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3

1초의 주저함 없이, 역사 교사가 꼽는 '한산'의 백미

[ 영화 '한산' 이렇게 봤다] 임진왜란의 납작한 역사 인식 벗어나게 해 줄 '항왜'

22.08.03 20:25최종 업데이트 22.08.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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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명량>보다 낫다고 입을 모았다. '국뽕 끼'도 훨씬 덜하고, 전투 장면마다 사용된 CG도 배우들의 연기를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한글 자막이 낯설기는커녕 사실성과 몰입도를 높여준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여기저기서 천만 관객 달성이 무난하리라는 상찬이 쏟아지고 있다. 과연 러닝타임 두 시간이 순간처럼 느껴질 만큼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이라는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소재를 영화라는 도구로 이렇듯 다양하게 변주하는 감독의 역량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 속 '항왜'의 등장
 

영화 <한산> 스틸 이미지.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감상평이야 십인십색일 테지만, 내게 <한산>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 1초의 주저함 없이 '항왜(降倭)'의 등장이라고 답하겠다. '항왜'란 조선에 투항한 왜군을 일컫는 용어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숱한 영화 중에 '항왜'를 줄거리의 중심에 둔 작품이 과거에 있었나 싶다.

그래선지, 영화 속 진짜 주인공이 이순신(박해일 분)도 와키자카(변요한 분)도 아닌 '항왜' 준사(김성규 분)로 여겨졌다. 관객들이 '항왜'의 존재에 대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이순신과 와키자카 등의 실존 인물을 활용했다고 느껴질 정도다. 대사의 분량 역시 그 둘에 못지않다.
 
영화의 초반부 '항왜'의 느닷없는 등장이 생뚱맞기는 했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되어 조국을 등졌다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당시 '항왜'의 존재와 활약은 어김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로 인해 영화적 상상력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있다.
 
참고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항왜'의 대표 격인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서원이 있고, 그의 후손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은 물론, 30여 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加)'로, 우록 김씨의 시조가 됐다.
 
굳이 '항왜'를 등장시킨 이유는 뭘까. 고작 덕장으로서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국뽕'의 효과를 노린 기획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만약 '국뽕'을 노릴 거였다면, 이순신과 와키자카 둘 사이의 'CG 대결'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섣부르지만, 난 지금껏 철저히 금기시하던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깔려있다고 봤다. 우리는 한 편의 영화가 백 번의 수업보다 역사교육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근래 개봉된 영화 몇 편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잊힌 독립운동가 홍범도와 김원봉의 업적은 영화 <봉오동 전투>와 <암살>, <밀정>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솔직히, 역사 교사로서 영화 속 '항왜' 이야기는 반갑고도 신선했다. '항왜'는 임진왜란의 진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6.25 전쟁이라면 인천상륙작전만 연결 짓고,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만 떠올리는 납작한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려면 '항왜'는 필수 요소다.
 
'항왜'의 존재를 통해, 반대로 '항조'도 있었음을 자문자답하듯 깨닫게 된다. '항조'란 당시 왜군에 투항한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필자가 굳이 붙인 이름이다. 사용된 적도 거의 없는 데다 공식적인 용어도 아니지만, 왜군에 투항하여 앞잡이 노릇을 자임한 이들이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 <한산> 스틸 이미지. ⓒ 롯데엔터테인먼트

 
학창 시절, 임진왜란 수업 때 '엉뚱한' 질문을 한다며 선생님으로부터 혼쭐이 난 적이 있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채 20일도 안 돼 한양을 함락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가 뭔지를 여쭸다. 지금도 길을 따라 줄곧 걸으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보름이 넘게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다.
 
'파죽지세'라는 설명만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교과서엔 치열했던 상주 전투에다 배수진을 쳤던 탄금대 전투 등 숱한 저항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더욱이 곳곳에서 의병과 승병까지 국난극복에 나섰다는데, 그토록 빨리 한양이 무너졌다는 게 당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마다 답변은 한결같았다. 조정에서 당쟁이 격화되어 전쟁 대비에 소홀했다는 것. 전가의 보도처럼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무시됐다는 점과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정세 판단 등을 근거 삼았다. 시험에 출제돼도 늘 정답은 그것뿐이었다.
 
결과론적인 너무도 뻔한 답변에,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호기심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아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이라면 게걸스럽게 찾아 읽었다. 제목만 알고 있던 <난중일기>를 접한 때도 그즈음이다. 그제야 '성웅' 이순신이 비범했던 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았다.
 
민망한 고백이지만, 임진왜란이 전쟁 당사국이었던 일본과 중국에서는 다르게 불린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일본에서 '왜의 소란'이라며 스스로 비하할 리 없는데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명칭에 관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국민에게 임진왜란은 역대 사건 중 가장 강렬한 이름으로 각인돼 있다.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역(文祿慶長の役, 분로쿠게이조노에키)', 중국에서는 '만력지역(萬曆之役, 완리즈이)'이라고 부른다. '문록경장'과 '만력'은 우리의 '임진'과 의미가 비슷한 연호이며, '역'이란 군사가 동원된 사건, 곧 전쟁이라는 의미다. 최근 중국에선 '항왜원조(抗倭援朝)'라는 명칭이 보편적이다. 6.25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명명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조선의 도공들이 죄다 일본에 끌려갔다는 것도 반쪽짜리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엄격한 신분제의 굴레와 핍박에 못 이겨 일본에 건너간 사례도 많았다는 점은 몇 차례 개정된 뒤에야 비로소 교과서에 실렸다. 일본 도자기의 뿌리가 조선이었다는 '자랑스러운' 서술과 함께 말이다.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의 군대 역시 왜군 못지않게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의존할수록 그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비참해졌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실상 백성들을 두 번 죽이는 언명이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영화 <한산> 스틸 이미지. ⓒ 롯데엔터테인먼트

 
스스로 찾아내 수긍한 답이 바로 '항조'다. 곳곳마다 '항조'가 없었다면, 그토록 빨리 한양이 함락됐을 리 없다. 나침반도 없던 시절, 물설고 낯선 땅에 건너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그들은 왜군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지고 없다.
 
'항조'에 대해 기술하는 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발상이다. 하지만 반면교사 삼을 일이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발뺌할 순 없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고, 부끄러운 역사 또한 우리 역사다.
 
어느 나라의 역사가 안 그러랴마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도 있고, 일본인보다 더 일본을 사랑한 우리나라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 점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국뽕'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임진왜란 당시 온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에 맞섰다는 건 맹목적인 환상이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고 한민족이라며 뭉뚱그리는 데서 '국뽕'이 시작된다.
 
뭉클했던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다. 포로로 잡힌 '항왜' 준사가 이순신 앞에서 이 전쟁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바로 그 장면. 그때 이순신의 대답이 압권이다. 영화 <한산>이 단순한 '국뽕' 영화가 아니라는 걸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항왜' 준사를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노파심에 한마디 얹는다면, 등장인물이 조선 수군인지 왜군인지를 따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이순신이 의를, 와키자카가 불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영화를 오독하는 것이다. 의와 불의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존재는 이순신도 와키자카도 아닌 바로 '항왜' 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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