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영화

문학과 영화 ⓒ pixabay


오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시 보면서 새삼 문학과 영화의 관계를 생각해봤습니다. 그 둘은 서로가 지닌 특성이나 기법에 따라 상충하는 측면도 있지만, 대체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후로 멜리에스, 포터를 거쳐 그리피스에 이르러 영화의 혁신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그 자체로 영화로 옮아가는 든든한 토대를 제공해왔으니까요.  

문학 작품을 각색하면 문예 영화가 가능하게 된 배경의 첫 번째 요소로는 무엇보다 문학과 영화는 이미지로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추구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문학이 서술하는 이야기 방식이 펜으로 쓰는 글, 즉 언어로 구성되었다면, 영화의 이야기는 카메라로 쓰는 이미지로써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또한 문학이 일인 서술의 형태를 취하면서 시간, 공간, 인물을 서사에 풀어내는 반면, 영화는 협업의 형태를 띤 예술로 시대, 배경, 캐릭터로 존재하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차별적인 요소는 이미지의 모션과 사운드로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문학이 각종 비유와 은유, 상징을 고도로 활용하면서 인간 내면에 자리한 상상력을 끄집어낸다면 영화는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커팅, 편집의 병치를 통해 화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문학과 영화는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는 공통적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기법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듯이 영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훈련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와 반대로 영화만의 특별한 형식은 문학적 글쓰기에 또 다른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를테면 <기생충>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부의 축적에 따른 사회구성원의 의식이 개별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변화해갈 수밖에 없는 시선이랄까요. 뭐 그런 것들을 포함한 심리적 측면까지도요.
 
그렇다면 영화적 기법으로 알려진 시각적인 기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흔히 카메라의 이동에 따른 다양한 샷 외에 몽타주와 미장센, 셔레이드가 대표적인데 먼저 몽타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몽타주는 원래 불어 "조립하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비유와 상징으로 구현되는 문학적 기법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처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는 전달하려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비유적인 기법으로 보여주는 형식인데 다시 말해서 사건이나 행위를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다른 장면이나 사물로 우회해서 보여주는 것을 몽타주라고 하죠.
 
가령 디졸브나 페이드아웃과 같은 카메라 효과 없이 낱낱의 분절된 장면을 편집(조립)함으로써 등장인물의 행위나 사건을 짐작 가능하도록 보여주는 식입니다. 이런 기법은 비단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각종 광고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몽타주는 샷, 신, 시퀀스로 구성된 장면을 최종적으로 편집하는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참고로 그리피스는 영화 연출의 초기부터 자신의 몽타주 기법이 디킨스의 작품에서 비롯됐음을 지적하였고, 에이젠슈테인 또한 몽타주의 중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의 예를 인용했는데 문학적으로 이를 마스터한 사람으로 그가 꼽은 인물이 바로 제임스 조이스였다고 합니다. 이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두 사물의 병치가 단순한 두 개의 합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겁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영화적 기법인 미장센은 불어로 '연출'이라는 뜻이며 원래 무대에서의 연출을 뜻합니다. 영화로 옮겨오면서부터 감독의 독특한 개성과 컬러를 뜻했는데 화면 속에 담길 모든 조형적 요소들, 가령 세트, 인물이나 사물, 조명, 의상, 배열, 동선, 카메라의 각도와 움직임을 지칭하죠. 이를 문학적 기법으로 구현한다면 각종 서술과 묘사가 아닐까 싶어요. 문학 영역에서 작가 고유의 문체가 영화로 넘어갔을 때 감독의 특별한 연출과 일맥상통한다고 할까요.
 
또 우리가 주목할 영화적 기법으로 셔레이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동작, 혹은 소도구나 장소, 분위기만으로도 인물의 기대와 욕구, 설렘과 같은 감정을 연출하는 기법입니다. 초창기 무성영화 시절에는 대사가 없는 까닭에 특히 많이 사용됐는데 사전적 의미는 '제스처 게임'이란 뜻으로 몸짓으로 판단하여 말을 알아맞히는 놀이를 말합니다. 따라서 시각적인 표현이 그만큼 중요하며 도구나 동작 등을 보여줌으로써 그 배경이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급소를 찌르듯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말하죠. 이러한 셔레이드 기법을 잘 사용하면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인상으로 표현될 수 있고,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나 심리적인 심층 묘사에 응용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영화기법에 대한 대략적인 용어를 살펴봤는데 문학적인 기법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영화에서 쇼트를 배열하는 편집과 커팅 혹은 몽타주의 과정은 문학으로 오면 문법과 구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만들어가듯이 쇼트가 모여 신이 되고 시퀀스가 되며 이들의 조립으로 영화가 되고 문학작품이 되는 이치죠.
 
그런 바탕에는 언어로 표현되는 텍스트가 자리하지만, 영화 역시도 이미지를 이용한 시각적 텍스트라고 본다면 서로의 고유한 기법이 있다기보다는 문학적 요소가 이미지를 얻음으로써 새롭게 재구성되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영상매체가 지니는 파급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 또한 대중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학이 영화와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한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의 말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말일 것입니다.
 
눈으로 한번 보는 것으로 이해되는 영화는 너무 뻔한 형식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를 이해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문학작품의 텍스트라고 해서 서사를 이해하기 위한 사유가 반드시 동반된다는 주장은 때로는 억측일 수도 있겠더군요. 이는 작가가 여러 번에 걸쳐 반복과 점층적 기법으로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야 단번에 실감 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치 영화가 그렇듯이.
 
지금껏 문학과 영화가 지니는 고유한 기법을 몇 가지 살폈는데, 이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문학에서의 이미지는 중요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반면, 영화에서는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문학적 사유의 완결로 나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본다면 영화가 지니는 기법에서 가장 확연한 차이가 바로 음향, 즉 사운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오면서 더욱 분명한 역할을 했는데 이미지의 시각화에서 다양한 기법을 추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죠.

또한 이로 말미암아 영화가 일회적 소비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 문학성을 획득하는 자리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자문해볼 일입니다. 다양한 은유와 상징으로 독자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문학적 기법과 사운드를 활용한 시각적 이미지로 쉴 새 없이 조립되는 다양한 변주야말로 서로가 갖는 차이점이면서 한편으론 일맥상통하는 기법이라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글을 쓰는 작가라면 문자 서사와 영상 서사가 보여주기의 방식에서 이렇듯 독자적이고 독립적이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법의 변형은 무수한 선택의 패러다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혹시라도 문학이나 영화에 도전하는 분이라면 문자의 언어적 구성과 영상의 이미지를 아울러 계획해보는 것도 좋을 듯해서 몇 자 적어봤습니다. 배우 송강호가 극 중에서 하는 대사를 잘 곱씹어보면 그 속에는 분명 당신의 꿈도 있을 겁니다. 물론 나아갈 방향을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그때마다 주문처럼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기생충 문학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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