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9 12:22최종 업데이트 22.08.0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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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수준에서 야구의 보급과 발전이 느린 이유 중의 하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고립주의였다. 명실상부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뛰는 메이저리그는 미국과 캐나다 이외의 지역으로 시장을 확대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외부에서 마땅한 경쟁상대나 도전세력을 발견한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세계 최강이란 국제대회 우승자가 아닌 미국 프로야구 양대리그인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승자들 사이의 최종전인 '월드시리즈'의 우승자를 의미할 뿐이었고, 북미 이외의 지역이란 간혹 흥미로운 유망주가 발견되는 제 2의 선수공급처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또 다른 미국의 인기 스포츠 농구가 1992년부터 프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들로 '드림팀'을 구성해 올림픽에 출전시키며 세계적인 농구 열풍을 일으킨 것과 달리 야구는 올림픽 기간 중 리그 운영이 차질을 빚는 것을 꺼리며 끝내 선수 파견을 거부해왔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야구의 정식 종목 지위가 흔들리고 아마추어 야구 국제기구들이 존폐의 기로를 오갈 만큼 피폐해지면서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약간의 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절실한 필요의 절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쌓여가는 외부의 비난 여론에 대한 소극적 대응 차원에 가깝긴 했다.

그런 맥락에서 2006년, 미국 프로야구(MLB) 사무국의 주도로 축구의 월드컵과 유사한 위상을 지향하는 세계대회를 창설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다. 그 대회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2005년 IOC 총회에서 야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제외된 사건이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시작한 그 대회는 비록 여러 가지 졸속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을 수 있었다. 
 

2009년 WBC 대표팀 70년대생으로서 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야구의 상징적인 이름들인 이종범, 박찬호, 이승엽이 1,2회 WBC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었고 각자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그들과 함께 '82년생' 이대호, 추신수, 정근우, 김태균 등이 이룬 '신구조화'는 한국야구대표팀 역사의 한 정점을 이루었다. ⓒ 윤욱재

 
특히 프로야구리그를 운영하는 국가들이 많지 않고, 국가 간 전력차가 크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선수의 국적이 아니라 혈통적 연관성만 있다면 해당 국가의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도록 출전조건을 완화했는데 예컨대 이탈리아계 이민 3세인 미국인 마이크 피아자가 이탈리아 야구대표팀으로 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식이었다. 다수의 유럽 이민자 가문 출신의 선수들을 통해 유럽에 야구 문화를 전파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다.

그 첫 대회에서 주최국인 동시에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액의 연봉을 받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비롯한 슈퍼스타들로 팀을 구성한 미국이 절대강자로 분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로는 미국 다음으로 스타급 메이저리거를 많이 보유한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이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들로 꼽혔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프로야구 리그를 가진 일본이 잠재적인 도전 팀으로 평가받는 정도였다.

그에 비해 한국은 '복병'이라기에도 민망한 도전자 그룹의 평범한 한 나라에 불과했다. '세계 3대 프로야구리그'를 보유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 1, 2, 3위 리그 간의 규모와 수준 차이가 매우 컸고 최대 최고의 리그인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의 수는 오히려 미국과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북미 지역 나라들에 한참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감독 김인식 김인식 감독은 뇌경색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1,2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한국야구를 세계야구의 중심에 올리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두산과 한화에서 이룬 업적에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성과가 더해지면서 그에게는 '국민감독'이라는 영예로운 수식어가 붙게 됐다. ⓒ 유성호

 
미국과 메이저리거들의 위상은 그들이 받는 연봉의 압도적인 수준만으로도 표현될 수 있었다. 예컨대 2006년 시즌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연봉은 2500만 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300억 원 가량이었으며, 국내 프로야구에서 연봉총액이 가장 적은 구단은 28억 8천만 원으로 선수단 전체를 구성한 두산 베어스였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 리그 8개 구단 선수 전체 연봉 총액이 실제로 300억 원 안팎이었으니, 알렉스 로드리게스 한 사람의 연봉이 한국프로야구리그의 모든 선수들의 연봉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파란이 일어났고,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이었다.

최강 미국, 복병 일본, 기타 등등 한국

첫 대회 출전팀은 별도의 예선 없이 사무국이 16개 국가를 선정해서 초청했는데, 아시아에서는 이견 없을 3강인 한국, 일본, 대만과 함께 거대 시장의 잠재력을 인정받는 중국이 초청됐고,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와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파나마, 푸에르토리코의 8개국이 출전했다. 나머지 지역에서는 유럽의 전통적인 양대 강국인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더불어 호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선정되었다.


그 16개 나라를 4개국씩 4개 조로 편성해 각 조의 1, 2위 팀이 2라운드에 진출해 다시 2개 조로 나누어 경쟁하고, 그 2개 조의 1, 2위 팀이 4강을 의미하는 결선 라운드에 올라가서 준결승과 결승전을 벌이는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예선 1라운드의 1, 2위 팀이 2라운드에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음 라운드의 같은 조로 묶이며, 2라운드도 함께 통과하게 될 경우 결선라운드 준결승에서도 다시 만나게 되는 기괴한 방식이었다. 주최자인 MLB 사무국이 그렇지 않아도 절대강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우승 가능성을 좀 더 확실히 높여두기 위해 객관적 전력이 강하다고 평가된 같은 아메리카 대륙 팀들을 기피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아시아 팀들과 함께 묶이게 한 의도가 엿보이는 편성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문제를 적나라하게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은, 미국의 압도적인 우승이 아니라 예상을 깨고 선전을 이어간 한국과 일본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예선 1라운드 같은 조에서 만나 한 번 맞대결을 벌였고, 함께 2라운드에 진출해 다시 한 번 같은 조에 묶이며 2차전을 치렀다.

일본과의 두 차례의 맞대결에서 모두 승리한 한국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미국과 멕시코마저 격파하며 조 1위로 결선 라운드까지 올라섰는데, 한국이 미국을 4점이라는 큰 점수차로 눌러준 덕분에 1승 2패에 그친 일본도 득실점 계산 끝에 미국과 멕시코를 따돌리고 함께 결선 라운드에 나가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우습게 되었다. 심판들의 애정 가득한 편파판정까지 더해졌는데도 최강의 주최국팀 미국이 조기에 탈락해버린 반면, 그 미국으로부터 훌륭한 들러리감으로 낙점받았던 한국과 일본이 준결승에서마저 다시 만나면서 무려 토너먼트에서 세 차례나 반복해서 대결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만 것이다.

한일전, 한일전, 그리고 또 한일전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반복된 한일전에서, 그나마도 약한 쪽으로 분류됐던 한국은 거듭 일본을 몰아붙였다. 예선 1라운드에서는 서재응, 김병현, 구대성, 박찬호 등 메이저리거들이 일본 타선을 완전히 봉쇄하는 사이 홍성흔과 이종범의 적시타로 2점을 내며 승리했고, 2라운드에서는 0대 0으로 팽팽하던, 역시나 8회 초에 터진 이종범의 결정적인 2타점 적시타로 또다시 승리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이루어진 세 번째 대결에서는 절치부심한 일본의 선발 우에하라 고지에게 눌린 타선이 끝내 득점에 실패한 반면 잘 버티던 투수진이 7회 전병두와 김병현, 손민한이 연달아 무너지며 6점을 내주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 번 만나서 두 번 이겼지만, 결정적인 한 번의 패배로 결승전 티켓은 일본에게 돌아갔고, 일본은 결승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활약 속에 쿠바를 꺾고 첫 우승자의 영예마저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대회는 주최자인 미국의 왜곡된 설계 속에 한국과 일본이 '지긋지긋하게 만나며' 역설적인 주인공으로 집중 조명을 받았고, 그렇지 않아도 뜨겁던 두 나라의 대결은 더욱 과열되며 여러 후일담을 남겼다. 대회 직전 일본 대표팀의 간판 이치로가 '30년간 한국이 일본에는 손을 댈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도록 이기고 싶다'는 발언을 해 한국의 선수들과 팬들을 자극했고, 한국 투수 배영수는 선배 구대성과 의논한 끝에 그 이치로의 엉덩이를 시속 141km의 빠른 공으로 때려 응징했다.

그리고 예선 2라운드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선수들이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아 쓰라린 일본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고, 일본의 언론은 '다시는 마운드에 깃발을 꽂히지 말라'고 질타하며 일본 대표팀을 몰아붙였다.

물론 우승의 영광은 일본이 가져갔고, 한국의 진격은 4강 무대에서 끝났다. 하지만 한국 야구의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에 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본이 우승을 차지한 사실과 더불어 전 세계 야구팬들을 놀라게 했고, 한국 야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국의 야구팬들마저 놀라게 했다.

3년 만에 되풀이된, 한일전 시리즈

3년 뒤인 2009년에 열린 2회 대회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이어졌다. 1회 대회 우승국 일본에서 열린 2회 대회에서도 같은 조에 편성된 나라들이 계속 만나게 되는 대진표의 문제는 여전했고,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신설했다는 '더블 엘리미네이션'이라는 기괴한 제도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두 번 지면 탈락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경기 수를 늘린 것인데, 한국과 일본은 예선 1라운드에 이미 두 차례 맞붙은 데 이어 2라운드에서도 또 두 번을 맞붙으며 '한층 더 지긋지긋해진' 한일전 시리즈를 이어가게 됐다. 
 

한국의 결승진출 2009년 제 2회 WBC 준결승에서 한국은 1회 추신수의 3점 홈런과 2회 김태균의 2점 홈런 등을 묶어 강호 베네수엘라를 10대 2로 압도했다. WBC 대회 홈페이지는 그 경기의 소식을 전하며 '강하고 침착한' 한국이 결승전에 진출했다고 표현했다. ⓒ WBC

 

다행히 이전 대회와 달리 준결승은 각기 다른 나라를 상대하게 됐는데, 한국은 베네수엘라를, 일본은 미국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각각의 상대를 누르게 되면서, 이번에는 한국과 일본이 결승전이라는 좀 더 큰 판에서 만나게 되고 말았다.

예선 라운드에서 벌인 네 번의 대결에서 각각 2승 2패씩을 나누어 가진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 4위전에서 최정예 국가대표간의 대결을 벌여 한국이 처음 승리한 이후 10여 년 간 이어진 혈전의 정점에 해당하는 경기였다.

그 경기의 서막은 일본이 주도했다. 그 대회 내내 한국 마운드를 지탱해온 실질적인 에이스 봉중근이 혼신의 역투를 이어갔지만 4회 초에 고영민의 실책이 엮이며 먼저 한 점을 내준 반면, 타선은 일본 선발 이와쿠마의 구위에 완벽히 눌리며 타순이 한 바퀴 돌아간 3회 말까지 퍼펙트로 끌려갔다.

하지만 한국은 5회 말 추신수의 홈런 한 방으로 동점을 이룬 뒤, 7회와 8회 각각 한 점씩을 잃었지만 8회 말 이범호의 2루타와 이대호의 희생플라이를 묶어 한 점을 따라갔다. 그리고 9회 말 2사 1, 2루에서 이범호가 승리를 굳히기 위해 나선 일본의 마무리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또다시 극적인 적시타를 때려내며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데 성공했다. 내내 앞서가던 일본을 마지막 순간에 주저앉히며 돌입한 연장전. 아무래도 기세를 올라탄 쪽은 한국이었고, 10년 내내 결정적인 순간에 덜미를 잡혀 온 기억까지 겹치며 불안감에 쫓기게 된 것은 일본이었다.

그리고 연장 10회 초, 일본은 선두로 나선 6번 타자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우전안타를 때린 데 이어 7번 구리하라의 희생번트, 8번 이와무라의 좌전안타가 이어지며 1사 1, 3루의 찬스를 만들었고 9번 가타오카가 3루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면서 2사로 바뀌었다. 이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으면 되는 상황에서 한국 투수 임창용은 타석의 이치로에게 집중하기로 했고, 1루 주자가 무관심 도루로 전진하며 상황은 2사 2, 3루로 바뀌었다.

한국 무대의 최정상에 선 뒤 일본에서 활약하던 임창용과 일본에서 모든 것을 이룬 뒤 메이저리그로 옮겨 다시 그곳의 정상에 선 이치로. 특히 끊임 없는 도전을 통해 한계라고 불리던 것들을 깨뜨려나간 두 개척자는 그 순간 한일 두 나라의 자존심을 등에 업은 채 마주했고, 한 순간 한 순간 피를 말리는 승부가 8구까지 이어졌다.

그 순간 벤치의 김인식 감독은 이치로를 1루로 내보내고 다음 타자와 승부하라는 사인을 냈지만, 그 사인은 투수코치 양상문을 거쳐 투수 임창용에게 전달되고 다시 임창용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 손 끝으로 전해지는 사이 어딘가에서 뒤집혔다. 잡을 수 있다는, 혹은 잡아야 한다는 승부사의 직감이었을 수도 있고 다름 아닌 이치로이기 때문에 잡아내고 싶다는 한국인의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코치였는지 투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거나 투수 임창용은 9번째 공을 한가운데로 던져 넣었고, 역시나 백전노장 이치로는 그 공을 정확히 맞혀 중견수 앞으로 보내며 두 명의 주자를 모두 홈으로 불러 들였다. 비록 뼈아픈 한 방이었지만, 무모하게까지 보였던 그 정면승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입술을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그런 마침표였다.

결과는 만나고 또 만나서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기를 반복한 끝에, 마지막 결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맞선 끝에 받아든, 결국 5대 3의 뼈아픈 패배였다. 결국 일본은 두 대회 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고,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잠실야구장에서 펼쳐진 WBC 결승전 응원전 다시 한 번 한일전으로 이루어진 2009년 WBC 결승전 응원을 위해 국내의 야구팬들은 잠실야구장에 모였다. ⓒ 유성호

  
뼈아픈 패배, 하지만 놀라운 자기발견

하지만 3년의 간격을 두고 두 번이나 반복된 전개는 한국야구의 기술적 수준에 대한 확신을 만들었다. 아시아 야구의 수준이 세계 야구의 중심인 북중미 지역에 비해 떨어지지 않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의 아류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린 것이다. 또한 미국의 야구팬들도 한일전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의 혼신을 다 하는 라이벌전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이를 수 있는 또 한 층의 치열한 층위의 존재를 알렸기 때문이다.

두 차례 WBC에서 거둔 기대 이상의 성공은 국내적으로는 프로야구의 관중이 급증하는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국외적으로는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해외 리그에서 한국인 선수들에 대한 평가가 격상되며 다시 한 번 해외로 진출하는 선수들이 급증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2년 한일월드컵이 촉발한 축구 붐에 밀리며 2006년 304만 명에 머물던 프로야구 연간 관중은 2007년 410만 명으로 약 35%가량 증가했고, 2008년 525만, 2009년 592만 명으로 빠르게 늘어나 1995년에 수립된 540만의 연간 최다 관중 기록을 넘어섰다. 그리고 1990년 법률 개정 이후 올림픽 3위, 아시안게임 1위로 강화되었던 특례 자격에 미달했던 2006년 WBC 3위의 성적을 올림픽 3위와 대등한 것으로 간주해 대표팀 출전선수 전원에 대한 병역 특례 혜택을 부여하기도 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 법 개정을 통한 병역 특례 혜택의 확대로 이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적 열광과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낸 긍정적인 피드백이었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된 야구 발전의 한 결과인 기술적 성장이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로 이어지며 다시 대규모의 팬층을 형성해 더 많은 투자와 정책적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2000년대 한국 야구문화가 확대되는 과정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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