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7 13:03최종 업데이트 21.01.0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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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5일은 벨기에 '국왕의 날'이었다. 공휴일인 이날 1만여 명의 벨기에 군인들은 수도 브뤼셀의 거리로 나섰다. 정부가 군인연금 지급 연령을 56세에서 57세로 상향 조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벨기에의 총병력이 2만 6천여 명이니 병력의 40%가량이 시위에 참여한 셈이다. 이들은 '군인 노조'의 이름으로 정부 정책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2016년 3월 22일 브뤼셀 자살 폭탄테러 당시 주변을 순찰하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부상자들을 돌본 30여 명의 군인과 같은 해 7월 폭탄테러 용의자를 사전에 제압해 테러를 방지한 군인에게 추천된 서훈이 국방부에 의해 반려되자 벨기에 군인 노조는 반대의 뜻을 표명한 바도 있다.


군대에 노조가 있다니. 게다가 정부를 상대로 의견을 내고 시위까지 한다고? 한국인에겐 그저 생소한 풍경이다. 프랑스·독일·네덜란드·스웨덴 등 서구에는 군인이 노조에 가입하거나 직장협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나라가 여럿 있다. 다만 군인의 직무 특성상 파업 등 단체행동권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들 기구는 주로 군인의 처우와 직무 수행, 근무 여건, 안전 문제, 고충 처리 등을 두고 정부와 협의하는 역할을 한다.

고충 호소하는 간부 증가

우리나라에는 현역 군인들로 조직된 단체가 없다. 법률상으로도 군인은 노조는 말할 것도 없고 직장협의회도 꾸릴 수 없다. 경찰·소방관 등의 여타 특정직 공무원들이 직장협의회를 꾸릴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군인은 근무 중 고충을 겪거나 건의할 사항이 있을 때는 개별적으로 지휘계통에 따라 상관을 찾거나 국방부, 각 군 본부 등에 설치된 군인고충심사위원회에 고충 심사를 청구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국방부 고충 및 범죄 신고·상담 전화 '국방헬프콜'을 찾는 간부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국방부 2020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국방헬프콜 이용 건수는 2017년 6만4149건, 2018년 6만1455건, 2019년 4만8932건으로 줄어든 반면, 간부 이용 건수는 2017년 2620건(4.1%), 2018년 3279건(5.3%), 2019년 4135건(8.5%)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상담 사유 중 중독, 부채, 가정불화 등 개인 고충 상담을 제외한 군 생활 고충 상담만 놓고 보아도 간부 이용 건수는 2017년 706건(2.2%), 2018년 726건(2.4%), 2019년 894건(4.4%)으로 증가 추세다. 같은 시기 병사 이용 건수는 감소세를 보였다.

군 바깥의 상담 창구를 이용하는 간부의 수도 늘고 있다. 인권단체 '군인권센터'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센터가 지원한 인권침해 사건 중 간부가 피해자였던 사건은 2017년 152건(19.6%), 2018년 214건(19.2%), 2019년 241건(16.1%)으로 증가 추세다. 
 

서울역에 군인이 서있는 모습. 2020.11.27 ⓒ 연합뉴스

 
최근 군의 인권상황과 근무 여건이 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럼에도 간부들의 고충 호소가 느는 까닭은 간부들의 권리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시로 이사를 다니며 가족과 떨어져 오지에서 근무하고, 상황 발생에 대한 상시적인 긴장감까지 감수하고 사는 이들이 직업군인들이다. 이들에게 고충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며 불편부당함을 그저 참고 버티며 살아가기보다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에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해마다 병력 중 간부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장기적으로 징병제·모병제 혼합의 형태로 가게 되어 직업군인의 수가 늘어나게 된다면 이러한 추세는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다. 군인들의 고충은 개별적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제도와 시스템에 연결된 문제기도 하다. 그럼에도 모든 군인이 각자의 고충을 민원의 방식을 통해 개인적으로 호소하고, 지휘관이 일일이 이를 접수하여 처리하는 방식은 소모적이다. 근무 환경에 관한 일선의 고충을 수합해 부대와 국방부, 나아가 국가와 협의하고 조율해가는 창구가 고민되어야 할 때다.

군인도 사회인이자 직업인

독일은 1991년 '군인참여법'을 제정하여 일선 부대마다 전투·작전 등의 지휘 업무를 제외한 인사·행정·사무 상의 문제 및 근무상 발생하는 이해관계에 관한 갈등을 조정하는 대표위원을 두고 있다. 대표위원은 현역 군인 중에 부대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다. 각 부대의 대표위원들이 모인 전체대표위원회는 제반 문제에 대해 국방부와 협의 테이블에 앉아 의견을 개진한다.

프랑스는 1969년 '군 최고평의회 관련 법률'을 제정해 현역군인 계급별 대표자, 제대군인 대표자 등으로 구성된 최고평의회를 두었다. 임기가 2년인 61명의 평의회 위원들은 선출직이며 군인의 근무 환경, 군인 가족의 생활 여건, 군인과 그 가족에 대한 지원, 일-가정 양립, 퇴직 후 취업 지원, 문제 등을 국방부 장관과 협의한다.

이들 나라에서 이러한 제도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군의 기강이 무너졌다거나 국방 안보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오히려 직업군인의 근무 만족도가 높아지는 만큼 군의 사기는 오르게 된다. 견주어 고민해 볼 선진적인 제도는 많다.

공무원들은 노동조합과 직장협의회에 가입할 수 있다. 2019년에는 '공무원직장협의회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그동안 직장협의회 조직이 불가능했던 경찰공무원의 직장협의회 설립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 6월 18일 경찰청 공무원 직장협의회 출범을 시작으로 각급 경찰 관서에 차례로 직장협의회가 생겼다. 이제 군인의 차례다. 유독 군인에게만 직장협의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차별이다.

지난해 8월 모종화 병무청장이 중장기적으로 모병제 추진을 고민할 때라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모병제의 핵심은 군인을 전부 '직업인'으로 뽑는다는 데 있다. 시간과 예산을 투여해 군의 구조와 편제를 모병제에 맞게 점진적으로 바꿔본들 군인을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많지 않으면 모두 공염불일 뿐이다.

군인은 외적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직업인이기도 하다. 명예와 보람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준비하는 마음으로 군인 직장협의회 설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덧붙이는 글 김형남 기자는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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