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31 11:25최종 업데이트 22.05.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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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내내 고교야구의 인기는 계속됐다. 관중이 늘고 대회가 늘어났으며 야구부를 창설하는 학교들이 늘어나면서 선수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급격했던 성장은 곧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야구선수들의 진로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고교야구의 인기에 힘입어 실업팀도 늘어났고 선수 선발 규모도 커졌지만 고교야구의 팽창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기업에서 야구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학교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많은 비용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1970년대에는 대학 야구팀의 창단이 이어지며 늘어난 고교 졸업 선수들을 흡수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취업 경쟁을 4년간 미뤄두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1970년대 들어 신설된 대학 야구팀들이 본격적으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는 오히려 그 경쟁이 더욱 심화되기도 했다.

대중에겐 아직 낯선 단어였지만, 야구인들 사이에서 프로야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그리고 1976년 야구계 안팎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국직업야구 준비위원회'는 그런 배경에서 시작된 소동이었다.
  

대중에겐 아직 낯선 단어였지만, 1970년대 야구인들 사이에서 프로야구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20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프로야구 SSG 랜더스와 LG 트윈스의 경기의 한 장면. ⓒ 연합뉴스


한국직업야구 준비위원회

1974년 말,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홍윤희라는 인물이 귀국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국에 온 그는 과거 친분이 있던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을 만났는데, 한때 미국에서 대학 체육강사로 활동하며 스포츠 문화를 경험한 홍윤희와 청룡기 고교야구대회를 운영하고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방문 경기와 봉황기 고교야구대회를 창설하며 학생 야구 발전을 주도한 장기영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야구로 수렴되었다.

미국에서 쌓은 경험과 능력을 한국 야구 발전에 써달라는 장기영의 제안을 받은 홍윤희가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자 장기영이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한국 실업야구계 인사들을 소개했다.

실업야구계에서도 처음에는 생소한 인물인 홍윤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1975년 초 재입국한 홍윤희가 20만 달러의 거금을 가져와 초기 자금으로 공탁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곧 홍윤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직업야구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실업야구연맹 사무국장 이호헌을 비롯해 장태영, 허종만, 김계현, 허정규, 정두영, 김응용, 김성근, 유백만, 남승진, 김양중, 김재송 등 실업야구 각 팀의 감독과 고위 간부들이 추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실업야구연맹의 주요 인사들이 가세하면서 추진 작업은 본격화되었다. 1975년 11월 8일 실업야구연맹 이사회에서 '직업야구 창립 추진안'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고, 두 달 뒤인 1976년 1월 6일에는 '준비위원회'를 '추진위원회'로 전환해 정식 출범하면서 '한국성인야구재건안'이라는 이름의 계획서를 발표했다.

그 계획서에 담긴 구상은 파격적이었다. 구상의 골자는 기존의 실업야구팀들을 단계적으로 프로야구팀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그 해인 1976년에 당장 10개의 실업팀에 각 지역의 연고권을 부여하고 다시 연고지의 위치에 따라 5팀씩을 '동해리그'와 '서해리그'로 나누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편성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7년부터는 10개 팀을 6개 팀으로 '헤쳐 모아' 프로팀으로 전환하고 모든 소속 선수들도 각 출신 지역별로 재편성해 완전한 지역 대결 구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그 추진 계획에는 국내 시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도 있었다. 리그 창설 3년 차인 1978년부터는 일본 프로야구와 함께 '동북아리그'를 구성해 각 리그 우승팀 간에 '아시안 시리즈' 대결을 벌여 아시아 야구의 최강팀을 가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구상은 실업야구연맹 이사회 승인을 거쳐 청와대와 문교부, 대한체육회에도 제출되었다.
  

한국프로야구 창설 1982년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 개막식. 1976년 야구인들이 주도한 프로야구 창설 시도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1981년 전두환 정권이 프로스포츠 창설을 추진하자 그 핵심적인 구상이 5년 만에 부활했다. ⓒ 국가기록원

 
특히 '10개 (실업) 구단의 해체 후 6개 (프로) 구단으로의 재편성'이라는 과격한 구상이 가능했던 것은 야구단 운영에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던 공기업 팀들과 반대로 프로팀으로 발전시킬 의지가 강했던 민간기업 팀들의 구상이 맞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실업야구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은행 팀들(한일은행, 제일은행, 상업은행, 기업은행, 농협)은 공기업의 특성상 경영자 나름의 판단으로 금융 외적인 분야에 추가적인 투자를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은행들에 관행화되어있던 각종 비공식 수당들이 전면 폐지되면서 은행원들의 연봉이 20% 가까이 삭감되고 1000명 이상의 은행원들이 퇴직한 1975년의 '금융계 서정쇄신 파동' 이후에는 축소 지향의 운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은행들은 그저 창구 영업에 다소 도움이 되는 '직장 야구부' 수준을 넘어서는 규모의 팽창과 경쟁 심화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팀을 해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반면 그 무렵 실업야구 리그에 뛰어든 롯데와 한국화장품, 포철 같은 기업들은 야구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기존 팀들에 비해 5배 이상의 운영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 실업팀 선수들을 헤쳐모여 식으로 재편성한다면 더 많은 선수들을 보유해 더 강력해진 전력을 갖추고 강팀으로서의 입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10개 구단을 6개로 재편성한다는 구상은 선수들을 내보내고 싶은 쪽과 데려오고 싶은 쪽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다. 

야구협회의 반감과 정부의 반대

하지만 순탄하게 보이던 계획은 곧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실업야구연맹의 상위단체인 야구협회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가 창설되면 당장 1976년 9월로 예정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국제대회에서의 성적 추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적인 명분이었다. 대부분의 국제대회에서 프로선수들의 출전을 막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성인 선수들이 대부분 프로로 전향하게 되면 국가대표팀은 대학선수와 군인 선수들만으로 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업연맹과 야구협회의 입장이 엇갈리자 1976년 3월 3일, 문교부가 내무부, 상공부, 재무부, 대한체육회와 더불어 '관계기관 간담회'라는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얼핏 정부와 야구 관련 단체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토론하는 과정이 될 것으로 보였던 그 자리에서, 싱겁게 결론이 내려졌다. 그 자리에서 문교부를 비롯한 정부기관들이 야구협회의 손을 들어주었고, 실업야구연맹 쪽에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날 회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당시 문교부가 야구협회의 입장에 동조한 논리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문교부가 앞장서서 반대했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야구협회에 동조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교부와 야구협회 사이에 사전에 물밑에서 의견 조율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 야구협회는 기존에 주장했던 '국제대회 준비의 어려움' 외에도 프로야구 창설계획 안에 포함된 일시적으로나마 야구팀 수를 줄인다는 대목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대한체육회 역시 아직 지방에서 야구 경기를 개최할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프로야구 창설은 '시기상조'라고 거든 것으로 알려졌다.

본질적으로는 프로야구가 창설되면 야구협회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있다고 분석한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야구협회의 반대가 아니었다. 당시 정부도 프로스포츠의 창설이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논의의 이면에 숨어있던 또 다른 구체적인 난제 중 하나는 '야간 경기'에 관한 것이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면 대부분의 야구팬들이 야구장을 찾을 수 있는 평일 저녁 시간에도 경기를 편성해야만 했고, 그러자면 야간 경기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홍윤희가 예치한 20만 달러도 대부분 지방 야구장에 야간 조명 시설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의 야외 경기장에 야간 조명 시설이 갖추어진 곳은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야구장)뿐이었다.
  

서울야구장의 조명탑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기념해 1965년에 세워진 서울(동대문) 야구장의 조명탑. 한국의 실외 경기장에 야간조명탑이 설치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사진은 1980년에 열린 6개국 초청 친선야구대회). ⓒ 국가기록원

 
서울야구장의 야간 조명시설은 1963년 서울에서 치러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사상 최초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위원장의 '선물'로 건설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설은 몇 차례의 시범경기를 치른 뒤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특히 1970년대 들어 석유파동을 겪은 뒤로는 조명 시설을 켜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었다. 비싸진 전기요금 부담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 국민적인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던 국가 시책과 모순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방 야구장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해가면서까지 매일 밤 전국 세 곳 이상의 야구장을 낮처럼 환하게 밝혀놓은 채 야구 경기를 치르겠다는 구상을 당시의 정부가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그 자리에 문교부 외에 내무부와 재무부 등이 참석한 이유 역시 경제 전반의 상황을 환기시킴으로써 반대 이유를 설명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야간 경기 진행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 측에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면, 실업연맹 인사들이 특별한 반론 없이 수긍했다는 상황도 이해가 어렵지 않다.

유신의 금욕 담론, 프로스포츠의 태동을 억누르다

4개 정부 부처와 3개의 체육단체가 모두 나서서 의견을 조율한 끝에 결론을 내려야 했을 만큼 그 사건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전 정부적인 움직임이 대통령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고, 공식적인 결정 과정 이전에 미리 검토와 분석과 판단의 과정이 완료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1976년, 재미 사업가 홍윤희가 프로야구 창설 작업을 주도한 적이 있지만, 시기상조라는 야구계의 판단 속에 무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는 것이 이 사건에 대한 오랜 통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프닝'이 아니라 진지하고 현실적인 제안이었으며, 실업야구연맹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범 정부 기관이 나서 계산과 힘겨루기의 과정을 통해 기각된 사안이었다.

특히 당시 반대의 논리 가운데 '실현 가능성'과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의심과 문제제기는 오히려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시의 추진계획이 무산된 이유가 흔히 언급되었던 '시기상조'라거나 '섣부른 것'이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권력관계를 돌파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1970년대 프로야구 창설 시도가 무산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당시 정부가 견지하던 위기 담론 및 금욕적 요구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프로야구창설계획 1982년 프로야구 창설의 설계도가 된 18쪽짜리 계획서. 이용일과 이호헌은 1976년 홍윤희가 만든 '한국성인야구재건안'을 토대로 이 계획서를 만들었다. 5년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두 계획서를 관통하는 것은 '6개 구단으로 시작해 10개로 확장하는, 지역 연고제 기반의 팀 구성'이었다. ⓒ 김은식

 
하지만 야구 선수가 늘어나는 추세는 변함이 없었고, 실업팀들의 수용 능력도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더 질 높은 야구를 더 많이 즐기고 싶은 팬들의 요구도 충분히 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유망한 시장에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어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무렵, 프로야구의 창설이 이미 가능하거나 필요한 것을 넘어, 불가피한 문제로 부풀어오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폐기된 '한국성인야구재건안'은 당시 추진위원회에 참여했던 이호헌과 이용일에 의해 5년 뒤 '한국프로야구창립계획'으로 되살아났고, 그에 따라 지역연고제를 토대로 설계된 한국프로야구는 6개 구단으로 시작해 10개 구단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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