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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것으로, 이 교수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편집자말]
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변한 논문 하나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대학원에 지원할 때 'writing sample'을 첨부하게 되어 있지만 기껏해야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보내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Princeton(프리스턴)은 물론 Harvard(하버드)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은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요.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수준이었습니다.

대학생활 하면서 논문을 쓴다는 건 거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요즈음 우리 고등학생도 누워서 떡 먹듯 쉽게 하는 외국 저널에 논문을 게재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구요.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천재들 
 
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치러진 지난 4월 1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수원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치러진 지난 4월 1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수원고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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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00년대 초 대학입시제도가 바뀌면서 갑자기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논문들이 외국 저널에 게재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구요.

이런 천재들이 성장해 우리 학계를 이끌어 간다면 머지 않아 우리 학문의 수준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학계는 여전히 예전의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논문을 척척 써내던 그 많은 천재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천재들이 상당히 많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서울대학교 들어오려면 여간 화려한 스펙을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렇다면 서울대 재학생들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논문 쓰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들이 꽤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내가 지금까지 가르쳐온 학생들 중 나의 학생시절 혹은 입시제도가 바뀌기 이전 세대의 학생들과 비교해 월등히 천재스럽다고 느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내가 배출한 제자들 중 세계 학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이전 세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 논문 같은 것은 써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대학시절에도 그들이 논문을 써서 외국 저널에 실렸다는 건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논문 한 편 써낸 적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자로 성장했습니다.

수시전형의 부작용
 
2022년 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4월 13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2022년 고교 3학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실시된 4월 13일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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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된 일이지만 어떤 학부모로부터 고등학생인 자기 자식이 '경제학원론'을 저술했으니 감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개 고등학생이 경제학원론 교과서를 저술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날고 긴다는 서울대 학생이 경제학원론을 공부하면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 애를 먹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데 말입니다.

당연히 그 요청을 단번에 거부해 버렸지만, 우리의 잘못된 대학입시제도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더군요.

최근에는 이런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대학입시에서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썼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그렇지만 2000년대 초 수시전형이라는 새로운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했을 때 그와 같은 부작용이 당연히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개인적 일을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새 입시제도 도입과정에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는데, 나는 회의석상에서 늘 그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점을 강력히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수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고등학생들이 논문을 썼다고 나서는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논문 쓴 것을 스펙으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이 바뀐 것에 대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

물론 고등학교에서 논문을 쓰는 천재가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2006년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Fields medal(필즈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천재 수학자 테렌스 타오(Terrence Tao)는 12세 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15살에 학문적 업적을 인정 받는 논문을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천재라면 고등학교 시절 논문을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써낸다 해서 이상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 때 논문을 썼다는 친구들은 그런 천재가 아니고 부모들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진 가짜 천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늘 말하지만 그런 쓸모없는 짓에 매달리게 하지 말고 아예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게 만드는 것이 훨씬 더 교육적인 일이 아닐까요?

어린 학생이 스펙 쌓기의 정신적, 육체적 부담에 시달려 건전한 성장을 하지 못하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태그:#대학입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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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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