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7 11:20최종 업데이트 22.04.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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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해결하라는 베트남인들의 촉구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12일 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한국군 민간인 학살 베트남 피해자들, 진정서 낸다>(http://omn.kr/1ybd0)라는 기사는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을 비롯한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 학살 피해자 4인이 오는 25일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낸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 이전인 19일에는 좌담회도 열린다. 학살 당시 11세였고 지금은 65세인 응우예티탄과의 대담이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베트남 전쟁(월남전)과 관련된 한국인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한국군 무용담들이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군의 살상 행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한국이 베트남을 도우러 갔다'는 인식과 더불어 '민사 작전으로 불리는 한국군의 대민 사업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인식도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한국군의 참모습"

한국군이 베트남 민중과의 상호 관계에서 성과를 거두고 현지인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샀다는 인식은 파월 한국군 지도부에 의해서도 형성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파견군을 이끌고 베트남에 다녀온 채명신(1926~2013)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도 그런 인식의 형성에 기여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발행된 1969년 5월 4일 자 <조선일보> '채명신 장군 주월(駐越) 3년 반 화전(和戰)의 비사(秘史)'는 그가 5월 3일 귀환했다는 소식을 보도하면서 "장병들에게 월남인의 생활풍습을 이해하고 전투작전에 앞서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진정한 우방으로서의 한국군의 참모습을 보이게 했으며"라는 말로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이 기사는 채명신 장군이 미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민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한국군과 베트남인들의 접촉을 반대했지만, 채명신이 "월남전은 총만 가지고는 이길 수 없다"라며 강행했다고 보도한다.

그 결과로 "의료반 활동, 친선 행사, 건설 및 보수 공사 등은 '싸우며 건설하는 한국군'이란 이미지를 월남인들 마음속에 새기게 됐으며 자그마치 구호 활동에만도 3백50만 달러를 썼다"라고 한 뒤 "이래서 월남인들은 '따이한'을 가장 친한 그들의 우방으로 좋아하게 됐다"라고 기사는 말한다.

비슷한 이야기는 3년 뒤에 귀환한 허홍 해병대 준장에게서도 나왔다. 1972년 2월 14일 자 <경향신문> 3면에 따르면, 청룡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그는 "작전 면에서의 청룡은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를 월남 땅에 심어놓았습니다"라고 한 뒤 "심리전에서는 청룡 병사 1명 1명이 월남 주민들에게 고국의 부모와 형제를 대하듯 했기 때문에 월남 국민의 호응을 받은 것입니다"라고 자평했다.

한국군이 한국 전쟁 때와 달리 베트남 전쟁 때는 민간인 보호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한 관심은 베트남 파견 부대를 사전에 교육하는 과정에도 일정 정도 반영됐다.

재작년에 <구술사 연구> 제11권 제1호에 실린 역사학자 류기현의 '주월 한국군의 대민관계: 참전 군인들의 구술 증언을 중심으로'는 "한국군의 대민관계 준비는 파월 직전의 특수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한 뒤 "1965년 맹호부대가 처음 파월될 때의 교육 기간은 약 1개월 정도였으나, 1966년 파월된 백마부대의 경우는 약 2개월의 특수교육을 실시했다"라고 설명한다.

1969년 육군본부에 의해 간행된 <파월 육군 종합전사> 제1권을 근거로 위 논문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맹호부대의 교육 프로그램 중에 '월남 소개 및 교훈'이란 과목이 있다.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양 교육이었다. 채명신·허홍 두 장군이 민사 작전의 성공을 자평한 데는 이런 교육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소양 교육이 병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수업 시간부터가 충분하지 않았다. 맹호부대의 경우, '월남 소개 및 교훈'은 '일반학'에 포함돼 있었다. 일반학에 할애된 시간이 보병의 경우에는 20시간, 포병은 24시간, 기술행정부대는 54시간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2015.4.7 ⓒ 이희훈

 
일반학 속에는 '월남 소개 및 교훈' 외에도 독도법(지도 해독법) 프로그램, 함상생활 프로그램, 헬리콥터 탑승 훈련 프로그램, 예방의학 프로그램도 있었다. 20시간·24시간·54시간 중에서 '월남 소개 및 교훈'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지 않았다.

또 교육 내용이 부실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참전 군인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한 위 논문은 "그 내용은 빈약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라면서 맹호부대 기갑연대 작전주임이었던 이효 예비역 소령의 진술을 소개한다. 논문에 소개된 이효 소령의 진술을 요약하면 이렇다.

'강원도 홍천에서 사전 교육을 받을 때, 베트남 여성들은 모두 삿갓을 쓰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베트남 항구에 상륙하기 직전에 저 멀리 부두에 운집한 인파를 바라보니 모두 다 삿갓을 쓰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니까 남자는 드물고 여자가 많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별에 관계없이 삿갓을 다 착용한다는 사실을 상륙 직후에 알게 됐다.'

상륙 직후에 금방 알 수 있는 지식이 사전 교육 때 잘못 제공됐다. 교육 프로그램이 얼마나 엉성하게 준비됐는지를 알 수 있다.

백마부대 29연대 인사과에서 근무한 김천수 예비역 병장은 사전 교육 때의 강의 내용은 "주로 장교들의 작전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소양 교육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베트남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참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군 지도부는 이런 프로그램을 근거로 민사 작전의 성공을 자평했다.

"저희 나라 위해 싸우다 보면..."

그런 자평이 나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당시의 한국 사회를 지배한 '개발주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다. 채명신 장군을 취재한 위 기사에도 나타나듯이 한국국은 "의료반 활동, 친선 행사, 건설 및 보수 공사" 같은 활동을 수행했다. 베트남에 대한 이 같은 물질적 지원이 위와 같은 자평을 도출한 또 다른 이유였다.

한국군 지도부는 물질적 지원을 통해 베트남 민중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베트남 현지에 전략촌이나 신생활촌 프로그램을 운영한 미군의 태도가 한국군에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의 민사 작전이 미군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국군이 미군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런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질적 지원에 편중돼 심리적 접촉에 소홀했던 한국군 민사 작전은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응우옌티탄 같은 피해자들이 5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문제 해결을 촉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 ⓒ 이희훈

 
사실, 한국군이 참전한 것 자체가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군의 민사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우리는 베트남을 도우러 왔다'는 인식도 베트남인들을 더욱 다치게 만들었다. 그런 인식이 전쟁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무디게 만드는 측면이 있었다.

위 논문은 참전 군인들과의 인터뷰를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대목에서 "한국군을 대하는 베트남인들의 무표정한 낯빛과 배타적인 태도, 베트남 지역 전반에 흐르는 염전(厭戰) 분위기에 대한 회고가 다수 등장한다"라고 말한다.

위 기사에서 채명신은 한국군 부대가 밤중에 오인 사격을 해서 물소떼 10여 마리를 죽인 일을 언급하면서 "기가 꽉 막히더라"라고 회상했다. 소 값을 물어주고 나니 그런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이 인터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정지영 감독의 영화 <하얀 전쟁>에 나온다. 영화가 35분쯤 됐을 때, 물소떼를 잃은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군영을 찾아가 항의하는 모습이 나온다.

피켓을 들고 고함을 치며 따지는 현지 주민들을 보면서 김문기 하사(독고영재 분)가 내뱉은 말이 있다. "저희 나라 위해 싸우다 보면 몸도 작살나고 산도 작살나고 도로, 건물 다 작살나는 거지"라며 "이거 보상 무서워서 베트콩 잡겠니?"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베트남을 위해 싸우려 왔는데 그 정도 피해 본 것 갖고 따지느냐는 식으로 대꾸했던 것이다. 심리적 준비 없이 참전한 한국군의 실상을 반영하는 한 장면이다.

처음부터 개입하지 말았어야 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월남인들의 재산도 훼손하고 생명도 해치는 과오를 범했다. 그들의 마음도 다치게 만들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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