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7 06:05최종 업데이트 22.03.1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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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의 편견 없이 성소수자를 보자는 LGBT 역사의 달 (LGBT History Month) 안내 브로셔 ⓒ 권신영

 
2월 어느 날,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 시청 깃대에 매달린 무지개 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편견 없이 성소수자를 보자는 LGBT 역사의 달(LGBT History Month)을 기념하는 표시다. 이 운동은 1994년 로드니 윌슨(Rodney Wilson)이 2차 대전 기 유대인 학살을 사회적 혐오라는 관점에서 접근, 혐오의 대상을 성소수자로 확장시키면서 시작했다.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이름을 차용, 국제적 사회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순간 미국 보스턴 시청 게양대 논쟁이 떠올랐다. 기독교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 계열의 한 종교 단체가 시청 게양대 사용을 신청했으나 이를 불허한 시청을 고소하면서 시작된 현재 진행형 논쟁이다.


누가 시청의 게양대에 기를 올릴 수 있는가. 영국 케임브리지 시청에 꽂힌 LGBT 깃발과 미국 보스턴 시청에 꽂히지 못한 기독교 단체의 깃발의 차이는 무엇이며 다른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두 깃발은 양국에서 진행 중인 문화 전쟁(Culture War)을 대변한다. 문화 전쟁이란 용어는 1991년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가 냉전 이후 미국 사회를 전망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사회 갈등이 정치 이념에서 문화로 이동, 종교·인종·동성애·낙태·총기 규제의 문제를 둘러싸고 정통(orthodox)과 진보(progressive)가 싸울 것으로 예측했다. 그는 문화 전쟁을 두고 '무엇이 미국인가?', 즉 미국을 지탱하는 근본 가치를 묻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깃발은 상징물로, 논쟁은 도서관에서 구체화된다. 양상은 금서 지정으로 나타났다.   

보스턴 시청 게양대 논쟁

2017년 기독교 단체 캠프 콘스티튜션(Camp Constitution)은 보스턴 시청의 세 번째 게양대 사용을 신청했다. 시청은 첫 두 게양대에 미국 국기와 매사추세츠 주기를 게양하고 마지막 세 번째를 각종 행사 단체가 사용할 수 있게 비워 둔다. 그동안 200개가 넘는 사회단체 깃발이 올랐고 LGBT 무지개 깃발과 다른 나라 국기도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보스턴 시청은 위 단체의 게양대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차별, 편견, 혹은 종교 운동"과 연관된 취지에는 사용을 불허한다는 방침에 의거해 내린 결정이었다.

해당 단체는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 단체다. "유대-기독교의 도덕적 유산을 기반"으로 해서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의 번영을 위한 애국자 육성"을 목표로 한다고 밝힌다. 건국이념을 유대-기독교에서 찾고 기독교 중심의 국가를 꿈꾸는 기독교 민족주의는 백인 우월주의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이 단체는 지난 대선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 의회 난동 때 깃발을 앞세우고 참가했다.

해당 단체는 시청의 게양대는 모두에게 개방된 공적 광장(public forum)이므로 시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청은 게양대는 정부의 공간이라 반박했다. 게양된 기는 시청의 목소리와 진배 없고 그 맥락에서 시청이 자기 목소리를 결정할 권리, 게양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시청에 종교 단체 기를 올릴 경우 종교와 정치 분리를 명시한 헌법 위반이라 주장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 연방 대법원이 판결할 부분은 보스턴 시의 게양대가 모두에게 개방된 공적 광장이냐 아니면 정부의 광장이냐다. ⓒ 윤현

 
현재 대법원으로 올라간 상태로, 하위 두 법원에서는 시청 측이 승소했다. 대법원이 판결할 부분은 게양대가 모두에게 개방된 공적 광장이냐 아니면 정부의 광장이냐다. 공적 광장이라면 모두가 사용할 수 있고, 정부의 광장이라면 시청이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위 법률 논쟁을 사회적 맥락으로 바꾸면 혐오를 표출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가다. 이를 중화시켜 표현한 것이 "깨어 있음(woke)"이다. 사회의식을 갖고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문화 전쟁의 핵심 주제다. 이 주제는 다시 한 번 변형되어 "정치적 올바름, 자체가 편향적이다"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1990년대 이래 인권과 사회적 정의를 내세우며 두드러진 성과를 이룬 진보 측에 대한 정통(orthodox) 측의 반론이다.

책을 금지하다

책은 언제나 위험했다. 우려의 한 표현이 금서 지정이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책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도 이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가장 과격한 형태는 책 태우기로, 먼 이야기가 아니다. 1930년대 나치는 나치에 맞섰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태워 "문화 제노사이드"를 일으켰다.

2022년 현재,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1931-2019)의 작품이 수난이다. 대 공황기 흑인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그의 첫 소설 <블루이스트 아이(The Bluest Eye)>(1970)가 미주리 학교 도서관에서 퇴출당했다. 지난 11월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Beloved)>(1987)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부모의 주장을 선거 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미국 전역에서 토니 모리슨의 책을 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 금서 지정은 텍사스, 테네시, 버지니아, 플로리다, 와이오밍, 유타 등 공화당이 우세한 주와 도서 비치할 때 적합성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일어나고 있다. 토니 모리슨의 책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인종 문제와 LGBT를 다루는 서적이 금서 목록에 오르고 있고 금서 지정 요청 수는 수십 년 내 최대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작가 토니 모리슨에게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2012.5.29 ⓒ 연합뉴스

  
눈에 띄는 것은 학부모의 개입이다. '노 레프트 턴'(No Left Turn)의 경우, "흑인 인권도 소중하다"는 운동이 결성 계기였다. 대표인 엘레나 피시바인(Elena Fishbein)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평등과 인종 문제를 가지고 별도 수업을 마련하는 학교 조치를 두고,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회의식(woke culture)"을 강요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의 제기 했을 때 '진보' 학부모로부터 핀잔을 받은 후 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학교가 학생의 마음에 독을 넣고 가족을 공격,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나라를 내부에서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은 사상 교화가 아니다"가 이 단체의 슬로건이다.  
   
이에 대한 반발도 거세다.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가족의 이야기로 퓰리처상을 받은 아트 슈피겔만(Art Spiegelman)의 그래픽 소설 <마우스(MAUS)>(1986)가 테네시에서 금서로 지정되자, 갑자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일부 학부모의 권리 주장이 다른 학부모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금서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일부 고등학생들은 북클럽을 결성, 오로지 금지된 서적만 읽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앨런 튜링

영국 케임브리지 공공 도서관은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미국 학교 도서관과는 대조적이다. 들어가면 LGBT 역사의 달을 기념하는 테이블이 있다. 관련 서적이 죽 전시되어 있고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의 사진과 짧은 설명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 공공 도서관은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미국 학교 도서관과는 대조적이다. 들어가면 LGBT 역사의 달을 기념하는 테이블이 있다. 관련 서적이 죽 전시되어 있고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의 사진과 짧은 설명이 있다. ⓒ 권신영

 
전시된 인물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다. 짧지만 강렬했고 눈부셨지만 비극적인 그의 삶이 아마도 영국 내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일조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차 대전 기 케임브리지대에 재직하던 중 튜링은 독일 잠수함 U-boat가 사용하는 에니그마 암호를 깨는 임무를 맡아 성공한다. 암호 해독을 위해 그가 발명한 기계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다. 과학사에서는 컴퓨터학과 인공 지능의 개척자요, 전쟁사에서는 전세를 연합군 쪽으로 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덕분에 전쟁을 적어도 1년 이상 단축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1952년, 튜링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고 강제 호르몬 치료를 받았다. 2년 뒤, 그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2009년 고든 브라운 총리는 무려 반세기 동안 지속된 침묵을 깨고 공식 사과한다. 사과문은 2차 대전 정보전 기지이자 앨런 튜링이 컴퓨터를 만들었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 걸려 있다.
 

2009년 고든 브라운 총리는 무려 반세기 동안 지속된 침묵을 깨고 공식 사과한다. 사과문은 2차 대전 정보전 기지이자 앨런 튜링이 컴퓨터를 만들었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 걸려 있다. ⓒ 권신영

 
사과문에서 고든 총리는 영국 사회가 튜링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받았던 치료는 "완전히 부당(utterly unfair)"했다고 밝히고, 전후 영국이 평화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인 듯했지만 사회적 혐오들, "반유대주의, 동성애 혐오, 외국인 혐오, 그리고 여타 살인적 편견"이 존재했음을 인정했다. "우리가 사죄한다. 당신은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았어야 했다"는 문구로 글은 마무리된다.  

이후 시민운동가들은 공식적인 사면을 추진했다. 정부는 사후 사면은 곤란하다며 선을 그었지만, 2013년 12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예외적 사면"을 결정했다.
 

전시된 인물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다. 짧지만 강렬했고 눈부셨지만 비극적인 그의 삶이 아마도 영국 내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일조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권신영

 
문화는 이질적인 집단의 경계를 낮추는 유연제가 될수도 있지만, 경계를 더욱 강고하게 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현재 미국의 경우, 인종과 성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갈등이 양분된 정치 지형을 더 강고하게 만들고 있다.

영국은 양상이 좀 다르다. 2021년 6월 발간된 런던 킹스 칼리지 <영국에서의 문화 전쟁(Culture War in the UK)> 보고서에 의하면 성정체성 문제는 13%에 불과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문화 전쟁 1위는 36%를 차지한 대영제국과 노예제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다. '깨어 있는 쪽(woke)'과 '깨어 있음을 반대하는 쪽(anti-woke)'의 시각 차이는 동상, 특히 식민주의자 세실 로즈(Cecil Rhodes, 1853-1902)와 노예 상인 에드워드 콜스턴(Edward Colston, 1636-1721) 동상 제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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