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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8일. '인류의 과학적·문화적·정신적 진보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기 위해 일본 교토에 가 있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트럼프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뉴스를 접하고 걱정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녀는 두려움이 문제의 핵심이며, 모호하고 다양한 형태의 두려움이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이 분노, 혐오, 시기와 같은 감정과 어떻게 연결되고 생산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지, 이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를 숙고한 결과를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책으로 내어 놓았다.
 
책 <타인에 대한 연민> 앞표지
 책 <타인에 대한 연민> 앞표지
ⓒ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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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2022년 3월 9일 밤, '여성가족부 해체'로 상징되는 젠더 갈라치기, 노조, 시민단체, 이주민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조장한 윤석열 후보의 당선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처럼 혐오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부제대로 우리에게는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법'이 절실히 필요하다.

두려움은 태어나면서부터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취약성과 무력감에서 비롯되고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 결코 없애버릴 수 없는 압도적이고도 원초적인 감정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정치와 만나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된다. 미국은 생활수준의 하락, 실업,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로 인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고, 두려움의 정치는 그 두려움의 고통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두려움은 분노라는 괴물을 낳는다. 분노는 보복에 대한 소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를 되갚아주겠다는 마음 없이 잘못된 행동이나 부당한 사건 자체에 분노할 수 있다. 그녀는 이를 '이행 분노(Transition-Anger)'라고 부른다.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해 타인의 인간성을 포용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녀는 혐오를 분석한다. 인간은 체액, 분비물처럼 우리의 동물성, 죽음과 부패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를 '원초적 혐오'라 한다. 원초적 혐오는 너무나 쉽게 '투사적 혐오'로 넘어간다.

투사적 혐오는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로, 지배집단은 특정 집단을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라고,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냄새 나고 성적이며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집단이라고 규정해 성공적으로 지배하고, 안전감을 획득하려 한다. 투사적 혐오는 유대인, 무슬림, 여성, 흑인, 트랜스젠더와 같은 소수자를 향한다.

두려움과 연결된 세 번째 감정, 시기심은 타인이 가진 것에 주목하고 자신의 상황은 그보다 못하다고 비교하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시기심은 '운 좋은 라이벌'을 향한 적대감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사회가 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녀는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중으로 다룬다. 성차별주의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해서 중요한 임무를 맡을 수 없다는 믿음, 혹은 '자연'이 남성을 취업과 정치에 더 어울리게, 여성은 집안일에 더 어울리게 만들었다는 믿음의 체계다. 물론 이러한 믿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여성 혐오의 뿌리는 남성들이 누려왔던 특권, 지위, 기회의 잠재적 상실에 대한 불안과 그로 인한 이기심에 있다. 그것은 종종 성차별주의 깃발을 흔들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을 아내, 엄마, 성적 대상으로 한정하고 가사를 여성에게 강제하기 위한 논리이고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지원하고 삶을 바치길 바라는 남성들의 염원이다.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남성과 경쟁해 성공한 여성에 대한 시기심, 여성들이 내 삶을 뒤흔든다는 깊은 불안과 분노가 뒤섞인 상태의 감정이다. "지금 이대로의 상태가 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남성들의 다짐".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 이 책의 원제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희망이 가치 있는 사랑과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희망은 단순히 정의를 희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량접근법'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역량접근법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역량의 관점으로 정의하며 최소한의 정의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량접근법은 소극적 자유가 아닌 적극적 자유, 모든 개인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 실현되는 평등의 자유의 실현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랑이란 타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최소한의 선을 행하고 또 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 분리하고 모든 인간에게 선한 가능성이 내재한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녀가 강조하는 사랑은 공정한 사회, 사회적 정의를 향해 열려있는 감정으로 정치의 최고 덕목은 사랑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사랑, 연민, 공감과 같은 좋은 감정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다(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

'품위있는 저항'을 촉구하며 인간의 진보를 희망하는 노 철학자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트럼프의 여전한 영향력,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하려는 연방대법원의 판결문 초고 유출 파동, 그에 대응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 보장 법제화 실패 등의 사태를 보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할 것이다. 과거에도 지금도 정의롭고 포용적인 미국은 한 번도 현실에서 온전히 존재한 적이 없고, 평등을 향한 행진이 뒷걸음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커져가는 불평등 속에서 강화되는 경쟁지상주의, 승자독식, 각자도생으로 인한 고통은 '반페미'로 뭉친 '이대남' 현상,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에 대한 분노어린 공격, 난민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표출되고 있다.

소수자를 향한 공격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정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분노는 정의를 위한 투쟁과 연대의 원동력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분노는 분할해 통치하려는 지배계급의 전략에 복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그래도 지난 4월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에 67.2%가 동의했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에 희망을 가져본다. 대다수 시민들이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의 집요한 동성애 혐오 조장에 넘어가지 않고 나와 타자의 '다름'을 긍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름'의 긍정,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됨과 동시에 타인 역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 누스바움이 '혐오의 정치'의 대안으로 제시한, 모든 개인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 실현되는 정치인 '인류애의 정치'가 가능한 조건이다(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차별금지법에 대한 지지는 그 조건이 갖추어졌음을 따라서 더 이상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제정을 미룰 수 없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희망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저항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 -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

마사 C. 누스바움 (지은이), 임현경 (옮긴이), 알에이치코리아(RHK)(2020)


태그:#마사 누스바움, #혐오, #타인에 대한 연민, #두려움, #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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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라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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