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8 06:06최종 업데이트 22.04.1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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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의 존립이 위태해지는 경우, 소속 기자들은 다른 언론사를 찾거나 교육이나 집필 계통의 직업을 물색하거나 아니면 한동안 집에 머물기가 쉽다. 그 언론사가 세상의 지탄을 받던 곳이라면 한동안 집에 있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런 상황에 놓인 기자가 주식회사를 경영하게 되거나 대기업 임원이 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기자가 있다면 '물려받은 돈이 많거나 후광이 있나 보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1945년 8·15 당시 만 35세였던 이원영(李元榮) 기자의 직장은 <매일신보>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던 그의 직장은 그해 11월 10일 정간됐다가 13일 뒤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복간됐다. 이 같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므로, 8·15 해방은 그를 움츠러 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친일

대한제국이 망한 다음날인 1910년 8월 30일, <매일신보>라는 이름이 식민지 한국에 처음 등장했다. 이로부터 7개월 전인 그해 1월 24일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서 이원영이 출생했다. 친일파 민영휘(徽)가 세운 휘(徽)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그는 그해에 <경성일보>에 입사했다. 1906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신보>와 <대동신보>를 합병해 만든 언론사였다.

<경성일보>는 <매일신보>와 자매지 관계였다. 이 관계는 1938년에 <매일신보>가 별도의 주식회사로 분리될 때까지 유지됐다. 바로 그 1938년에 이원영은 <매일신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 뒤 도쿄 특파원과 정경부장을 거쳐 33세 때인 1943년에는 논설위원을 겸하게 됐다.

이원영이라는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이런 프로필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일반적인 언론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열심히' 친일을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민족행위를 했던 것이다.

사전에 따르면, 1944년 3월호 <반도의 빛>에 기고한 글에서 부인들의 노동력을 전쟁에 동원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해 4월호 <동양지광>에 '패전으로 노예가 되기 싫으면 징병·징용에 참여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라'는 취지의 글을 썼다. <매일신보> 이외의 매체를 통해서도 친일을 한 것이다.

그가 단지 글쓰기로만 친일을 한 것은 아니다. '미국·영국 격멸'을 축원하는 행사의 운영에도 관여했고,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는 '학도 출진(出陣)을 말하는 좌담회'에 주최 측 인사로도 참석했다.

또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기구에까지 가담한 것이다. 총독부가 지정하는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총무과장 겸 조선항공사업사 지배인에도 취임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도 맡았다.

해방 후 오히려 오르막길

변호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였지만, 8·15 해방은 그에게 내리막길을 의미하지 않았다. 해방 뒤에 그는 더 많은 경제력과 더 많은 사람들을 이끌게 됐다. 8·15가 오히려 오르막길의 시작이 되었다.

해방 2년 뒤에 발행된 1947년 7월 27일 자 <경향신문> 3면 하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동일목재주식회사 사장 이원영이 조선목재주식회사 전무로 취임했다는 내용이 이 기사에 보도됐다. <매일신보>가 정간된 이듬해인 1946년부터 동일목재를 경영하다가 조선목재 임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 뒤 그는 남한제지 전무취체역(전무이사), 충북신문 부사장, 홍익학원 이사를 거쳐 남한제지 사장이 됐다. 1970년 6월 25일 자 <중앙일보> 1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원양어업주식회사 사장도 역임했다.

언론계에서 사라진 그가 곧바로 재계로 넘어가 주식회사 사장이 된 것은 '물려받은 재산'과 관련이 있다. 이 재산에 접근한 것이 해방 뒤의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물려받은 재산'의 실체는 당시의 언론보도에서 확인된다. 동일목재 사장에서 조선목재 2인자로 옮겨간 사실을 보도한 위 <경향신문> 기사는 아래와 같다.
 
시내 충정로(전 죽첨정)에 있는 군정 관리회사 조선목재주식회사에서는 그동안 결원 중이던 사장에 현 전무 이해용 씨가, 전무에는 동일목재주식회사 사장 이원영(李元榮) 씨가 당국의 인가를 얻어 24일 각각 취임하였다 한다.
 
미군정은 적산(敵産)으로 처리된 일본인 재산들을 공공 재산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일본인 소유자와 연고가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나눠주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헐값에 분배했다.

이 때문에 친일파가 친미파와 더불어 일본인 재산을 우선적으로 가져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친일파가 일본인들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는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그 같은 '물려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하는 일에 이원영도 접근한 것이다.

이원영의 조선목재 전무 취임을 보도한 또 다른 기사인 그해 7월 29일 자 <한성일보>는 "동일목재사업사 사장 리원영을 동 전무로 각각 발령하야"라고 언급했다. 미군정이 동일목재 사장 이원영을 조선목재 전무로 '발령'했다는 보도를 볼 때, 동일목재 역시 미군정의 영향 하에 있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적산 관리에 깊이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인용된 <한성일보> 기사. ⓒ 한성일보

 
이원영이 미군정의 적산관리에 관여했다는 점은 1949년 4월 13일 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적산 가옥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적산가옥거주자협회 총무부장이 이원영임을 알려준다. 이 기사에 적힌 이원영의 한자 이름은 친일파 이원영과 똑같다. 그리고 기사에서는 이원영이 명사(名士)로 소개됐다. 전 <매일신보> 논설위원 이원영이 이 기사 속의 이원영이며, 그가 적산 기업뿐 아니라 적산 가옥에까지 관여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일제 침략전쟁 당시 이원영은 '미·영 격멸'을 외쳤다. 일본의 원수인 미국·영국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조선 청년들이 징병·징용에 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랬던 그가 해방 뒤에는 미군정의 비호 하에 '물려받은 재산'의 관리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업그레이드시켰다.

대한민국 국회의원까지
 

대한민국헌정회 사이트에서 제7대 국회의원으로 소개된 이원영. ⓒ 대한민국헌정회

  
이 같은 변신과 성공은 그가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을 거쳐 제7대 국회로 진출하는 원동력이 됐다. 친일 언론인에서 적산 기업 관리자로 변신한 인물이 국민 대표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일 경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7대 총선 1개월 전에 발행된 1967년 5월 14일 자 <조선일보> 기사 '후보 명단 순위 및 약력'은 공천 순번 26번인 이원영의 경력을 "57(경기), 경성제대, 조선제지 사장,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으로 열거했다. 총선 후보자의 기자 경력이 생략되는 일이 드물지만, 이 경우에는 이원영의 핵심 경력인 매일신보사 논설위원 역임이 언급되지 않았다.

대한민국헌정회 사이트의 이원영 프로필에는 '매일신보사 정경부장'이 아닌 '해일신보사 정경부장'으로 적혀 있다. 그와 <매일신보>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데도, 오타로 인해 그 경력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헌정회는 국회 경내에 소재한 단체이므로, 이런 단체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는 역대 국회의원들의 친일 이력을 명확히 표기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원영은 정상적인 경우라면 8·15로 인해 움츠러 들어야 했다. 하지만 적산에 손을 대는 방법으로 오히려 강해졌고, 유력 기업인을 거쳐 국민 대표자 역할까지 수행하게 됐다. 그의 변신과 성공은 '물려받은 재산(적산)'이 친일파 부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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