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도 벌써 석 달이 지나가고 있다. 다시 세운 꿈과 희망을 펼치기도 전에 두 달이 훌쩍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지나간 시간만이 아니라 수십 년의 세월이 사라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지금, 지나버린 세월이 아쉬워 누구에게 하소연하는 것도 아닌데, 세월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속도감에 간혹 주눅마저 들 정도다. 이 세월마저도 자연의 이치일진대, 어찌 가는 세월에 무어라 할 수 있을까마는.
음력 이월이라 그나마 위안을 얻고,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을 이겨낼 용기를 가져본다. 생명이 약동하는 춘삼월에 푸른 별, 지구를 놀이터로 삼아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다져본다.
그리웠던 봄날, 길상초(吉祥草) 위에 앉아 삶의 씨앗을 다시 뿌려본다. 숨을 더 깊게 쉬고 내뱉는다. 봄볕을 기다리는 새싹처럼 살포시 눈을 감고 뜬다. 지구 중력이 몸 가운데에 느껴질 정도로 마음을 자꾸 내려본다. 꽃과 새 그리고 나무와도 교감할 정도로 마디마디 세포를 열어둔다. 그다음, 내 자리에서 일어나 본다.
이런 나의 일상은 붓다와 십대 제자들의 행로에 따르고 있다. 숱한 기록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행법으로 삼월을 보내며, 시간의 축적이 전해주는 행복한 만족을 찾는 데 있다. 이 일과는 오직 스스로 걸어가면서 만들어 내는 길이다.
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축적된 시간 속에 있는 숙성된 지혜이다. 축적된 시간은 내가 뿌린 씨앗이 꽃피울 수 있는 본바탕과 같다. 한 홑의 씨앗은 축적된 경험을 통해 싹 틔울 의지를 다지고, 봄날에 시나브로 불어온 따스한 바람과 땅이 만드는 온기로 품어낸 수분을 만날 때,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다. 이런 창조적 축적은 자연과 우리가 오랜 시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얻은 결괏값이다.
겉으로 보면, 춘삼월은 꽃피고 노고지리 날아오르는 아스라한 풍경들이다. 그 속 깊이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경쟁의 연속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에겐 겨울과 봄이라는 동떨어진 불연속의 계절이지만, 자연에는 그저 다시 생명을 꽃피울 연속의 시간이다. 이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할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칭찬이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할 뿐.
자연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다. 나무는 나무대로, 씨앗은 주어진 조건에서 혼신의 여력을 쏟는다. 곤충과 미물은 또 그들 나름대로.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우리 인간은 어떠한가? 다시 반추해볼 삶의 모습이 있다.
동·식물을 비롯한 인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맴돈다는 이론이 전한다. 여섯 가지의 테두리에서 유일하게 삶의 조건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세계는 곧, 인간계뿐이다. 일찍이 붓다께서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스스로 삶의 조건을 바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일렀다.
행복과 불행은 모두 자신이 만드는 결괏값이다. 지난 과거는 바꿀 수 없겠지만, 우리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지금의 아픔과 고난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길은 한순간의 마음에서 비롯됨을 알아차리는 봄날이기를 기원해 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연못 속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크게 나를 깨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