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 길은 좁은 골목길로 동네가 연결되어 있다. 골목길을 올라가면 은적사라는 절이 나온다. 부처님 오신 날 현수막이 걸려 있고 연등이 달려 있다. 은적사 앞에 약간의 공터가 있고 해서 다른 스케쳐들 몇 분이랑 자리를 잡았다.
어반스케쳐들은 유난히 골목길을 좋아한다. 왜 번듯한 건물보다도 후미지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좋아할까? 그런데 이런 곳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 스케쳐들 뿐만은 아닌 것 같다.
19세기 영국에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 ~ 1900)이라는 분이 있었다(앞으로도 인용할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이 분에 대해 좀 알아보고 넘어가자). 런던에서 태어나서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그는 당대에 대표적인 예술 평론가였으며 몇몇 화가들을 재평가하여 유명해졌다.
그는 인생 후반 사회사상가로 변모해 당시 영국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과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미술 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화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미술사학자이신 유홍준 교수님이 화가를 겸하는 셈이다.
특히 그는 드로잉을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밀도를 높이는 유용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로 일반인들도 적극적으로 드로잉을 배울 것을 권장했을 뿐 아니라, 소묘 강좌를 개설해서 수년 동안 강의도 했다. 이를 토대로 집필된 책이 <존 러스킨의 드로잉>이다. 이 책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이론 서적이 아니라 실기 서적이라서 선긋기부터 화면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매우 실질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그려야 할 것, 그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챕터가 있다.
표면이 매끄럽고 반짝이는 것은 절대 그려서는 안 된다. 특히 형태가 복잡한 것은 더더욱 피해야 한다. 금관악기나 커튼 장식, 샹들리에, 쟁반, 유리잔, 금속 장식품을 그리는 것은 되도록 피한다. (중략) 형태가 단순하고 정갈한 사물은 그리지 마라. 고되기만 할 뿐 그려 놓고 나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가능한 한 거칠고 낡고 지저분한 것을 골라라. 예를 들어 템스 강에 떠가는 나룻배나 텅 빈 석탄 바지선이 썰물에 떠밀려 강둑에 걸쳐 있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 <존 러스킨의 드로잉> 149쪽
존 러스킨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드로잉을 한다면 강남의 높은 빌딩보다는 화전동 벽화마을에 와서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할 것 같다.
너무 유명한 골목길 동네에서는 드로잉 모임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생활인의 관점에서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런데 화전동은 우리를 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등 인사를 하고 가는 분이 많다.
우리가 그리고 있는 곳 바로 옆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대문을 열고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급기야는 땅콩 차를 타 가지고 나오셨다. 할머니는 벽화로 마을을 예쁘게 꾸며놔서 좋다고 하셨다. 마을 뒷산 때문에 공기가 좋아서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이야기를 하나 해주셨다.
여기 마을 분들이 미술 체험 활동을 했는데 마을 분들 중에 하나가 도화지에 자동차를 아주 작게 그렸놨다고 한다. 그래서 왜 차를 그렇게 작게 그려놨냐고 했더니 자기는 원래 작은 차에 불과한데 평생 너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녔다면서 자기를 생각하면서 차를 작게 그렸다고 한다. 말씀만 들어도 뭉클함이 올라온다. 내 차는 얼마나 작게 그려야 할까 생각해 봤다.
분위기 좋게 그리고 있는데, 만년필을 새로 꺼내다가 종이에 잉크를 쏟았다. 우연으로 멋있다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많이 흘렸다. 부지런히 두 장을 더 그렸으나 마지막 장은 채색을 못했다.
오늘도 많은 스케쳐가 와서 즐거운 그림을 그렸다. '고양 월드로 오세요~' 말하기도 듣기도 좋다. 그런데 이 말의 저작권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다. 첫 번째 월요 모임을 했을 때, 윤정열 작가님이 즉석에서 제안했다.
윤 작가님은 서울 금호동에서 월가 아뜰리애를 운영하시고 그 자신도 어반스케쳐 작가다. 고양 월드에 한 번도 빠짐없이 열성적을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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