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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에서 술을 광고한다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오래전부터 주류광고에서 '캬~', '크~'와 같이 술의 소비를 증가시킬 수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며 특정 시간에 술 마시는 모습 또한 금지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에만 적용됐던 광고 시간제한(오전 7시~오후 10시) 적용 범위가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 등으로도 확대 적용되어 있다.

규제가 강하지 않았을 때에는 술과 관련된 다양한 광고 수단이 있었다. 라디오나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잡지, 옥외광고 심지어는 식당의 다양한 편의 물품들에도 술 광고를 했다. 이러한 술 광고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근대 신문이 발행되는 19세기 말부터 술 광고가 등장한다. 하지만 신문이 아닌 소비자가 체감하는 술 홍보는 더 오래되었다 할 수 있다.

조선이나 근현대까지 술은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자가소비 하거나 판매를 해도 제품으로 유통 판매하는 게 아닌 술집에서 병으로 판매하는 것이 다였다. 그렇기에 먼 곳에서도 술 파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술집 위치 홍보가 중요했다. 그중 한양의 술집을 묘사하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술집에 주등(酒燈)이다.

한양에서는 깃발보다는 등으로 술을 파는 곳임을 홍보하였다. 18세기 한양은 대궐 안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면 술집 주등(酒燈)이 많이 보이는 술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1743년(영조 10년)의 상소문에도 '주막 앞에 걸린 주등(酒燈)이 대궐 지척까지 퍼져 있다'라고 적혀있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술을 파는 곳이라는 홍보를 주등으로 한 것이다. 주막은 표시로 문짝에다 '주(酒)' 자를 써붙이거나 창호지를 바른 등을 달기도 하였다. 또, 장대에 용수를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려서 멀리서도 주막임을 알리기도 했다. 다 먼 곳에서 술 파는 곳의 위치를 알아 보기 쉽게하는 홍보의 수단이었다.

술 광고의 변천사 
 
송파 우진호(禹鎭浩)의 조선 농촌생활도
▲ 주막에 달린 용수 송파 우진호(禹鎭浩)의 조선 농촌생활도
ⓒ 소장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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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와서 신문의 등장과 함께 홍보의 방법도 지면을 통한 광고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독립 신문 1898년 11월 17일자에는 조일주장(朝日酒場) 광고가 있다. 이름으로 보아 일본 양조장으로 생각되는데 오래전부터 청주(사케)를 연구하여 이번에 생산 판매한다는 광고이다.

19세기말의 광고들은 아직 그림은 사용하지 않고 글로만 된 광고들이었다. 황성신문 1901년 6월 19일자에는 점포 '구옥상전'이 낸 광고가 실려있는데, 맥주가 수입되어 들어 왔다는 내용과 함께 그림 판매 홍보를 하고 있다. 수입품이었던 맥주를 일반 국민이 접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광고가 계속된 것을 보면 개화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소비층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다양한 맥주 광고가 나오게 된다. 당시 일본으로부터의 맥주의 수입량은 40%가 증가할 정도로 맥주를 마시는 인구가 늘었다. 당연히 신문광고도 많아지게 되었다. 1915년 2월에서 9월에 이르는 기간에 매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이미 맥주는 보편화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고한 맥주는 삿뽀로, 아사히, 기린, 그리고 사꾸라의 4종류였다. 광고는 더운 여름철에 집중되었으며 대개 브랜드 명단을 그림과 함께 사용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미 맥주가 어떤 술인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광고를 보면 지금 국내에 들어오고 있는 술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다. '대일본 최우등 청주'라는 한문 헤드라인 아래 '사꾸라(벚나무) 마사무네(정종)'라는 일본말이 한글로 쓰여 있다. 이때부터 정종은 일본 술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맥주 광고로 당시 조선인들의 입맛을 잡기 위해 펼쳐졌던 삿뽀로와 아사히 맥주의 공동광고도 있었다. 거품이 넘치는 맥주잔의 이미지와 보리 이삭을 잔 왼쪽에 그려 넣은 그래픽이 재미있다. 브랜드 이름 위에 '국산'이라 표기된 점이 우리 역사의 슬픈 모습을 표현하는 듯하다.
 
사꾸라 정종(1911. 3. 3 매일신보, 왼쪽) 삿뽀로 맥쥬(1915. 6. 24 매일신보, 오른쪽)
▲ 일제 강점기 정종과 맥주 광고 사꾸라 정종(1911. 3. 3 매일신보, 왼쪽) 삿뽀로 맥쥬(1915. 6. 24 매일신보, 오른쪽)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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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6월 동아일보 광고란에는 다양한 주류 광고가 나타난다. 이 두 달 기간에 동아일보에 게재된 주류는 맥주, 소주, 양주 와인 등이다. 특히, 1920~30년대의 일본 포도주 아까다마(赤玉)의 포트와인(일본 산토리 생산, 현재는 아카다마 스위트와인으로 출시) 광고가 두드러진다.

재미있는 적옥 광고가 있다. "적옥(赤玉)인가? 그저 그러치 / 적옥(赤玉) 포트와인이로군. 내 어쩐지 맛이 조트라니" 아까다마 포트 와인이 아닌 줄 알고 술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하다가 아까다마 포트 와인인 것을 확인한 후 맛이 좋다고 자신이 한 말을 바꾸는 광고이다. 아까다마 포트 와인은 이와 같은 재미있는 카피와 시각적 표현을 바탕으로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광고캠페인을 전개했다.
 
조선일보 1926년 9월 3일(좌), 1928년 5월 28일 동아일보(우)
▲ 아까다마 포트와인 조선일보 1926년 9월 3일(좌), 1928년 5월 28일 동아일보(우)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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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주류 광고는 평양의 복희(福囍)주조장의 소주 광고가 있었고, 또한 사리원에서 만드는 희(囍)표 소주 광고도 있었다. 또한, 서울에서 판매하는 약주 광고도 이따금 신문에 게재되었다. 약주 광고 중에 하나는 '약주 아세아(亞細亞)'이다.

'아세아(亞細亞)'는 '아시아(Asia)'의 음역어로 아마도 약주를 아시아까지 수출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름에 담았던 게 아닌가 싶다. 동아산업합자회사(경성 인사동 일팔팔)이라는 회사에서 생산했으며 약주 광고에는 '특약점을 희망하는 인사에게는 규칙서(계약서)를 보낸다'는 내용도 신문에 있다.

일괄적인 규제, 이대로 괜찮을까 
 
복희 소주(왼쪽), 아세아 약주(오른쪽)
▲ 일제강점기 전통주 광고 복희 소주(왼쪽), 아세아 약주(오른쪽)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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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광고의 대한 규제는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술 광고 규제를 통해 술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전 세계적으로 그 방향은 옳은 것이라 보인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각 주종별로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다. 획일적인 규제 강화는 영세한 업체와 대기업 간의 차이만 크게 할 뿐이지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지 못한다.

전통주 업체의 상당수가 영세하기에 광고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매우 한정적(옥외 간판 광고나 차량 광고 등)이고 그것을 규제하면 전통주 업체의 광고 방법은 전무하다 할 수 있다. 전통주는 일반 주류와 다르게 우리의 역사 속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고 보전해야 할 가치가 있는 술이다. 전통주 업체들의 술 광고에 있어 획일적인 규제보다는 상황에 맞는 맞춤형 규제를 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태그:#근현대, #전통주 , #광고,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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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연구를 하는 농업연구사/ 경기도농업기술원 근무 / 전통주 연구로 대통령상(15년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 진흥) 및 행정자치부 "전통주의 달인" 수상(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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