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6 19:11최종 업데이트 22.05.0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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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슈퍼마켓의 해바라기유 판매코너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재고 부족으로 비어 있다. ⓒ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세계 에너지와 곡물 가격이 들썩이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에너지와 곡물 주요 수출국인데, 전쟁으로 인해 이들 상품 공급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이 초래될 것이라 예상한다.

가치사슬이란 제품 제작과 판매에 필요한 경영활동 전 과정(연구개발, 설계·디자인, 조달, 생산, 물류, 마케팅, 사후 서비스 등)을 일컫는다. 근래 몇 년 동안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2019년 7월 1일 일본군 강제 동원 관련 배상 판결 문제로 일본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불화수소(에칭가스)를 대한(對韓) 무역 규제 제품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외치며 여러 대응책을 내놓았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중국 우한 지역 공장이 셧다운되면서 자동차의 핵심 중간재인 와이어링 하니스 공급이 중단됐다. 와이어링 하니스는 일종의 전선뭉치로 자동차의 전자 제어에 필수적인 부품이다.

2021년 10월 중국의 비료원료 수출 통제로 한국과 유럽에서 요소수 대란이 있었다. 요소수는 디젤엔진의 온실가스를 저감하는 소재다. 와이어링 하니스와 요소수는 기술적으로는 국내 생산이 가능하나 비용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한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 조합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앞에서 요소수 부족과 가격 폭등 사태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했다. 2021.11.9 ⓒ 권우성

 
일상화된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

세 차례 파동을 거치면서 국내에서도 글로벌 가치사슬(GVC, Global Value Chain)이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글로벌 가치사슬은 한 제품의 가치사슬 활동이 단일 국가 내의 기업들이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 속한 기업들을 통해 이뤄지는 것을 일컫는다.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이란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여러 활동 중 핵심적인 활동이 중단되거나 공급 네트워크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제품 생산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일컫는다. 개별국가 내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공급 중단, 가격 급등, 생산 중단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이 겪은 세 개의 사례는 각각 시사적이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는 한일 간 역사 갈등에서 비롯됐다. 와이어링 하니스의 공급 중단은 예기치 않은 코로나19의 대유행과 그에 따른 중국 공장 생산 중단의 결과다. 요소수 공급 중단의 원인은 중국과 호주 간의 갈등이고, 더 크게 보면 미국-중국 간의 패권 갈등에서 비롯됐다.

셋 모두 비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가치사슬 교란이었다. 정보통신 기술과 교통혁명은 생산의 세계화를 급속히 증가시키고, 제품 생산 비용을 혁신적으로 낮췄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기, 국가 간 역사 문화적 갈등,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글로벌 가치사슬의 교란이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소재·부품·장비 산업 주요국별 수입액(단위: 100만 달러). 출처: 소재·부품 종합정보망(2020) ⓒ 산업통상자원부

 
중국 의존도 높은 소재·부품·장비

위 그림은 소재·부품·장비 산업에서 한국이 수입하는 국가별 재화 수입액을 나타낸다. 그림에서 보듯이 중국 제품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 또한 주요 5개국 수입액이 전체 소부장 수입액의 69%를 차지할 만큼 집중도가 크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품 중 특정 국가 의존도가 80% 이상 되는 제품이 3941개였고 그중 대중국 의존도가 80% 이상 되는 품목은 1850개다.

요소수나 와이어링 하니스처럼 생산에 필요하지만 기술 수준이 높지 않은 제품도 가치사슬의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 비용경쟁력 차원에서 국내 생산이 쉽지 않은데, 이들 제품의 공급이 중단되면 물류대란을 유발하거나(요소수) 자동차의 생산이 중단되기(와이어링 하니스) 때문이다.

반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은 국내 기업의 제조역량이 따라갈 수 없어서 일본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품목이다. 정부는 소부장 독립을 그렇게 외쳤지만 두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식량, 에너지와 같은 전략 자원은 생산을 위해 고기술이 필요하지 않지만 공급 중단 시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9일 오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 반도체 연구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2022.4.29 ⓒ 인수위사진기자단

 
한국 제조업은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비중이 매우 높다.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비중이란 해외로부터 소재, 부품, 장비를 수입해서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조업 상품의 비중을 의미한다.

한국무역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비중은 55%로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 대비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한 제품의 제조에서 해외 수입 중간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제조업은 최종재를 생산하는 후방가치사슬 참여보다 중간재를 수출해서 다른 국가의 기업들이 최종재를 생산하도록 하는 전방가치사슬 참여 비중이 크다. 반도체, 자동차 부품, 1차 금속, 석유화학 제품 등 한국의 주요 수출품들이 대부분 다른 재화를 생산하는 중간재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품을 전 세계에 공급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기계장비를, 현대모비스는 수송기계 부품을 수출한다. SK화학, 롯데케미칼 등은 화학소재를,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를 세계시장에 공급한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1차금속(소재) 공급 기업이다.
 

제조업 및 소부장 기업 규모별 부가가치와 고용(단위: 백만 원, 명, %). 출처: 소재부품종합정보망(2020). 주: 대기업 300인 이상, 중기업 300인 미만 50인 이상, 소기업 50인 미만 10인 이상(10인 미만 소상공인 사업장 제외 ⓒ 산업통상자원부


위 표는 소부장 산업의 기업 규모별 부가가치, 고용 비중을 나타낸다. 부가가치나 고용 면에서 제조업 전체에서보다 소부장 산업에서 대기업 비중이 크다.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에 핵심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소부장에 중소기업들이 중간재를 일부 공급하지만 그 비중은 대기업보다 작다.

2019년 산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소부장 분야에서 50% 이상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갖는 814개 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은 29개다. 반면 일본 283개, 미국 123개, 독일 73개, 중국 및 아세안은 합해서 94개다.

소부장 기업 98% 수출 없어

한국은 조선, 자동차, 기계, 석유화학 등 중고위 기술산업에서 다른 주요국에 비해 경쟁력이 높다. 고부가가치, 고기술 분야 소부장 산업에서 미국, 일본, 독일 기업이 높은 경쟁력을 지녔고, 범용 소재부품에서 중국 기업이 높은 가격 경쟁력을 지닌다.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주력 수출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하는 핵심 고부가가치 부품의 해외조달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이 이에 속한다.

생산 자동화를 위해 도입하는 정밀기계에 대한 일본·독일 등에 대한 의존도도 매우 크다. 미래 자동차, 항공우주 분야에서 핵심인 통신-소프트웨어 관련 전장 부품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

고속성장 과정에서 한국 대기업들은 단기적인 기술 진보를 이룰 수 없는 분야에서는 해외 공급기업들로부터 부품을 조달했다. 선진국 기업들은 기술뿐만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갖기 때문에 제품경쟁력과 가격경쟁력을 동시에 지녔다.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국내 조달이 가능한 핵심 부품은 계열사를 통해 조달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제품은 해외로부터 수입했다.

대부분의 국내 공급기업들(중소기업들)은 수출 선도기업들이 제공하는 사양에 맞춰 중간재를 공급하면서 성장해왔다. 자체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기보다 선도기업이 제공하는 내부 시장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독자적인 제품을 개발할 역량이 축적되지 않았다. 소부장 기업 가운데 해외 수출이 전혀 없는 기업이 97%나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부가가치 고기술 소부장만 가치사슬 교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저부가가치의 범용소재 공급분야에서도 가치사슬 교란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부가가치가 낮아도 그 품목이 없어서 생산이나 물류가 중단될 수 있다면, 이는 중요한 중간재이다.

와이어링 하니스와 요소수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 품목은 공급 경로를 다양화하거나 최소한이라도 국내 생산 기반을 유지해야만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의 영향을 축소시킬 수 있다.

역량 있는 중견기업 집중 육성해야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이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는 여럿 있다. 미국·유럽과 중국·러시아의 패권 갈등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많은 이들은 신냉전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핵심소재 부품에서 특정 국가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한국 경제는 언제든지 외부 요인으로 인한 충격에 취약할 수 있다. 고기술분야에서는 일본 의존도가 높은 반면 범용소재에서는 중국 의존도가 높다. 이는 두 측면에서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는 고부가가치 기술 기반 공급생태계의 구축 필요성이다. 정밀화학, 정밀기계, 항공우주, 반도체 장비 등에서 한국과 다른 주요 선진국의 기술격차는 크다. 이들 분야는 개념설계 역량의 축적, 장기간의 연구개발 투자와 실행을 통한 학습과정을 거쳐야 역량이 커진다. 고부가가치, 고기술 소부장 산업은 기술 전환 주기가 긴 장수명 기술이 지배한다. 이 분야 진입에 성공하면 세계적인 독점력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시장 지배력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세계적 역량을 지닌 주요 소재 부품기업들은 거의 대부분 글로벌 초국적 기업이다. 일본의 정밀화학 소재 기업들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 대기업이다. 연구개발 투자와 장기간의 숙련 형성은 지속적으로 재원을 동원할 수 있는 기업이 실현할 수 있다. 중소기업이 그와 같은 기술역량을 축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소부장 산업의 구조고도화를 위해서는 역량 있는 중견기업 육성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투자와 기술역량 축적이 가능한 중견기업들을 집중지원함으로써 과도하게 집중된 재벌기업(기업집단)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낮추면서 핵심소재 산업도 육성해야 한다.

이는 중소기업을 육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재부품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이들 기업의 기술역량 강화와 규모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이라도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갈등 생기면 한국이 가장 큰 피해

둘째는 지정학적 위기 관리의 중요성이다. 미국-유럽연합의 나토 동맹과 중국-러시아의 유라시아 동맹 간의 갈등이 심화하면 지정학적 위기는 더 큰 위협 요소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주어진 두 가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한국이 자체적인 기술역량을 높이고 범용 소재 가운데 중요한 품목의 국내 생산설비를 갖춘다 해도 현재 수입하는 소부장 품목 중 다수는 여전히 수입할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으로부터 소부장 독립을 외쳤지만, 여전히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일본 의존도가 높은 게 현실이다. 단기적으로 이를 대체하긴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소재·부품·장비산업 성과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7.2 ⓒ 청와대 제공

 
다른 하나는 중국을 거점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지역 내 무역이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가치사슬 교란 속에서도 아시아 역내 무역은 정체하거나 감소하지 않았다. 

글로벌 가치사슬 안정화와 관련하여 한국은 중국, 일본 등 주요 아시아 국가들과 잘 조율해야 한다. 아시아는 세계의 성장엔진이면서 동시에 한국 경제의 가치사슬이 집중된 지역이다.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이 갈등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국가는 한국이다.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도가 한국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부장 경쟁력을 높여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범용 소재 가운데 경제 운영에 핵심적인 품목들은 공급선을 다양화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라도 관련 기업들의 국내 유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해외기업의 국내 투자를 유도하든지 한국 기업의 리쇼어링(해외에 진출한 국내 제조 기업을 국내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정책)을 촉진하든지 국내 생산기반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아시아 교역 비중의 지속적 증대라는 현실은 지정학적 대립에서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도 일정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미국과 강력한 안보동맹을 맺어온 국가지만 동시에 아시아 및 남반부 국가들과 경제적 연결망도 크게 확대하고 있다. 남반부 국가 다수는 지정학적 갈등에서 특정 진영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남종석 / 경남연구원 혁신성장경제연구실 실장 ⓒ 남종석

 
*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남종석 박사는 <소셜 코리아>의 운영위원이자, 경남연구원 혁신성장경제연구실 실장으로 재직중입니다. 한국 제조업 산업생태계, 지역불균등 발전, 제조업의 탈탄소화와 그린뉴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url.kr/jikh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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