동조하고 있다. 자민당 극우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제3당인 일본유신회 정치인들도 핵 공유를 지지하고 있다. 핵공유를 본격 논의하자는 일본유신회의 제안이 지난 3일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에게 전달됐다. 앞으로는 북핵이 아니라 '일핵'이 동아시아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을까 우려를 갖게 하는 현상이다.

핵 공유는 핵을 단독 소유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미국과 공유한다 해도 일본이 핵을 마음대로 다룰 수는 없다. 이 점은 미국 핵무기가 공유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나토 홈페이지(www.nato.int)의 설명 자료인 '핵계획그룹(Nuclear Planning Group, NPG)'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공유된 핵무기를 사용하려면 미국을 비롯한 나토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의사가 결정적이다.

핵 공유라고는 하지만, 관리나 통제는 물론이고 배치 장소 변경도 미국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미국 이외의 공유국에게 주어진 권한은 핵무기 사용이 결정된 뒤에 자국 공군기로 핵탄두를 실어 적국 영토에 떨어트리는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공유국이 '악역'을 맡도록 돼 있는 것이다.

미국과의 핵 공유가 그렇게 운용돼 왔기 때문에,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베 신조가 그런 식의 핵 보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궁극적 목표가 일본 단독의 핵 보유는 아닌지 의심된다. 

중요한 것은 단독 소유든 공유든 핵 보유를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제9조에 더 이상 얽매이기 싫어할 뿐 아니라 핵 없이 적대국들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가문의 내력

그런데 아베 신조의 핵 공유 주장, 정확히 표현하면 핵 보유 주장은 그의 가문 내력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정신적 구심점 중 하나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 전 총리는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이지만, 실제로는 '친'이냐 '외'를 가릴 필요가 없는 그냥 할아버지다. 기시 노부스케의 국회의원 지역구가 사위인 아베 신타로를 거쳐 외손자인 아베 신조에게 승계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신타로 및 신조 부자는 기시 노부스케의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의원직이 사실상 세습되는 일본에서는 정치 역시 가업이다. 이것을 이어받았으므로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는 '친'이냐 '외'냐를 가릴 필요가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당시의 기시 노부스케.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2013년도 한국 국회사무처 연구용역 보고서로 작성된 <현대 일본 보수정당의 핵무장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 시절인 1957년 5월 7일 참의원에 출석해 "자위권을 뒷받침하는 필요 최소한도의 실력이라면, 나는 설령 핵무기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헌법의 해석상 갖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지금 당장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일본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핵보유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시는 공유가 아닌 단독 보유를 언급했다. 똑같은 발언이 총리 퇴진 1년 4개월 전인 1959년 3월 2일에도 나왔다. 이때도 참의원에 가서 "방위용 소형 핵무기는 합헌"이라고 발언했다.

1950년대에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핵무기로 일본을 제압한 미국으로서는 일본 핵 보유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의 핵 보유 가능성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도 아베 신조의 할아버지는 핵 공유가 아니라 단독 핵 보유를 주장했다.

일본 극우세력의 그 같은 열망이 1945년 이후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핵공격을 받고 몰락한 경험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발판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군국주의 시절부터 일본 극우세력은 그런 열망을 품었다. 핵무기를 앞세워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려는 열망이 1945년 이전에도 있었다.

위 보고서에도 설명됐듯이 일본 육군은 1940년부터 핵무기 연구를 개시했다. 해군도 그 뒤를 이었다. 보고서는 "(해군) 함정본부는 교토제대에서 원자핵 실험을 행하고 있던 아라카쓰 분사쿠 교수에게 원폭 연구를 의뢰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개발 계획은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으로 불렸다. 일본 육군의 핵개발 계획은 '니호 연구(ニ號 硏究)'로 불렸다. 개발 담당자인 핵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ニシナ ヨシオ)의 가타카나 앞 글자를 딴 명칭이다. 해군의 핵개발 계획은 'F 연구'로 지칭됐다. 핵분열을 가리키는 fission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지만, 일본 극우세력은 이미 그전부터 핵개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 DNA가 기시 노부스케를 거쳐 아베 신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맞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위험한 욕망이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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