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0 09:22최종 업데이트 22.05.1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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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2일 목동 야구장에서는 오랜만에 각자 모교의 유니폼을 입은 경남고와 군산상고 출신 전설적 야구 스타들의 경기가 열렸다. 경남고 쪽은 감독을 맡은 허구연을 비롯해 최동원 김용희 이종운 윤형배 등이 포진했고, 군산상고 쪽 더그아웃에는 나창기 감독을 필두로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조계현, 정명원, 이광우, 최해식 등이 앉았다. 1976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연출했던 전설적인 명승부를 기념하기 위한 재대결이었다.
 
경기 전 모여든 수많은 카메라들을 향해 두 팀의 '전설'들은 이리저리 엇갈려 어깨동무를 하며 '친선'과 '우정'을 말했지만, 카메라 뒤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특히 군산상고 더그아웃 쪽에서는 '반드시 이긴다'는 눈짓이 오가곤 했는데, 경남고가 아직 30대였던 두산 베어스의 박보현 매니저를 선발투수로 내보내 시속 130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속구를 꽂아대자 이미 환갑에 다가서고 있던 군산상고의 중심타자들 사이에서는 '저 젊은 놈 새끼…'로 시작하는 진지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 날 더그아웃 한 편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송경섭 전 군산상고 교장은 그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말하자면, 군산상고로서는 오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지. 오늘 경기가 1976년 청룡기 결승을 재현하는 건데, 그 대회는 우리 입장에서는, 말하자면 치욕을 당한 대회거든. 그것도 두 번씩이나. 경남고 쪽에서는 즐기는 마음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군산상고는 입장이 다르지. 글쎄, 오늘이라도 설욕을 했으면 싶은데 … 모르지. 저렇게 나이들을 먹어서."
 
군산상고에 야구부가 만들어진 1968년부터 야구부장을 맡아 1970년대 내내, 오늘날로 치면 단장과 매니저의 역할을 혼자 감당했던 이가 바로 송경섭 선생이었다. 그래서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라는 멋진 별명을 얻게 된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전에도, 그리고 그 날 경기의 모티브가 된 1976년 청룡기 대회 결승전에도 그렇게 더그아웃 한 편에서 9회 말 마지막 순간까지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속삭였던 이가 바로 그였다. 
 

송경섭 전 군산상고 교장 송경섭 선생은 군산상고 초창기 야구부장으로서 이용일, 최관수와 더불어 군산상고 야구부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011 레전드리매치에 출전한 군산상고 선수들은 출전료의 일부를 모아 투병중이던 송경섭 선생의 치료비로 전달하기도 했다. ⓒ 전주방송

 
1976년 청룡기
 
1976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는 치솟던 고교야구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4강전부터 패자부활 제도를 도입해 경기 수를 늘렸다. 준결승에서 승리한 두 팀은 승자결승을 벌여 최종결승 진출팀을 결정하고, 준결승에서 패배한 두 팀은 다시 패자부활전을 치러 이긴 팀이 승자결승전 패전팀과 다시 대결해 최종결승행 마지막 티켓의 주인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준결승은 군산상고와 경북고, 경남고와 선린상고의 대결로 진행됐고 군산상고와 경남고가 각각 승리해 승자결승에서 만났다.
 
두 팀 모두 강했지만, 그래도 한 달 전에 치러진 그 해의 첫 전국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신생팀 신일고에 막혀 1회전에 탈락했던 경남고에 비하면, 그 신일고와 대구상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던 군산상고가 미세하나마 우세하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대통령배 대회 최우수선수 김용남이 어깨 이상을 느끼며 1회전 이후 등판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 군산상고의 고민이었고, 1학년 시절부터 압도적인 강속구와 어이없는 난조를 번갈아 보여줬던 최동원의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 경남고가 기대할만한 요소이긴 했다.
 
그리고 군산상고의 우려와 경남고의 기대는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1976년 6월 18일에 열린 승자준결승전에 어김없이 등판한 최동원과 오랜만에 출격한 김용남이 정면대결했지만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대회 내내 휴식을 취했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김용남의 어깨 상태는 심각했고, 최동원과 부산 소년들의 '한 번 분위기 타면 걷잡을 수 없는' 기질은 그 시절에도 지금과 같았다.
 
3회에 안타와 스퀴즈를 곁들이며 대거 4점을 뽑아내 김용남을 강판시키자 경남고의 타선은 타선대로 살아나며 5점을 더했고, 최동원의 구속은 투구수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점점 더 빨라졌다. 그 날 군산상고의 유일한 1타점을 기록한 3번 타자 김성한은 '어떻게 된 게 경기 후반이 될수록 점점 더 공이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정말 보이지도 않았다'고 회상했을 정도였다. 결국 9대 1의 경남고 승리. 그 대회 대건고와의 8강전에서 10개, 선린상고와의 4강전에서 11개의 삼진을 빼앗았던 최동원이 군산상고와의 승자결승에서 뽑아낸 삼진은 무려 20개였다.
 
다음 날 패자결승에서 선린상고를 꺾고 다시 최종결승에 오른 군산상고는 정상적인 공을 던지지 못하는 김용남 대신 2학년 김성한을 선발투수로 기용했고, 경남고는 어김없이 최동원이 나섰다. 김성한은 7회까지 1안타만 맞으며 1실점으로 잘 버텼지만 경남고 타선은 8회 초 1사후 정제곤의 빗맞은 안타를 실마리 삼아 3연타와 3점 홈런을 집중시켜 5점을 엮어내며 군산상고의 역전의 의지를 꺾었다. 그나마 하루를 쉬고 다시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은 그 날 역시 변함 없는 구위를 뽐내며 12개의 삼진을 빼앗아냈고, 3회까지만 던지고 쉬었던 1회전을 제외한 대회 전경기를 완투하며 단 1실점으로 0.24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56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그 대회 최우수선수는 이론의 여지 없이 최동원이었다.
 

최동원 '압도적인 구위의 공을 던지지만 종종 난조에 빠지는 미완성의 투수'였던 최동원은 1976년 청룡기 대회를 통해 '개띠 삼총사'로, 하지만 그들 중 가장 주목받는 투수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70년대 고교야구의 절정기와 1980년대 프로야구의 초창기를 잇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 영화사 진(1984 최동원 제작사)

  
1976년, 고교야구의 춘추전국시대

1972년 군산상고의 우승이 호남야구의 부활을 알리며 야구의 전국화를 이끌었다면, 1976년은 그야말로 고교야구에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해였다. 해방 이후 경남고의 무패 전설로 시작된 한국 고교야구는 전쟁 이후 인천고와 동산고가 전국대회 연속우승 기록을 놓고 경쟁하던 1950년대를 거쳐 비로소 서울이 중심으로 뛰어든 1960년대로 이어졌고, 1970년대는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경북고는 1971년 주요 전국대회를 모조리 석권했고, 1972년 군산상고의 충격적인 등장 이후에도 1973년과 1974년, 대구상고와 경북고가 2년간 열린 8번의 전국대회 중 6번의 우승을 나누어 가져가는 대구 시대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1975년 대통령배 대회 결승에서 호남의 후발주자 광주일고가 전국최강 경북고를 김윤환의 고교야구 사상 첫 3연타석 홈런으로 두들기며 대구야구의 전성시대에 파열을 내기 시작했고, 1976년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군산상고가 대구상고를 꺾고 우승하며 다시 한 번 '호남야구'가 무시 못 할 도전세력으로 떠올랐음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1976년 청룡기는 이미 대치하던 챔피언과 도전자를 모두 휩쓸어버린 새 챔피언의 등극을 보여주며 우승 후보를 꼽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대통령배 결승에서 무실점으로 완투하다가 9회 초 포수 이만수의 실책으로 실점하며 눈물을 흘린 대구상고의 에이스 김시진과 그를 상대로 끝내 무실점으로 버티며 우승을 이뤄낸 군산상고의 김용남. 그리고 청룡기에서 그 김용남이 어깨 부상을 당하며 주춤해진 군산상고를 상대로 이틀간 32탈삼진으로 난타한 경남고의 최동원. 그 해 고교야구는 그렇게 얽히고 설킨 대혼전 속에서 무수한 명승부와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최소한 다음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주점에서, 교실에서,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에서 무수히 되풀이되며 곱씹어지고 전승되며 전설이 되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와 1980년대 프로야구 초창기를 상징하는 이름이 된 일명 '개띠 삼총사'는 그런 시대의 상징이었고 요약이었다.
 
공동운명체가 된 지역, 지역 대표한 고교야구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성된 울산석유화학단지와 장생포, 미포의 자동차 및 조선공업단지, 마산창원공업단지, 구미공업단지, 그리고 포항제철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매출을 만들기 시작한 1970년대 초반부터 영남의 경제지표들은 눈에 띄게 부풀어올랐다. 반면 식량자원보호를 위해 여전히 농업지역으로 남겨진 호남 대부분의 지역은 정체했고, 서울로 유출되는 인구가 늘면서 빠르게 황폐해졌다. 그렇게 급격히 만들어진 격차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남 출신 대통령과 정권 핵심층'의 차별적 정책결정이었다.
 
실제로도 민주적 정당정치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닌 군사정변의 비밀결사행동을 통해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정부 요직의 발탁을 합리적 절차보다는 개인적 인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공단 입지 선정과 같은 정책적 결정들 역시 힘있는 인사의 의지에 따라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구체적 책임과 사실관계를 떠나,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인식은 '지역'을 공동운명체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고교야구팀들의 대결은 그 팀들에 감정이입하는 수많은 지역민들 사이의 정서적이고 상징적인 대결로 해석되었다.
 
특히 대등한 승리의 가능성, 그리고 혹시 패배했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서울에서 본선이 열리는 전국규모 대회만으로도 최소한 1년에 4번씩 주어지는 고교야구는 지나친 감정적 소비 없이 일상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1976년은 그 상징적 대결의 절정기였고, 그 절정기의 폭발력은 1982년 프로야구의 창설로 이어졌다.
 

영화가 된 고교야구 1977년에 제작된 영화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감독 정인엽)는 1972년 군산상고의 황금사자기 우승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배우 하명중이 최관수 감독 역할을 맡을 것을 비롯해 진유영, 이동진, 강주희 등 청춘스타들이 주연을 맡았고, 당시 군산상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성한 등의 선수들이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원래 군산상고 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이 먼저 영화화를 제안했지만 불발되자 경북고와 손잡고 신성일을 주연으로 기용한 <영광의 9회말>을 만들어 같은 해에 개봉해 맞불을 놓기도 했다. ⓒ 오성자(최관수 감독 부인) 제공

  
35년 만의 설욕, 그리고 추억
 
2011년의 재대결 역시 경남고가 군산상고를 압도하며 시작되었다. 암투병 중에 참석한 35년전의 주인공 최동원이 경남고 벤치를 지키는 동안 그의 2년 선배 김용희가 군산상고 선발 조계현에게 2타점 2루타를 뽑아내며 선취점을 올렸고, 3회와 4회에도 추가점을 내며 4대 0까지 점수차를 벌렸다. 하지만 군산상고는 5회 말 공격에서 석수철과 이광우의 적시타와 상대 수비 실책을 묶어 동점을 만들었고, 6회 말에 또다시 연발된 경남고 수비 실책을 틈타 7점까지 늘리며 35년 만의 설욕에 성공했다.
 
1970년대 군산상고와 경남고 소년들의 환호와 눈물은 1980년대 프로야구 창설의 뼈대가 되었고, 또한 90년대와 21세기로 이어지며 '제과라이벌전'으로 혹은 '롯기동맹'으로 변주되며 여전히 프로야구 팬들을 울고 웃게 하는 이야깃거리로 이어지고 있다.
 
그 날의 경기는 35년 전 어느 날을 기억하는 행사로 기획되었지만, 선수들이 경기중 더그아웃과 불펜과 경기장 안팎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나눈 이야기들은 그 사이의 35년 동안 벌어졌던 수많은 경쟁과 충돌과 화합과 우정의 에피소드들이었다. 그 날 경기 후 또 목동과 영등포와 여의도 곳곳에서 군산상고와 경남고 야구부의 역사를 추억하는, 혹은 그 역사를 오가고 가로지르는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한 술자리가 이어진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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