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3 18:42최종 업데이트 22.05.03 18:42
  • 본문듣기

아베 전 총리 만나는 한일정책협의대표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일본에 파견한 한일 정책협의대표단 단장인 정진석 국회부의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27일 도쿄 중의원 회관에서 아베 신조(제일 오른쪽) 전 일본 총리와 만나고 있다. [한일 정책협의대표단 제공] ⓒ 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재임 중에 있었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났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파견한 한일정책협의대표단은 그런 아베 신조에게 동조의 뜻으로 해석될 만한 약속을 해주고 돌아왔다.
 
지난달 27일자 NHK 인터넷판 기사인 '아베 전 수상, 한국 대표단에 위안부 문제 둘러싼 일한합의 이행 요구(安倍元首相 韓国代表団に慰安婦問題めぐる日韓合意履行求める)'에 따르면, 그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30분간 진행된 면담에서 아베 신조는 2015년 합의가 파기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 합의 이행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윤석열 대표단은 "쌍방의 노력이 중요하다"라고 답변했다.
 
지난달 20일, 윤석열 차기 정부의 외교정책을 담당할 박진 외교부장관 후보자가 "위안부 합의는 한·일 간 공식 합의"라고 발언했다. 박진 후보가 그런 방식으로 일본에 메시지를 띄운 뒤에 대표단이 아베 앞에서 위와 같은 답변을 한 것이다. 정진석 단장은 아베와의 면담 뒤에 가진 28일자 특파원 간담회에서도 자신이 아베에게 "지금의 한일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문재인 정부도 작년 1월 18일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합의의 유효성을 확인했다. 그래서 양국 정부 차원에서는 이미 합의가 복원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윤석열 차기 정부가 사실상 합의 복원을 외치는 것은 지금 진행 중인 위안부 소송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손해배상을 하게 되는 일을 막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 받지 못하고 눈 감은 김양주 할머니

지난 1일 밤 10시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양주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2009년에 경상남도의회의 위안부 결의문 채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때 "일본이 사죄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호소했던 김양주 할머니가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산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양주 할머니 빈소. ⓒ 정갑숙

 
2015년 합의 때 아베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 입장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그 뒤 아베가 보여준 행동은 피해자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것이 거짓 사과였다는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베 자신에 의해 입증됐다. 그로 인해 김양주 할머니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한을 품고 눈을 감게 됐다.
 
김양주 할머니가 어떤 방식으로 위안부가 됐는지 살펴보면, 그가 별세하기 직전에 윤석열 대표단이 아베 신조에게 했던 말들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 중앙대 교수)가 5월 2일 홈페이지에 올린 부고 기사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3·1운동 5년 뒤인 1924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하고 어머니 및 언니와 함께 경남 마산으로 이주해 날품팔이를 하던 소녀 김양주는 1940년 가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연행을 당했다.
 
위안부 동원의 대표적 방식인 감언이설과 강압 중에서 그에게는 후자의 방법이 적용됐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정리된 사연은 이렇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괄호를 넣었다.
 
"열일곱 살 되던 1940년 가을쯤,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셨습니다. (김양주 할머니의) 어머니와 이웃 사람들은 무서워서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김양주) 할머니는 그길로 기차와 배를 타고 만주로 끌려가 끔찍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반항하다가 매를 맞아 오른쪽 귀 고막이 다쳐 청력을 잃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 며칠 전, 일본군 소위가 할머니를 일본으로 데려가려고 강제로 끌고 위안소를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도중에 도망쳐 만주 어디쯤 조선인 집에 숨어 지내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조선인 피난민 대열에 끼여 군함을 타고 어떻게 어떻게 귀국하여 가족들을 다시 만나려고 마산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차고 넘치는 증거들

강압적 방법으로 연행하는 경우에 일본 군경들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가는, 1992년 7월 노태우 정부의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이 발표한 <일제하 군대위안부 실태 조사 - 중간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법이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고서에 인용된 사례들을 아래에 그대로 옮긴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괄호를 병기한다.
 
"1942년 3월 처녀 공출이란 명목으로 영장을 받고 일본 순사한테 강제로 연행되어 끌려갔다. 여러 명(을) 창고에 가두어 두고 1명씩 불러내어 조그마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말 안 들으면 죽여버리겠다며 1일 3회 정도 성폭행을 강요당하였다."
 
일제 경찰에 연행된 뒤, 위안부가 되는 줄도 모르고 끌려가다가 불임수술까지 받은 사례도 있다.
 
"1938년 8월 왜경의 놋그릇 상납요구 거절 및 창씨개명 반대 이유로 가족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이장의 권유로 애국봉사대에 지원하면 아버지가 석방될 수 있다기에 스스로 지원하였으나 그길로 종군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위안 장소(자카르타)로 연행되어가는 도중 광동에서 불임수술을 받았다."

일제 경찰이 찾아와 '같이 좀 가자'고 해도 겁을 먹을 텐데, 살해 협박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1940년 9월 일본 순사들이 와서 출동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 찔러 죽인다고 협박하여 오사까 근방으로 연행된 후, 3일 후부터 하루 평균 5~7명 군인을 접대하였다."
 

마산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양주 할머니 빈소. ⓒ 정갑숙

 
경찰 몇 명이 아니라 군대가 들이닥쳐 납치극을 벌이는 사례도 있었다.
 
"1939년 12월 집에서 군인 20여 명이 총검을 들고 위협, 강제로 군용 트럭에 실려 영상포(영산포의 오기인 듯) 소재 창고에 있는 15명의 여자와 나주에서 15명의 여자들과 합세되어 또 다시 열차로 신의주·만주를 거쳐 천진(톈진) 주둔 일본군 히노마루부대에 도착하였다.
 
15명씩 한조를 이루어 임시로 지은 가건물의 여러 개에 나누어졌고, 가건물 속에는 가마니로 칸을 만들어 한 사람씩 넣어 치욕적인 생활 속에서 고통을 참다못해 목을 매거나 도망을 치다 총을 맞아 죽는 여자들도 있었다."

집에 들이닥친 일본군이 아니라, 여행 중 동석한 일본군에게 끌려가 그대로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일부 일본군 병사들의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1942년 11월 16세 때 만주 봉천 기차여행 중에 옆자리의 군인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갔다. 군병영내의 막사에 중국 여성들을 포함하여 약 20명 내외가 수용되어 위안부 생활을 하였다."

일본군인들이 직장에까지 들이닥치는 사례도 있었다.
 
"1944년 9월 방직공장에서 야간 조업 중 일본군인 15명 정도가 무장으로 들어와 여러분은 앞으로 일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하자, 미리 눈치를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고 나머지 49명만 연행되었다."

모든 경우에 위와 같이 연행된 것은 아니지만, 위 장면들은 위안부 동원의 주요 양상 중 하나였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 한국인들이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한국인들이 위안부 모집을 얼마나 혐오했으며, 당시의 일본제국주의가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 알 수 있다.
 
김양주 할머니도 일제 경찰에 연행돼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윤석열 정부가 아베 신조에게 약속했던 그 노력이 김양주 할머니의 한을 푸는 방향인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김양주 할머니의 별세로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11명으로 줄어들었다. "일본이 사죄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는 할머니의 염원은 우리 모두의 숙제가 되어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