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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새로운 길에 섰습니다. 늘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온전히 '내 자신'을 향한 길을 향해 가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사주', '타로'... 사는 게 막막하고 답답할 때면 지푸라기 잡듯 뭐라도 믿을 만한 구석을 찾게 되는가 보다. MBTI 검사를 하면 J가 나오는 나는 막연한 구원보다는 이렇다 저렇다고 해주는 저런 예측템들에 끌린다. 그렇다고 어디를 찾아갈 깜냥은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앱'을 깔고 찾아보는 정도이다.

허긴 그 앱에서 '유료'로 이것저것 찾아본 것도 있으니, 어디 찾아갈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하기가 무색하긴 하다. 내가 침을 튀기며 '타로'의 '신박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니 지인이 타로 카드와 해설 책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니 꽤 중증일까. 여전히 답답할 때면 예전에 어머니들이 화툿장으로 오늘의 운세보듯, 타롯장이라도 들춰본다.

'재살'의 시기를 통과하는 법 
 
내가 살던 대로 살면, '재살'은 끝나지 않을 거였다.
 내가 살던 대로 살면, '재살'은 끝나지 않을 거였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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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주'에 올해까지가 '재살'의 시기라고 했다. 재살(災煞), '살이 있는 사람은 재난을 자주 당하고, 감금생활을 하는 관재구설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손재수가 많이 생겨 재산을 지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작년에만 해도 '재살'이란 걸 보고는 아, 내년이면 이 '터널'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 중반, 생각이 달라졌다. 저건 그냥 때가 되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끝내야 하는 거구나!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명 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말처럼 말이다.

마흔 무렵 본 올해의 운세가 잊히지가 않는다. 적을 피해 협곡으로 도망쳤는데, 하늘에서 비오듯 화살이 쏟아지는 삼국지 같은 데나 나올 법한 상황이라 했다. 그리고 정말 그런 시기를 지냈다. 아이 둘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 시절을 보냈었다. 그런 시기가 또 올지 몰랐다. 아니 그때부터 최근까지, 늘 '재살'의 시기였을까.

지나온 결혼 생활은 언제 어디서 또 뭐가 터질지 모르는 그런 지뢰밭을 지나는 처지였다. 그 '지뢰'는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다. 남편의 경제 활동은 '롤코(롤러코스터)'였고, 그 '롤코'의 방향은 주로 '하향'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벌어들이는 내 돈은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늘 턱없이 부족했다. 때로 이러저러한 '수상'을 하며 받은 상금들도 게눈 감추듯 '생활비'로 사라졌다.

결혼 초 남편과 싸우고 친부모님 댁으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아직 아이도 없던 시절, 평생을 딸들 다 제치고, 오로지 아들 하나만을 연연하며 살아오신 연로하신 시어머님과 살기 시작했던 때, 버거웠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 어머니는 달래주시는 대신, '네가 왜 그러고 사느냐'고 하셨다. 뭐가 답답해서, 아직 젊은데 '결혼'이란데 목을 매느냐고 하셨다.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는 말,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말씀이 나를 집으로 돌려세웠다. 이십대 후반, 나에게 '결혼'을 통해 꾸린 '가정'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올초였다. 함께 산책을 하다 작은 애가 그랬다. 아마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가정'을 부여잡고 있는 엄마를 이해해보려 이리저리 고심한 끝이었던 듯,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며 살아온 엄마에게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간절한 과제였겠다고.

나는 늘 해 질 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막막한 처지를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내 '집'을, 내 '가정'을 지니고 싶었다. 또한 몇 십년이 지나도 '이혼'이라는 족쇄에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엄마를 보며, 그런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애가 없던 시절에도 내가 만든 '가정'에 집착했는데 아이들이 생기고는 오죽했을까.    

다행히 저 아이들과 길바닥에 나앉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시절을 지나 감사하게도 두 아이들은 이제 자기 밥그릇은 챙길 나이가 되었다. 직장을 다니는 큰 아이가 명절 보너스나, 성과급을 받으면 용돈을 주곤 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여전히 가끔 어른들께 '용돈'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런 돈들이 차곡차곡 쌓여 내 쌈짓돈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돈들은 뭉텅하고 남편의 빚으로, 밀린 카드값으로 나갔다. 그럴 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 이게 어디냐, 그래도 이걸로 막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정말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돈이 그런 용도로 다 들어갔을 때도 이래야 '재살'이 끝나나 보다 이러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러고도 끝나지 않았다. 내게 '신용불량'이 요구되고, 그것도 부족해서 어디 가서 돈 좀 빌려다 달라는 말까지 들었을 때, 깨달았다. 이 '무한루프'에서, '재살'은 그저 시간이 흘러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달라져야 끝이 나는 거라는 것을. 내 '엄마'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건 '이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지 않아야 하는 거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나의 삶이 누군가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바라며 힘들어 하던 엄마의 삶을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던 대로 살면, '재살'은 끝나지 않을 거였다. 다시 한번 몰린 벼랑 끝에서야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달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해 질 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막막한 처지를 느끼며 살았다.
 나는 늘 해 질 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막막한 처지를 느끼며 살았다.
ⓒ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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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용불량자'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나이에 돈 빌려 달라 그러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제 제 앞가림을 하며 사회인으로 살아가려는 시점에서 부모로 인해 안 그래도 어려운 젊은 세대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내가 달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심을 하고 나니, 아이가 말했다. 자기는 진즉에 보이던 것을 왜 엄마는 이제서야 그걸 깨달았냐고.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거란다.' 나의 답이었다. 그토록 오래 내가 부여잡고 있었던 나의 집, 나의 가정, 그걸 '마무리'할 수 있을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다 해보았을 그런 때 말이다. 이제는 길바닥에 혼자 나앉아도 될 용기가 생길 때, 그리고 길바닥에 함께 나앉아야 할 아이들을 다 키워낸 때, 그 때가 말이다. 

'인생'은 '수업료'를 톡톡히 다 치러야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있는 듯하다. 겨우 이십 대 후반의 새댁이 두려워 도망쳤던 '결혼'으로부터의 '탈출', 마흔 중반 내 아이들에게 짊어지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정'으로부터의 '방출'을 이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일모레 육십쯤 되니, 이만하면 그 오랜 족쇄로부터 나를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몸에서 실을 자아내는 거미처럼 '내 가정'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이제 나를 그 '책무'와 '부담'으로 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배양액'이 되었다. 이십 대 중반 이후로 '부모님'의 그늘이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는 아들의 말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 한 몸 잘 건사하며 살아가면 되는 시간이구나.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runch.co.kr/@5252-jh/ 에도 실립니다


태그:#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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